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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이은규 / 기억의 체증 外

by 丹野 2011. 11. 8.

 

 

 

기억의 체증 / 이은규

 

 

몸이라는 집에 잠시 머물다 떠날 것들

저마다 자리를 움트는 족족,

체증을 일으키고 있다

요사이 당신이라는 집에 세 들고 싶다는 나의 목소리가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서성이고

자주 식욕이라고는 덭 빈 잣죽 그릇과 마주했다

 

난감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피가 그런 걸 어떡해 라고 대답 했었다

 

사혈(瀉血), 피를 흐르게 하다

기억처럼 긴 실로 엄지손가락을 묶는다

손톱 끝의 검게 갇힌 시간들을 찌르는 바늘

맺힌 시간의 피돌기가 풀리며 건네는

피의 말이 멀리서 들릴까

귀에 머물지 않고 사라지는 그 말들의 뜻

동그랗게 말려 올라오는 검붉은 시간들

언젠가는 열망으로 맺히던 기억들의 끝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들의 전언

내 몸에 잠겨 있던 전언들이 피가 되고

그 피가 살이 되어 생의 피돌기로 살아 있다

 

검은 시간은 흘러 없어질 거라는 환한, 착각

울지 않기 위해 시간의 잇몸을 앙다물다

시시로 미치던 피의 순간이 있었다

기억의 체증에 오래 시달려야 할 것 같은 예감

바람을 숨으로 빚어내는 것도 일인 것처럼

시간이 흐른다

십년 묵은 체증이 풀린다는 말이

꿈인 것만 같은 꿈

 

2008년 불교문예 봄호

 

 

 

 

물 위에 찍힌 새의 발자국은 누가 지울까 / 이은규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눈물은 질문이다

 

저수지에 먼저 도착해 있는 적막

닫아 놓았던 귀를 열어

풍경의 모통이를 서성이는 허공을 듣는다

 

어떤 종족이 허공에 발자국을 찍을 수 있을까

 

새 한 마리 총총, 물 위를 난다

수면에 발자국으로 무슨 흔적을 남기는 것도 같은데

마침표를 찍어 완성하기 전

바람이 잔물결을 일으켜 발자국 문장을 지운다

 

문장 따위야 사람의 소관이라는 듯

새는 몇 점 눈물로 저수지의 수위(水位)를 알맞게 조절할 뿐

금세 풍경의 모통이를 돌아나간다

 

누군가

물수제비로 새겨 넣은 문장을 오래 듣는 귀가 여기 있다

그는 이제 허공에 발자국을 찍을 수 있는 종족

물수제비 문장을 기억하는 바람에게

물 위에 직힌 새의 발자국은 누가 지울까

하릴없이 묻는 날이 간다

 

그날은 적막에게 어떤 문장은 마침표 없이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배운다

 

여름 하오, 꼭 한 뼘의 높아진 저수지의 수위(水位)

 

 

 

 창을 들어라 / 이은규

   

 

  시간이 약이라는 처방을 받았다

  입술대신 처방전을 찢고,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상처를 낸 창뿐이라고 누군가 말했지

  창끝을 벼리는 눈빛으로

  더욱 날카로워질 창끝을

  꿈꾸는 밤, 시간의 리플레이 리플레이

  

 

 

 

구름의 무늬 / 이은규

  

 

  눕는 순간, 관이 되기에 알맞은 방

 

  작은 창으로 구름을 바라보다

  맺히기를 망설이는 수증기에

  기저(基底)눈물이라는 이름을 짓는다

 

  어떤 기억은

  방울로 맺히지 않을 뿐 눈을 깜박일 때마다 일상의 얇은 막 위를 흐른다, 흐를까

 

  기저의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오래 전 죽은 이의 연작에서

  당신을 이해할 것만 같은 밤이 자주 찾아와서 두렵다는 문장을 발견한다

  밑줄을 긋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오후

 

  언젠가 채운(彩雲)역을 지나며

  그 지명에서 태어난 시인에 대해 말해주던 당신, 살에서 구름 냄새가 날 것 같은 날들이었다

  같은 시인을 함께 동경하는 일은 우연이거나 우연일 뿐

 

