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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나호열시인 수상작품

2007년 세계한민족문학상 대상 / 시인 나호열

by 丹野 2011. 9. 29.

 

*2007년 세계한민족문학상 대상 : 시인 나호열

 

 문단 경력 22년을 맞는 나호열 시인은 보름달, 정선강물, 밤길, 너에게 묻는다, 검, 문,

백발의 꿈, 청풍에 가다, 춤, 낙엽에게 이상의 10편의 시로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경희대학교 철학과 석 박사 과정을 마친 나호열 시인의 시는 철학을 바탕한 니힐리즘의 세계로 독자들의 인식을

인도하지만 단순한 허무주의 이상을 보여주는 힘이 있다.

부정을 부정하여 긍정을 이루는 이치랄까 그의 작품 보름달에서 보면 침묵의 완고함을 백 만 마디의 말보다 높이

승화시켜 놓는 범속하지 않는 시인의 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2007년 세계한민족문학상 대상 수상작품  10편

 

 Moon Indigo                                                                              - by Blake Desaulniers


 

보름달 / 나호열

 

보름달이 가고 있어요
둥글어서
동그라미가 굴러가는 듯
한 줄기 직선이 남아 있어요
물 한 방울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너고
울울한 숲의 나뭇가지들을 흔들지 않아
새들은 깊은 잠을 깨지 않아요
빛나면서도 뜨겁지 않아요
천 만개의 국화 송이가 일시에 피어오르면
그 향기가 저렇게 빛날까요
천 만개의 촛불을 한꺼번에 밝히면
깊은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리는
이제 막 태어난 낱말 하나를
배울 수 있을까요 읽어낼 수 있을까요
보름달이 가고 있어요
둥글어서 동그라미가 굴러가는 듯
말없음표가 뚝뚝 세상으로
떨어지고 있어요
입을 다물고 침묵을 배우고 있어요

 

                                                                                                                                            정선 아우라지   사진 / p r a h a

 

 

정선 강물 / 나호열

 

여량 사람 구절리 사람들은 다리를 건넌다.
사나흘 묵다보면 줄행랑 칠
전설이 없는 도시 사람들 강을 건너고
사공 황씨는 오늘도 아우라지 처녀와
뗏목 이야기로 삯을 받는다
더도 없고 덜도 없는 밍밍한 이야기에
하루를 또 보탠다
전설 속으로 사라지듯 나루에 빈 배가 남을 때
그 때 정선 강물은 말문을 연다
어미 소가 제 새끼 등을 천천히 핥아 주듯이
강가 주막이 강물에 몸을 던지고
둑 위의 포플러 나무들이
낮은 앞 산 그 뒤의 높은 산들이
윤회를 믿는 인디아 그 땅 사람들처럼
차례로 강물로 뛰어든다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어미의 따스한 손길처럼
그림자들은 흘러가는 강물에게
고요하고 적막한 고향의 이야기를 심어주는 것이다
멀리 떠나온 자에게 그리움이 없을 리가 없다
정선 강물의 이야기는
먼 바다에 가서야 들을 수 있다

 

 

  
 

 

밤길 / 나호열

 

 

화적떼처럼 달려드는 바람을 휘휘 저으며 간다

그의 느린 발걸음은 쫓겨가는 자의

밤을 도와 줄행랑을 치는

비겁한 사내의 초조와는 거리가 멀다

우두커니 서서 되새김질 하는

소의 눈망울을 닮은 신호등 앞에서도 공손하다

한 번 껌벅일 때 마다 점멸하는 몇 번의 신호를 흘려보내는 것이

마치 소의 생 속으로 들어갈 듯 하다

밤이 깊을수록 거세지는 바람에

살을 내주고 이윽고 그림자만이 남은 듯하다

멈춤과 결코 뒷걸음질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소의 긴 한숨이 그림자를 포도 鋪道 위로 날려 버리자

