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살나무 / 박미라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무들 앞을 지나다가
가슴에 묻어둔 피붙이를 만난 듯 몇 번이고 이름 외워본다
작살나무, 작살나무, 라니!
이름까지 작살이라 못 박고 떨고 계신
그대는 누구신가?
기다림이란 저렇게
만나기만 해봐라, 이빨 으드득 깨무는 일이다
너를 박살내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다고
이승의 한평생을 꼿꼿이 서서 버티는 일이다
닿을 수 없는 거리인 줄 알면서도
끝없이 떠도느라 푸르게 질린 너의 등짝에
온몸으로 콱! 꽂히려는 것이다
당신을 기다립니다
온몸이 작살이 되었으나
그리움 쪽으로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나무가 있다
피를 찍어 피워 올린 이파리들 다 지고
청보라빛 열매 몇 주저흔처럼 남았다
표고 1300m의 계곡을 버리고 내려온 국립공원 입구에서
다시 한 생이 저문다
먼 바다 어딘가를 끝없이 떠도는 고래 한 마리
그가 작살을 피할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작살이 꽂히는 순간
평생토록 빚어온 거대한 꽃 한 송이 활짝 피워 올린다
박미라 시집 『 안개 부족 』,〈애지〉에서
소리 / 박미라
나무 책상 하나를 구했다
대패 자국이 선명하다
대패가 지나갈 때마다 풀려 나왔을 소리들이 들린다
숲에서 들었던 소리들이 아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그렇게 흘러가 는 소리들이 아니다
나무는 흘러가는 것들을 그냥 버려두고
제 몸 속 소리만 품어 키운 것이다
소리도 오래되면 곰삭아서
말갛게 걸러진 소리를 갖는다
새파란 대팻날 앞에서 조근조근 말할 수 있고
제 소리 담아 둘 옹이를 만들 줄도 안다
살점 저미는 소리를 고요하게 만들 줄도 알로
저며진 살점 속에 향기로 바꾼 소리를 쟁여 둘 줄도안다
저렇게 자세 반듯한 책상이 될 줄도 아는
오래된 소리
이제는 곰삭아 아무렇지도 않게 제 몸 내보이는
나무의 해탈을 본다
숱한 직립의 소리들 쪽으로 몸을 돌리는
목쉰 소리 하나
어떤 눈부심에 대하여 / 박미라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물끄러미 본다
한 뼘도 안되는 작은칼로 돼지를 다루는 저 사내
참외를 깎듯 껍질을 벗기고 비계를 도려낸다
망설임 없이 살점을 헤집고 뼈를 발라낸다.
평생의 업보를 덜어내고도
여전히 검붉은 속살, 환청처럼 부르르 떤다.
풀입을 쓰다듬듯 스치는 손길 아래에서
속수무책으로 놓여 있던 차가운 주검은
순식간에 신선한 상품이 된다
방금 까지 제 몸뚱이였던 것들의 새 이름을 돌아보며
세상 쪽으로 내몰린 갈비뼈가
앙상한 허공을 찌르고 있다.
버려진 넥타이처럼 굼실대는 길을 따라
저 신선한 상품은 제 살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길은, 돌아가는 것들에게 언제나 너그럽다,
세상의 모든 길은 고향에서 비롯되는 까닭이다.
고향은 제 피붙이를 아무렇게나 버려두지 않는다.
풀 한 포기 바람 한 점까지도 뼈에 새긴다.
풀잎 하나에 칼날을 지우며,
바람의 살을 발라낸다.
목숨의 집 한 채가 고요히 허물어진다.
나는, 칼 든 부처의 얼굴을 밟으며 돌아선다.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 박미라
코피를 쏟았다
검붉은 꽃잎이 수북이 쌓인다
꽃잎으로 위장한 편지
핏빛 선명한 이 흘림체의 편지를
나는 읽어낼 수 없다
행간도 없이 써 내려간 숨막히는 밀서를
천천히 짚어간다
꽃잎 뭉개지는 비릿한 냄새 온 몸에 스멀댄다
기억의 냄새만으로도
노을이 타오르고 맨드라미 자지러지는 저녁을
맨발의 내가 엎어지며 간다
이 편지의 수취인은 내가 아니다
녹슨 우체통 속에서 늙어가는
뜯지 않은 편지를
먼지 자욱한 세상의 뒤쪽으로 반송한다
젖은 꽃잎을 떼어 빈 봉투에 부친다
어딘가의 주소를 적는다
여기는 백만 년 후의 무덤이라고 쓴다
집 잃은 아이처럼 헤매는 비린내를 거두어 담는다
붉은 글자들을 손바닥으로 쓸어 담는다
받는 이의 주소를 적는다
몸이 쓴 편지를 읽을 줄 아는 마음에게 라고 쓴다
백만년 전에도 마음이었던 그대
여기, 지워진 행간을 동봉한다
풍경 / 박미라
내 안에는 술이 흐르는 개울이 있다
먹물처럼 번지는 술 향기 속에 앉아 있으면
개울가 가시나무에 걸린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너무 빨리 가는 시계이거나
두드려도 소리나지 않는 종이거나
시퍼렇게 날선 칼도 있다
심장이 주먹질을 해대거나 말거나
소리나지 않은 제 몸을 한사코 두드리는 저 종.
