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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진 란 / 혼자 노는 숲 外

by 丹野 2011. 11. 8.

 

 

 

혼자 노는 숲  / 진 란

 

봄꽃들이 앞 다투어 피고지고

그렇게 후다닥 지나갔다

항상 가던 그 자리를 다시 걸어가며

산목련 함박 웃는 모습을 보렸더니

그새 지고 없어, 아차 늦었구나 아쉬운데

어디서 하얀 종소리 뎅뎅뎅 밀려온다

금천*길 푸른 숲 사이로 때죽거리며 조랑거리는 것들

조그만 은종들이 잘랑잘랑 온몸에 불을 켜고 흔들어댄다

순간 왁자해지는 숲, 찌르르, 찌이익, 쫑쫑거리는 새소리들

금천 물길에 부서져 반짝이는 초여름의 햇살, 고요를 섞는

바람, 나를 들여다보는 초록눈들이

환생하듯 일제히 일어서는 천년 비룡처럼

혼자 노는 숲에 혼자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숲에는 많은 것들이 혼자였다

내가 없어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들

 

 

고맙다

 

 

 

 

* 창경궁 홍화문을 지나서 춘당지로 가는 숲 속에 흐르는 물길. 옥천이라고도 한다.

 

 

 

 

혼자 노는 숲 1

-우울의 포지션

 

 

삶은 되돌이표가 없는데

나는 자꾸 되돌이표처럼 되돌아오고 되돌아가고

되돌이표를 자꾸만 물위에 띄워놓는다

앙금으로 가라앉은 것들이 부유되어 올 때까지

몽니를 부리듯 그 자리에 자꾸 되돌아가서는

날아가는 것들을 부러워하고

헤엄치는 것들을 샘내고

피어나는 것들을 기뻐하고

지는 것들에 대하여 경외하면서

내 몸이 땅 위로 부유하는 것이 더 쉬울 것만 같은

그런 기다림이 홀가분해 보이는 숲, 속에서 나는 왕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보는 재미

네가 없을 때 슬쩍 훔쳐보는 관능

그래보아도 되돌아오는 것은 없는데

애써보아도 되돌아가는 것도 없는데

어쩌자고, 난이도 낮은 이 곳에 앉아 기다리느뇨

그럼에도, 난이도 없는 저 곳에 서서 서성이느뇨

 

 

 

 

길 위에서 길을 묻다 / 진 란

 

 

길 위에 서있을 때, 나 또하나의 길이었다

꽃을 바라보고 그를 불러줄 때, 나 또한 꽃이었다

바람 밖으로 가열찬 마음을 밀어낼 때에도 난 바람이었다

햇살을 받쳐주던 푸른 잎새들이 내 머리에 머물 때

그 잎새 밖으로 난 길을 따라올라 구름으로 가벼워지고

먹장 구름 기대어 무거워질 때에는

함께 둥둥거리며 뜨거운 불볕, 그 하늘에서 시렁거렸다

한낮 반짝, 한번씩 소나기로 쏟아지기도 했었다

비워지고 가벼워지고 길 위에 다시 서있으면

어김없이 꽃들은 꽃 속으로 나를 숨어있게도 하였다

치렁거리는 이 기억도 한때는 설레게 하고

구석으로 우우우 몰리던 때이른 나뭇잎들도

꽃잎과 함께 바스락거리며 길 위의 바퀴처럼 눈부시다

어쩌다 난 길이 되어 있는지, 다시 누군가의

길과 맞닿아야 하는 수레의 흔적을 굴러가는지

길 위에서 길을 꿈꾸는 길치, 그 부림의 날을 바라노니

가멸한 마음으로 길을 가고 또 오고 또 가겠구나

 

 

 

 

저녁의 시 / 진 란

 

  

꽃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발바닥과 무릎과 종아리 목과 등과 팔뚝이 쑤시고 아파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귀인을 만난 날이라 심장까지 저미지 않는다

사람을 많이 보고 들어온 날

쓸말은 하나도 없이 쓸모없이 주절거려 쓸쓸하다

사람꽃은 스치는 바람결같이도 상처를 남긴다

말없이도 웃고 속없이도 실컷 웃고

입술 끝이 귀에 걸리게 웃고 들어온 날

내 뒤를 따라들어와 끝내 울게 하는 것은

사람꽃 속에 함께 있던 바로 나, 내 그림자들이다

행여 지나치는 말로 과하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직설화법으로 말한다며 깊이 박히는 비수를 꽂지 않았을까

내가 받은 비수들을 뽑아내면서 어쩐지 나는

다음 생에는 꽃으로 태어나졌으면 싶은 것이다

 

 

꽃을 본다는 일

사람꽃을 본다는 일

꽃과 꽃 사이에서 질서를 지킨다는 일

말하자면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지 않고

잘 지켜주면서도 서로 행복해지는 일

시퍼런 갈기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무법자같은 말

향방없이 달려왔다가 달려갔다가 봄햇살처럼 뜨겁기도 하다

네가 나를 무시하면 그래 나도 너를 무시하면 된다

혼자 노는 숲의 독백이 깊어지는 시간

꽃과 사람꽃 숲의 길 잃지 않도록 귀 열어두는 일

홀로 피어나고 홀로 나부끼고 홀로 버티는 일

바람은 내 안 중심부터 소소하게 흔들리더니

꽃바람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회오리바람으로 몰아치기도 하고

내 귀가 바람의 중심이었다는, 그런 저녁이다

 

 

 

 

할미꽃 / 진 란

 

 

