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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풍경이 되고싶은 詩

보여지는 것과 보고 있는 것, 여백 / 조영미

by 丹野 2011. 12. 9.

보여지는 것과 보고 있는 것, 여백

――김경성의 신작시 5편을 중심으로

조영미

 

 

 

김경성 시인이 첫시집 ?와온?을 낸 지 일년이 지났다. 처음 그의 시집을 받아들었을 때, 와온? 궁금했다. 하여 물었더니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생소한 이름이기도 하였거니와 ‘와온’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끌려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전남 순천의 바닷가에 자리한 조용한 마을, 해넘이가 유명한 곳. 와온臥溫은 소가 누워있는 모양을 한 뒷산과 따뜻한 날씨 때문에 붙은 이름이란다. 가본 적 없는 곳이기에 머릿속에 그려지는 와온마을은 소 한 마리가 편안하게 배를 깔고 엎드려 바다 위로 지는 해넘이를 되새김질하는 형상으로 그려졌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시집 ?와온?은 해넘이를 질겅질겅 씹어대는 소 한 마리의 간잔지런한 눈빛이 김경성 시인을 닮았을 거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보건대, 해넘이를 질겅질겅 씹어대는 소 한 마리는 김경성 시인의 부지런한 열정으로, 간잔지런한 눈빛은 그가 시의 언어를 빚어내는 모습으로 남은 듯 싶다. 전자의 경우는 이미 시집 해설에서도 밝히고 있거니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적도 아프리카에서 고산의 티벳까지, 실크로드를 품에 안은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덧무늬 토기가 낙엽처럼 밟히는 폐사지까지 시인의 눈길, 발길이 닿은 곳들이 질펀하게 깔린 시편들”이 많다는 점 때문이었다. ?와온?을 읽는 동안, 참으로 부지런히 이곳 저곳을 찾아다녔을 시인의 모습이 보였다. 시를 만나기 위해 나선 곳에서 호들갑스럽지 않게 그곳의 풍경을 되새김질하는 것, 그것은 김경성의 시에서 마주한 분위기와 어울렸다. 그래서 나호열, 신현락, 고성만 시인이 김경성의 시에서 “수묵담채화풍의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고 언급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후자의 경우는 김경성의 시에 느껴지는 몽롱함 때문이었다. 언뜻 읽기에는 먹색인 듯 하나 읽고 나면, 격정적인 채색이 느껴진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대상을 풍경화 하면서도 그 속에 시인의 격정적인 어조가 화자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 이 격정은 강렬하기보다는 서서히 달궈지는 그런 감정이다. 바꿔 말하자면 시의 여백에 의해 풍경은 점차 사라지고 행간과 행간 사이의 숨은 여운이 도드라져 몽롱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러했던 시집 「와온」의 느낌은 이번 신작시 5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인사 장경판」을 비롯한 4편의 시에서도 이와 흡사한 감정이 느껴지는데, 그 이유가 뭘까.

일반적으로 풍경은 혹은 대상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가령 해인사의 “오래된 숲을 들여다본다”(「해인사 장경판」)고 했을 때, 어떤 이는 숲의 전체를 보고 어떤 이는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를 본다. 여기서 보여지는 대상은 같지만 보고 있는 대상은 다르다. 즉 보여지는 것과 보고 있는 시선의 차이에 따라 대상의 특정 부분이 다르게 인식되고 표현된다. 마치 카메라의 앵글이 어떤 부분을 클로즈업하거나 오버랩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카메라의 앵글을 조정하는 카메라맨처럼 시에서는 시인의 시선과 의도하는 바가 대상을 향해 어떻게 열려있느냐에 있다.

 

 

오래된 숲을 들여다본다

행과 연을 맞추어서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모두 숲의 중심이 되는

햇빛은 사라지고 오직 그림자와 바람만이 가득한 숲

그림자 가득 머금은 채

제 몸을 훑고 가는 바람의 탯줄을 붙잡고 서 있어야만 하는,

관절 마디마디에 짜디짠 바닷물 들여놓고

나이테를 가르며 달려드는 날카로운 칼날에

온몸을 던져서 제 몸에 경전을 돋을새김했던 기억으로

달이 뜨는 밤이면 목신木神의 춤이 시작된다

제 안에 모두 들일 수 있다고

완강하게 서 있는 눈물 출렁이는 숲,

달빛 휘감으며 내려놓는 말씀은 늘 깊다

나무의, 숲의

몸을 끌어안고 제 마음의 심지를 새기면서

옹이까지도 모두 사랑하리라 어루만지던 그 사람의 온기가

나무의 몸 속에 들어 있는 듯

천년이 흘러도 마음 그대로이다

그늘 한 자락 끌어다 덮고 말씀에 젖는다

주석이 필요한 사랑도

더는 내려설 곳 없는 절망도

숲에 들어서면 그대로 위안이 되는

지상에서 가장 은밀한 숲,

묵향 가득한 경전 지상의 숲에 펼치고 있다

그대 숨결 같은 바람 세상에 가득하다

――「해인사 장경판」 전문

 

 

 