그것들을 안아보던 버릇대로 비틀대며 다가서면
진솔 무명 필을 자르듯 가슴을 긋는 시퍼런 칼.
넘어지는 등짝을 받아 안는 가시나무
이 나무가 너무 자라서 밖으로 가지를 뻗으면 어쩌나
우듬지 순을 잘라낸다
저 개울에는 붉은 포도주가 흐르고
칼을 위하여, 가시나무를 위하여
밥을 먹는다 술을 먹는다 나이를 먹는다
마지막으로
내 밖의 가시나무, 네 생각을 먹는다
네 생각은 언제나 너무 무거워
가시나무 뿌리를 찍는가
어디서 생나무 부러지는 소리 들린다
술이 흐르는 개울에서는
돌에도 칼에도 싹이 돋아서
자를수록 무성한 가시나무를 베고 또 베고
길, 나를 따라 가는 / 박미라
지압을 받는다
짚어가는 자리마다 우두둑 세월의 마디가 꺾이고
소리가 되지 못하는 신음 흩어진다
바람이 드나들던 길을 따라
유유히 스며드는 통증
시멘트 담장처럼 굳어버린 어깨를 타고 등짝으로 간다
죽기만 남은 칡넝쿨
온몸을 휘감는다 조여든다
한 번도 읽은 적 없는 족보를 뒤적인다
거기 적흰 내 이름이 낯설다
한때 나는
허공 속의 새였거나, 새의 길이었거나, 길 위의 먼지였거나,
내 안에 머물던 바람들 길을 잃고
구석으로 몰린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물줄기를 찾는다
잠시 구름이 머물렀던 자리에
찢어진 족보가 뒹군다
저 칡넝쿨, 내 몸의 모든 물기를 마실 거라고 적혀 있다
깔깔깔 웃음 터진다 얼마나 좋아 물기 없는 내 몸.
다시는 눈물 흐르지 않겠네
어떤 칼날에 베어도 피 흐르지 않겠네
이대로 바스락바스락 말라서 문득 한 줌의 먼지가 되겠제
저 칡넝쿨
내가 돌아갈 길이었다
맨드라미꽃에 대하여 / 박미라
맨드라미 마른 꽃대를 건드리며
바람이 분다
푸른 정맥류의 흔적이
물증처럼 굳어 있는 그녀의 종아리
살아, 먼 곳을 그리워 한 죄
끊어진 강줄기처럼 토막 나있다
기억은 병을 깊어가게 할 뿐이라고
온 몸 잡아 흔드는 바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우수수 살비듬 일어난다
자신의 죽음을 깃발처럼 꽂아둔
저 끔찍한 기다림을 위하여
낡은 편지봉투를 흔들며 묵은 꽃씨를 찾는다
시간에 뜯겨 깡마른 손바닥 위로
주르르 쏟아지는 오랜 불면의 기록들
깊은 계곡을 건너 듯
손금을 따라 흘러내린다
천 번의 바람만 번의 햇살이 스쳐간 흔적을
낱낱이 기억하며 반짝이는
꽃의 눈동자들
잠깐, 지난 여름을 추억하는 사이 한 생애가 흘러
지워진 것들 위로 태양이 돌고
싹이 나고, 잎이 나고,
핏빛 주단 위에 촘촘히 적어 가는
또 한 번의 생애를
오늘을 꽃이라고 읽는다
사랑한다 / 박미라
무덤을 연다
줄기뿐인 식물처럼 가지런한 뼈마디
백 년만의 햇살을 알아보는 妖氣로운 이빨
그녀의 왼쪽에 축축하게 발효된 빈 棺이 있다
한사람의 이름이 머물던 거처
그녀가 이승에 다녀갔다는 물증이다
더 오래 기다리지 못한 까닭에 대하여
지금은 없는 자의 거처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변명한 백 년이었다
무너져 내린 턱뼈가 그걸 증명한다
정요하게 펼쳐둔 줄기는
빈 棺의 임자를 위한 비밀 지도이다
돈을 새김이 선명한 암호문이다
한 번도 고쳐 쓴 적 없지만
백년을 하루같이 읽또 읽어
더러는 지워지고 더러는 삭아내려
깊이를 감춘 강물처럼 고요하다
문득, 반짝이는 무엇을 본 듯하다
혹 그녀의 눈물은 아닐는지 생각다가
혼자 웃는다
破墓 의 끝자리
꽃 필 날짜 아득한 각시붓꽃 새싹이 흔들리고 있다
病, 혹은 기억에게 / 박미라
오래된 사원이다
받들어 모신 발걸음마다 무겁고 뜨거워서
모서리 둥글게 닳아버린 돌계단
휘청거리는 묵언정진을 마음으로 짚으며 올라간다
온 몸으로 버티는 단단한 기억들.