  흘러간 구름의 당신과

  흐르고 있을 구름의 무늬를 듣기위한 질문이 길다

 

  구름아, 전생을 누구에게 걸까

 

  나는 종종 거의 실행되었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가로막힌 하늘 앞에서

  몇 점 색으로 찢겨져 나온 구름의 나선처럼

  같은 질문에 다르게 대답해야만 할 것

 

  도처에 기저눈물들이 고요하고

  왜 예감은 너무 일찍 혹은 아주 늦게 도착하는 걸까

  지나간 부음을, 구름의 무늬에게서 미리 듣는 방

 

 

 

 

내게 쓴 편지함 / 이은규

  

 

  북극성에 전파로 음악을 쏘아 올렸다는 소식이 들린다 음악이 별에 도착하는 시간은 400년,

그 동안 내게 씌여진 편지함을 열어본다 모두저장과 전체삭제 버튼 사이를 망설이고 있는 기

억들, 별빛은 우주가 보내는 신호다 내게 쓴 편지들을 임시보관함에 옮겨놓기

 

 

 

 

육첩방에 든 알약 / 이은규

  

 

  멀리서 가까이서

  꽃들이 또렷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사이

  절기 전에 꽃을 잃는 기억도 있다

 

  문 여닫는 소리만 붐비는 복도

  누군가의 늦은 귀가는

  다른 방의 조각잠을 깨운 후에야 낡은 구두를 벗고

 

  복도 끝 어둠만이 충만한 방

 

  일용할 양식을 들고

  돌아온 손이 스위치를 켠다

  벽을 떠난 못의 흔적, 텅 빈 구멍 속으로 숨어드는 어둠

 

  어젯밤 그은 건 손목이 아니다

  작은 방을 채울 수 있는 텅 빈 말을 원한다는 문장에 밑줄이었을 뿐

 

  비밀처럼 밀봉해놓은 꽃씨대신

  양식이 든 봉투를 먼저 펼치면

  후두둑 떨어지는 알약들

  해가 들지 않아 노랗게 뜬 얼굴처럼, 환한

 

  한 시인은 밤비가 속살거리는 육첩방(六疊房)에서 쉽게 씌여진 시를 썼다

 

  그는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렸지만

  오늘의 기다림은

  아침처럼 올 시대일까

  없는 햇빛 한 줄기로 기지개를 켤 꽃씨일까

 

  속살거리는 밤비 소리도 없이

  잠든, 꽃씨 옆에 누워보는 알약 한 알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 / 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오래된 근황 / 이은규

  

 

  내 지문을 기억하는 건 그의 지문이 아니다

  깍지 낀 손의 기억이 식어가므로

 

  아직 완성하지 못한 문장의 페이지가 아닐까

  노트 속 마침표 대신 찍힌 지문들

 

  급한 약속이 생각난 듯 내가 사라지면, 그는 간발의 차이로 때를 놓쳐버린 손님처럼 지난 시절

을 잠시 참회할지도 모른다

  너무 늦게 왔다는 후회는 쉽게 씌여진 문장과 같고

 

  이번 생에선 마주치지 말자

  일찍 이루어진 꿈, 서늘하겠다

 

  노트의 시간이 멈추면 내 책상 모서리는 혼자 닳아가겠지 불면의 베갯잇에 머리카락 몇 올, 검

은 외투 안쪽 주머니엔 무엇이 남아있을까

  깜박 잊고 두고 간 마음 따위

 

  그러나 근황 이어지다

  사과 주름이 깊어질 때까지 바라보는 화가와 같이

  하루에 한 줄만 쓴다, 마침표와 지문 사이

  문득 떠오른 어느 학자의 말

  세상의 모든 책보다 숨겨놓은 포도주 한 병이 더 향기롭다

  기억의 풍경이 기우는 동안

 

  안부는 없고 오늘도 조금밖에 죽지 못했다

  지문의 문장을 마치기에 아직 이른, 먼

 

 

 

 

 

이은규 시인 약력 

 

*1978년 서울에서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08년 《동아일보》 시부문에 당선. 

*현재 계간 『시와 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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