알다시피 장경판은 부처가 설파한 교법이 새겨진 경판을 말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으며 장경판이 보관된 해인사는 15세기 건축물로써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소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상식을 토대로 해인사 경내를 둘러볼 것이며 이를 보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인은 해인사의 장경판을 보되 그것의 “천년” 시간을 보고 있다. “천년이 흘러도 마음 그대로”인 장경판에 “돋을새김” 했을 “그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활자 하나 하나에서 “은밀한 숲”의 “숨결”을 듣는다. 만일, 시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사람이 맞다면, 이는 천년의 시간을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천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장경판의 숨은 내력을 알지 못한다. 다만 어마어마한 양의 활자를 새겨 넣은 장인의 정신에 경외감을 느낄 뿐이다. 활자 하나가 한 그루의 나무로 더 나아가 “주석이 필요”하지 않는 “사랑”과 “절망”으로 다가올 때, 비로소 우리는 장경판의 “그늘 한 자락 끌어다 덮고 말씀에 젖”을 수 있다. 그리하여 “묵향 가득한 경전”이 “지상의 숲에 펼”쳐질 때 “옹이까지도 모두 사랑하리라 어루만지던 그 사람의 온기”를 숨결처럼 느끼게 된다.

「해인사 장경판」처럼 「선암매」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시인은 고려시대 대각국사가 심었다는 수령 600년 이상 된 선암사의 매화나무를 보며 “속 깊은 곳에 묻어놓은 시간의 흔적”을 더듬는다. “해탈하지 않고서는 읽을 수 없는/ 무량한 고요의 깊이”는 600년 이상 된 매화나무와 스님, 예불소리와 눈물꽃‧몸꽃‧동백꽃의 대비에 의해 “젖은, 꽃의/ 숨이 깊”은 이유를 생각케 한다. 따라서 「해인사 장경판」과 「선암매」는 오랜 시간의 흔적을 더듬는 시인의 시선에 의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해인사와 선암사라는 시공간이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오랜 시간의 흔적을 시로 형상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지극히 관념적이며 주관적이기 때문에 자칫 감정과잉 상태에 빠진 시를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우리는 종종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썼다는 시를 읽게 된다. 그들 시 중 대다수는 외국 풍경을 감탄하거나 이국 땅에서 느꼈던 소소한 감상을 토로하는데 그친다. 한 편의 시가 감정을 절제하고 압축하여 하나의 이미지나 상징을 만들어야 한다면, 「해인사 장경판」과 「선암매」는 성공적이라 할 만하다.

 

 

 

떠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까지도 뱃전에 세워놓고

떠나지 못한 것들은 늪으로 스며들었다

물억새꽃 핀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엷은 바람이 초흔焦痕을 스칠 때마다 가려움증 번졌다

물방개 발톱 보리까시락에 찔린 것처럼 콕콕거렸다

직립의 시간 원본 그대로 늪 속에 밀어 넣었다

숨죽이고 들었던 소리 쌓이고 쌓여서 한 겹이 되고

겹이 늘어갈 때마다 점점 멀어져 가는 세상

천 년이 여덟 번이나 흘러갔다, 흘러간다는 것은 그대로 두고 바라보는 것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꽃이 피고 지는, 새싹 돋고 나뭇잎 떨어지는, 눈꽃 피었다가

사라지는, 바람이 짚고 다니는 구름의 환락

닿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빛으로 꼬아놓은 씨실, 늪 깊은 곳까지 걸어놓고

허공에 무늬를 짜는 해와 달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비봉리 환목주」 일부

 

 

위의 시 「비봉리 환목주」에서도 “천 년이 여덟 번이나 흘러”간 시간을 볼 수 있다. 수천 년의 시간 속에서도 환목주가 “직립의 시간 원본 그대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비봉리에서 발견된 환목주는 신석기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그래서일까. “붙잡을 수 없는 것들”과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시의 화자는 “그대로 두고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므로 긴 시간 “꽃이 피고 지는, 새싹 돋고 나뭇잎 떨어지는, 눈꽃 피었다가/ 사라지는” “구름의 환락”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흘러간다는 것”과 “그대로 두고 바라보는 것” 사이의 ‘여백’이다. 「해인사 장경판」에서 “천년이 흘러도 마음 그대로”인 것, 「선암매」에서 “속 깊은 곳에 묻어놓은 시간의 흔적”, 「비봉리 환목주」에서의 흘러가는 것과 바라보는 것. 각각의 시는 오랜 시간 살아온 것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들 시를 통해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태도를 알 수 있다. 가령, “달빛 휘감으며 내려놓는 말씀은 늘 깊다”(활자), “해탈하지 않고서는 읽을 수 없는/ 무량한 고요”(매화), “따뜻한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다”(환목주) 등의 화자는 괄호 안의 소재를 통해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것들을 현재의 시간으로 불러들인다. 대상의 외면이 아닌 대상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그를 통해 시간의 경외감이나 경이로움, 따뜻한 손길을 본다. 이러한 표현은 시의 행간과 행간의 여백에 의해 살아나는데, 대상을 향한 시인의 시선과 태도에 직결된다. 즉 무한한 것에서 유한 것의 숨결을 듣다보면 우리네 삶의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짧은 것인가를 알게 된다. 그러니 세상을 향해 겸허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상을 견지하는 것이 시인의 태도일 것이다.