녹슨 풍경 소리를 빗겨간 바람이
비늘 벗겨진 목어의 뱃속에 알을 슬고,
실핏줄 선명한 나무기둥 틈새에 푸른 것들이 보인다
곳곳에 적힌 사원의 화두를 읽는 동안
천천히 퇴색하는 단청.
낙엽을 치우듯 굳은 살점들을 헤집고
바람 드나드는 직립의 돌계단을 허문다
불타버린 사원의 주춧돌처럼
적막한 등뼈 위로 바람 분다
반송할 주소가 없는 기억들이 통증의 이빨을 내보인다
이빨을 뽑아낸 자리에 새로운 주소록을 적는다
저장된 주소의 목록을 지우고 기억의 코드를 뽑는다
무너진 계단, 방목된 등뼈들,
지워진 길은 어디로 스며들어
또 다른 화엄 세상을 꿈꾸고 있는가
천년 전의 별에서부터 함께였던
익숙한 통증에게서
마른 풀 냄새가 풍긴다
몸 밖의 불 / 박미라
낯선 풍경이 새겨진 라이터를 본다
자신의 여정을 증명하는 때 절은 몸뚱이
헐거워진 뚜껑을 열면
깊은 어둠 속에 잠자던 얼굴처럼
화들짝 놀라며 불꽃이 솟구친다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몸 밖의 불.
이미 제 것이 아닌 그것을 다시 거두어들이며
저 혼자 불인 채로 견뎌내는 일
익숙해진 감옥 속에서 이빨 사려 물고
스타트라인의 육상 선수처럼 스스로의 폭발성에 놀라
터질 듯, 터질 듯 출렁거리며
공연히 한 곳만 노려보는 불의 집
억세게 움켜쥐던 손바닥의 습기를 지나
입숙 꽉 다문 기억처럼
태울 수 없는 것들을 지나
달구어 두드리면 제 몸을 버렸다가도
식으면 다시 또 다른 모습의 쇳덩이일 뿐인
변하지 않는 본질을 지나
구겨지고 버려진 목숨들을 황홀한 불꽃으로 돌려보낸
쓰레기장에서처럼
던져지는 것에 익숙한 것은
꽤 오래 세상을 떠돈 다음의 습관이다
거품처럼 잦아든 몸 밖의 불을 안고
작은 파도가 일렁인다
모르는 사이처럼,
헐거워진 뚜껑을 힘주어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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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몇몇의 시인이 부론에 놀러왔다는 전갈을 받고 잠시
얼굴인사 드리러 갔었다. 그 자리에 박미라 시인이 있었다.
술한잔 마시라는 것,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겨우 뿌리치고
두어시간 얘기를 나누다가 선약 때문에 돌아왔다.
여름 계곡물에 첨벙첨벙 놀고 있는 모습들이 아이들 같았다.
그렇게 두어 달 후, 박미라 시인의 시집을 다시 펴 보았다.
무엇인가 작심한 듯 날카로운 생각이 온 몸에 퍼져 있다는 것을
시 속에서 느꼈다.
「작살나무 」를 읽으면서 산속의 작살나무가 제 몸을 단단히
길들여 바닷속의 고래를 겨누겠다는 마음을 누가 알고 있겠는가
싶었다. 그렇다. 아무리 깊게 숨어 사는 작살나무라 하여 망망한
바닷속 고래의 경거망동한 마음을 그대로 두지는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세상 사는 일이 누구에게나 적의를 품게 되어 있다.
성인군자도 가난한 백성의 입을 봉하지는 못한다.
세상에서 한입 한다는 사람, 다 작살나무 같은 사람이 노려보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박미라 시인의 작살나무를
읽으며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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