매화 피어나고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오고, 여름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 그 가을도 지나가고, 깊고 긴 겨울이 오고

사는 일이 매양 이렇게 계절의 꽁지를 물고 쫓아가는 일, 붉고 뜨거운 꽃잎 다 지고나면 백발만 오래도록 휘날리는 것

 

그리곤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버리는 것

 

 

 

 

사막을 건너는 이유 / 진 란


1

낙타를 타고 붉은 사막을 건너고 있어요
쏟아지는 땡볕에 온 몸이 바스러질 것 같아도
밤이면 뼛 속 저미는 추위에 살결 고운 여자가 그리워요
젖무덤에 얼굴을 묻으면 속살대는 모래의 이야기가 들려요
살아야 하는 이유, 이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간절한 명분이 생기는거에요
보세요 그 여자의 뽀얗고 둥근 둔부가 눈부셔요
고비, 너머에 신기루로 떠있어요
저기까지는 가야해요 고비 너머
대오를 물고가는 악다구니의 사내
그 바램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푸른 새벽의 낙타는
사막을 건너가는 거라구요



2

너무 오래 걸었다
이제 무릎연골이 녹아 휘도록 걷는다

황사가 길 끝에서부터 내달아
돌개처럼 온 몸에 부딪히고
말린 눈썹에 모래먼지가 눈꼽으로 뭉칠 때
갈증은 등골을 돌아 꼬리뼈로 흘렀다
길 끝까지 가야하리라
새벽빛에 얼금얼금 뼈가 시리다
이 고비를 어떻게, 지나야 하나
고비마다 천년의 닝샤(寧夏) 서하의 희미한 실크로드
말 달리는 족속은 다 어디로 갔는가
고비의 꿈 속에 가끔 묘음새 날아와
카라호토와 초록색 커다란 뱀과 칭기스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게르의 남루조차 타인의 땅을 빌어야 하는 영광의 뒤안
마두금 흐르는 초원의 몽골, 칸의 슬픔을 지저귄다

너무 오래 걸었다
사막에서는 메말라 죽는게 아니라
바등대는 갈증을 덮치는 거대한 폭우에 빠져 죽는 것이다
몬순을 건너기 위해서는 입 속에 침을 가두어야 한다
비바람과 구름의 냄새, 혹은 우기를 알아차려야 한다
졸음을 쫓으며 가는 고단한 몸뚱아리가 되어야 한다
유목의 자유로움과 떠남과 비움에 대하여
긴 밤과 지루한 낮과 하루치의 하루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아야 한다



3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파고드시길 권합니다,
모래 위를 나뒹굴며
눈발로 내리는 수만의 나비이거나
황금의 전갈들이 불개미떼가 되어
걸어온 걸음의 모든 길을 에울지라도
설마, 독이 온 몸을 스스로 번졌다고
꺼져들어간 옛 성들처럼 감추어져서는 안돼니까요


모래성을 쌓았다 흩는 차도르의 여인처럼
제 젖무덤을 키우는 바람만이 애인일 뿐인
낙타의 지극한 속눈썹 속으로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린넨으로 온 몸을 감은 미이라의 마른 몸과
부스스 날아가버린 흰 뼈들이 낮달로 떠올라
거대한 이빨로 당신의 등을 누를 때
무겁다는 비명을 질러서는 아니 되겠지요


날아가십시오
파고드십시오
녹아버리세요
이유는없어요
살아야한다는


파라독스도 없답니다
패러디도 없답니다
파라다이스도 없답니다 오직
새벽에 뜬 이국의 푸른 달과 사막나비들의 유영
자신의 몸과 당신들의 짐을 나르는 낙타의 묵묵한 침묵
사막을 배후로 사는 모든 숨막히는 삶에게
가볍게 혹은 묵직하게 그 곁을 지나는, 당신은
그림자일 뿐이니까요

 

 

 

 

새들에 대한 오해 / 진란

 

 

새들의 본적은 잘못 적혔다

새가 평생 허공을 나는 건 아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한 비감이거나

살기 위해 아슬한 허공으로 오르는 것이다

 

새들에게 모든 길이 열려진 것은 아니다

몸에 새겨진 오랜 습성으로 길을 떠나는 것

위험을 경계하고 길을 내는 사냥터일 뿐

날개 없는 생각으로 새들을 자유롭다고 하지말자

땅을 딛고 나무에 내리고 바위에 둥지를 틀고

수풀 속 은신처로 보호구역을 만드는 일

생을 위해 혹은 세끼를 위해 날마다

절실함으로 날아오르는, 새일 뿐이라는 것

 

누가 새의 본적을 하늘이라고 했는가

순명에 귀 기울이는 것들만 비로소 하늘로 간다

 

온 생을 다한 것들이 단 한번 날아

하늘로 간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 시집 『혼자 노는 숲』나무 아래서 2011년

 

 

 

 

 

 

혼자 노는 숲   진란 저 | 나무아래서

 

 

진란  시인

 

전북 전주 출생으로 공직생활을 하던 부친을 따라 전주인근 여러 학교를 전학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에서 유아교육학을 전공하였고 병설유치원에서 직장생활을 하였다. 결혼 후 종교에 대한 관심으로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교회에서 교구장과 선교사로 오랫동안 봉사를 하였다. 2002년 시 전문 계간지〈주변인과詩〉편집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다년간 편집위원과 편집장을 역임했다. 2009년 이후 월간 〈우리詩〉편집교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계간〈詩하늘〉 속의 동인 〈詩몰이〉에서 시합평회를 이끌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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