 

 

 

달이 차오르는 날이면 바다의 몸도 부풀어서

뻘밭을 가득히 물고 출렁거린다

나문재 물결도 사라지고

바다의 눈 속에서 출렁거리며 차오르는 달만큼이나

배가 불러 있는 멧새의 집,

새들은 날아가고 동굴 같은 빈집에 늙은 거미가 다녀가셨다

쳐놓은 그물에 꽃이 핀 것처럼

달의 허물이 걸려있다

사스락거리는 달의 소리를 실타래처럼 꼬아놓으면

수평선에 걸린 고래의 지느러미를 붙잡을 수 있을까

허리까지 차오른 저녁노을이 유난히 붉은 저녁이다

눈꺼풀만 남은 달이 뜨는 밤,

바닷물의 수위도 낮아지고 달의 허물도 사그라졌다

조금씩 너의 기억을 갉아먹고 있다

습자지처럼 얇아진 기억이 언젠가는 안개가 될 것이다

기억이 다시 부풀어서 둥글어진 달의 소리를 듣고 바다가 출렁거리면

기억의 행간을 뛰어넘은 갯바람이

새들의 둥근 방 근처까지 차오르고

돌아온 새들의 부리 끝에서 파도소리가 흘러나올 것이다

제 속을 다 파먹은 초승달, 겨울나무에 매달려 있다

 

――「달의 목소리」 전문

 

 

 

「달의 목소리」와 「겨울시편」은 앞서 보았던 세 편의 시와는 다른 시공간을 가지고 있다. 먼저 「달의 목소리」는 “새들은 날아가고 동굴 같은 빈집에 늙은 거미가 다녀가”신 후의 화자의 내면고백이다. 한때는 “배가 불러 있는 멧새의 집”이었으나 “동굴 같은 빈집”에 남은 화자에게 “늙은 거미”의 흔적은 “달의 허물”로 보인다. 달의 허물은 달의 소리로 살아나 “수평선에 걸린 고래의 지느러미”를 이야기하며 달의 차고 기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허물도 사그라”져 간다. 하여 화자는 “늙은 거미”의 “기억을 갉아먹고” 언젠가는 “습자지처럼 얇아진 기억”으로 안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일반화된 이미지이긴 하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달은 여성을 상징한다. 달의 차고 기우는 순환주기와 여성의 신체적(월경) 주기가 밀접한 영향관계가 있다는 것이 대표적인데, 「달의 목소리」는 “늙은 거미”(어머니)와 화자의 동일시에 의해 달의 이중주가 된다. 즉 “늙은 거미”로 표현된 어머니와 화자가 “기억의 행간을 뛰어넘”어 “돌아온 새들의” “파도소리가 흘러나올 것”이라 바란다. 그러나 그 희망은 긍정적이지 않다. “제 속을 다 파먹은 초승달”의 기욺처럼 어머니와 화자의 현 상태는 “겨울나무에 매달”린 “초승달”로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달의 목소리」는 “동굴 같은 빈집”에 남은 여성의 숙명이 헛헛한 느낌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와는 다르게 「겨울 시편」은 한 폭의 소품을 보는 듯하다. “한겨울 날아드는 철새 떼”의 비상을 “바람의 연주”로 보고 있는 화자에게 겨울은 “비바체”의 풍경이다. “마라카스 소리”를 실제 들어본 적은 없으나 “통 속의 재료를 흔들어서 음을” 낸다는 것으로 보아 한겨울 매섭게 부는 바람소리로 연상된다. 비바체가 악보에서 아주 빠르게 연주하라는 말이니 마라카스라는 악기가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겨울 시편」은 앞서 보았던 시와 비교하자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시이다. 다만 이 시에서도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은 “제 몸 위에” “새들의 그림자까지 다 받아”내는 “저수지의 물결”을 보는 시인의 태도에 의해서다.

우리는 깨어있는 동안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보여지는 것과는 다르다. 보여지는 것이 수동적이라면 보고 있다는 것은 능동적이다. 본다는 행위 자체는 그 대상의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의 은밀한 것까지 들여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들여다봄을 통해 나와 대상은 동일시되고, 동일시에 의해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듣는다는 것이 꼭 사람의 말뿐이겠는가. 자연의 은밀한 소리는 그것에 귀기울이는 이에게나 들리는 법이다. 김경성 시인이 세상의 곳곳을 찾아다니며 보고 듣고 대상을 향해 말을 건네는 것은 그들의 “말씀은 늘 깊”(「해인사 장경판」)기 때문이다. 깊은 말씀을 헤아려 듣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김경성 시인이 오랜 시간의 흔적을 더듬듯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해 시간의 여백을 더듬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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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미 /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93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선명한 금?, ?사람 사람아?, ?물의 섬?이 있고, 저서 ?박태진의 시, 그 반성의 시학?이 있다. 서울시인상, 녹색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계간 ?시와산문? 편집주간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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