그는 사라지고 뭉툭해진 열쇠 하나가 스키드 마크 위에 얹혀졌다

무언가 급정거한 불온한 생 위로 마치 새 싹처럼 돋아 오른 열쇠

그의 천천한 발걸음은 아마도 사라져버린 방을 찾기 위해서일까

온통 굳은 자물쇠로 채워진 세상의 어딘가에

사라져버린 방은 이미 남의 수중에 들어갔던 것인데

그는 그렇게 밤길을 갔다

가장 행복한 얼굴로 바람의 매를 맞으며

웃으며 물음표를 닮은 열쇠를 지상에 남겨두고

새벽을 향해 걸어갔다

     

     

사진 / p r a h a

 

 

너에게 묻는다 / 나호열


    유목의 하늘에 양떼를 풀어 놓았다
    그리움을 갖기 전의 일이다
    낮게 깔려있는 하늘은 늘 푸르렀고
    상형문자의 구름은 천천히 자막으로 흘러갔던 것인데
    하늘이 펄럭일 때 마다
    먼 곳에서 들리는 양떼 울음을 들었던 것이다
    목동이었던 내가 먼저 집을 잃었던 모양이다
    잃었거나 잊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도망쳤던 그 집
    아마도 그 집은 소금이 가득했던 창고
    아버지는 비와 눈을 가두어 놓고 바다를 꿈꾸었던 것인지
    밤새 매질하는 소리 들리고
    눈과 귀 그리고 입을 봉한 소금처럼 우리는 태어났던 것
    유목을 배우고 구름의 상형문자를 배웠으니
    하늘이 바다이고 바다가 하늘인 것 또한 알 수 없는 일
    내가 잠깐 이 생의 언덕 위에 올라 발 밑을 내려다 볼 때
    울컥 목젖이 떨리면서
    깊게 소금에 절여 있던 낱말을 뱉어낼 수 있었던 것
    여기에 없는,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았으나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고 믿어버린 약속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강열한 햇볕 속에 태어나 그 햇볕으로 사라져가는
    소금 등짐을 지고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나

         

     

     

    사진 / p r a h a

     

     

    / 나호열

     

     
    미간 사이로 이제는 지워지지 않는 주름살이 깊이 패여 있다
    웃어도 지워지지 않고 눈을 감아도 흐려지지 않는다
    메리 고 라운드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탄
    웃을 때마다 꽃무더기 무너져 내리던 주인공
    아프지 않게 시간이 할퀴고 간 흔적이다
    그 검을 찾아라, 내어 놓아라!
    몽환 속을 들락거리는 혀가 낼름 검을 받아먹는다
    검이 뭔지 도가 뭔지도 모르는 혀가
    단물을 빨아 먹고 난 뒤 이빨들은 혀를 씹기 시작했다
    언제 이 검을, 이 도를 뱉어내야 할까
    미간 사이의 주름살이 생각 속으로 깊이 파들어 가기 시작했다.

     

     

     

     

     사진 /  p r a ha

     


    / 나호열

     

     

    그가 문을 닫고 떠날 때마다 나의 생애는 오래 흔들거렸다

    위태롭게 걸려 있던 별들이 우수수 떨어지기도 했고

    정전의 암흑이 발자국들을 엉키게도 했다

    세차게 닫히는 쿵하는 소리가 눈물을 한웅큼씩 여물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

    두렵고도 즐거운 일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역방향으로 빠르게 사라졌지만

    문은 늘 우리에게 약속의 열쇠 같은 것 이었다

    안에서는 잠겨지지 않는 그 문은 오직 그가 열고 닫을 수 있었던 것

     문이 열릴 때 잠깐씩 햇살이 비치고 바람이 들어오고

    그 햇살과 바람으로 나는 사막을 키웠다

    문이 닫힐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두통이 역겨웠지만

    나는 그가 왜 그렇게 문을 세게 닫는 지

    그를 만나기 전부터 알고 있다

    내가 키우고 있는 사막이 더 커지지 않도록

    햇살과 바람이 틈입할 수 없도록 환영만을 남겨두는 것

    언젠가 그는 나에게 길을 낼 것이다

    거룩한 순례자의 발자국을 화인처럼 내 가슴에 새길 것이다

    오늘도 그는 세게 문을 닫고 떠났다

    지상에서 살다 간 사람들은 별이 되었다는데

     하늘엔 장막 같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적성산성에서 /p r a h a

         

         

         

        청풍에 가다 / 나호열

         

        불현듯 앞을 막아서는 안개 때문이라고

        뒤늦은 발걸음 뉘우칠 수는 없겠네

        한 계절 꽃 피우던 얼굴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까맣게 타버린 씨앗

        눈물 대신 발밑에 뿌려두었으니

        함부로 밟아서도 성급히 손으로 거두어도 되지 않을 일

        청풍은 잠시도 발길 멈추지 못하게 하였으나

        나는 보고 말았네

        옥순봉 호수에 제 몸을 던졌으나

        수심 깊어 기암절벽을 물 위에 그려 놓으니

        또 푸른 하늘이 그림자를 비추어 주네

        선경이라 한들 하루 이틀 삼일이면 시들하다는

        나그네의 말씀을 한 귀로 흘리려 하네

        오래 바라볼수록 내 몸에 스며들어

        없는 듯 살아 숨쉬는 그대여

         

         

          

        사진 / p r a h a

         

         

         / 나호열

         

         

        절은 사라지고
        홀로 남은 강가의 탑처럼
        조금씩 허물어지는 육신의 틈이라고 
        나는 배웠다

        직립을 꿈꾸면서도
        햇살에 휘이고 
        바람에 길들여지는 나무들의 
        허공을 부여잡은 한 순간
        정지의 날숨이 
        춤의 꿈이라고 나는 배웠다

        그러나 또한 
        동천 언 하늘에 길을 내는
        새들의 날갯짓과
        제 할 일을 마치고 땅으로 귀환하는
        낙엽들의 가벼운 몸놀림이 
        아름다운 춤이라고 나는 배웠다

        천 만 근의 고요 속에서 
        스스로 칼 금을 긋고 내미는
        새 순과 꽃들의 아픔을 보았는가
        바위에 온몸을 부딪고 
        천 만 개의 꽃잎으로 산화하는 
        파도의 가슴을 보았는가
        벅차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용암처럼
        끝내 바위가 되기 위하여 
        기꺼이 온 몸을 내던지는

        멈춤
        그 찰라의 틈을 보여주기 위하여
        바람을 불러 모으는
        혼신의 집중
        보이면서 사라지는 
        사라지기 위하여 허공에 돋을새김을 하는
        묵언의 釘 소리
        들판에 내려앉는
        노을이 뜨겁다

         

         

         사진 / p  r  a  h  a

         

         

         

        낙엽에게 / 나호열

        나무의 눈물이라고 너를 부른 적이 있다
        햇빛과 맑은 공기를 버무리던 손
        헤아릴 수 없이 벅찼던 들숨과 날숨의
        부질없는 기억의
        쭈글거리는 허파
        창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
        더 이상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하였다
        슬픔이 감추고 있는 바람, 상처, 꽃의 전생
        그 무수한 흔들림으로부터 떨어지는,
        허공을 밟고 내려오는 발자국은
        세상의 어느 곳에선가 발효되어 갈 것이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에게 슬픔은 없다, 오직
        고통과 회한으로 얼룩지는 시간이 외로울 뿐
        슬픔은 술이 되기 위하여 오래 직립한다
        뿌리부터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취기가 없다면
        나무는 온전히 이 세상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너는 나무의 눈물이 아니다
        너는 우화를 꿈꾼 나무의 슬픈 날개이다

         

         

        사진 / p r a h a

         

         

         

        백발의 꿈 / 나호열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는 꿈을 꾼
        그 젊은 날은 얼마나 서러웠는지
        지금은 어느새 백발이 되어가는 내가
        서러웠던 그 젊은 날을 꿈꾸고 있는 중

        얼마나 하늘에 가까이 닿아야
        만년설을 머리에 인 설산이 될 수 있을까
        불화살 같은 햇빛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무런 말씀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의 책갈피를
        차곡차곡 쌓아올릴 수 있을까

        덧없는 꿈이지만
        백발의 꿈이 차갑게 서러운 것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누군가의 설산이 되는 꿈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
        눈발 더욱 거세지는 내 삶의 산정에
        깃발 대신 씨앗과도 같은
        사랑의 발자국을 깊게 심어주는
        그 사람이 오기 전에는

         

         

         

         


         

        O del mio dolce ardor (오 나의 감미로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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