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세계한민족문학상 대상 : 시인 나호열
문단 경력 22년을 맞는 나호열 시인은 보름달, 정선강물, 밤길, 너에게 묻는다, 검, 문,
백발의 꿈, 청풍에 가다, 춤, 낙엽에게 이상의 10편의 시로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경희대학교 철학과 석 박사 과정을 마친 나호열 시인의 시는 철학을 바탕한 니힐리즘의 세계로 독자들의 인식을
인도하지만 단순한 허무주의 이상을 보여주는 힘이 있다.
부정을 부정하여 긍정을 이루는 이치랄까 그의 작품 보름달에서 보면 침묵의 완고함을 백 만 마디의 말보다 높이
승화시켜 놓는 범속하지 않는 시인의 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2007년 세계한민족문학상 대상 수상작품 10편
Moon Indigo - by Blake Desaulniers
보름달 / 나호열
보름달이 가고 있어요
둥글어서
동그라미가 굴러가는 듯
한 줄기 직선이 남아 있어요
물 한 방울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너고
울울한 숲의 나뭇가지들을 흔들지 않아
새들은 깊은 잠을 깨지 않아요
빛나면서도 뜨겁지 않아요
천 만개의 국화 송이가 일시에 피어오르면
그 향기가 저렇게 빛날까요
천 만개의 촛불을 한꺼번에 밝히면
깊은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리는
이제 막 태어난 낱말 하나를
배울 수 있을까요 읽어낼 수 있을까요
보름달이 가고 있어요
둥글어서 동그라미가 굴러가는 듯
말없음표가 뚝뚝 세상으로
떨어지고 있어요
입을 다물고 침묵을 배우고 있어요
정선 아우라지 사진 / p r a h a 정선 강물 / 나호열 여량 사람 구절리 사람들은 다리를 건넌다.
사나흘 묵다보면 줄행랑 칠
전설이 없는 도시 사람들 강을 건너고
사공 황씨는 오늘도 아우라지 처녀와
뗏목 이야기로 삯을 받는다
더도 없고 덜도 없는 밍밍한 이야기에
하루를 또 보탠다
전설 속으로 사라지듯 나루에 빈 배가 남을 때
그 때 정선 강물은 말문을 연다
어미 소가 제 새끼 등을 천천히 핥아 주듯이
강가 주막이 강물에 몸을 던지고
둑 위의 포플러 나무들이
낮은 앞 산 그 뒤의 높은 산들이
윤회를 믿는 인디아 그 땅 사람들처럼
차례로 강물로 뛰어든다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어미의 따스한 손길처럼
그림자들은 흘러가는 강물에게
고요하고 적막한 고향의 이야기를 심어주는 것이다
멀리 떠나온 자에게 그리움이 없을 리가 없다
정선 강물의 이야기는
먼 바다에 가서야 들을 수 있다
by Yuri Bonder
밤길 / 나호열
화적떼처럼 달려드는 바람을 휘휘 저으며 간다
그의 느린 발걸음은 쫓겨가는 자의
밤을 도와 줄행랑을 치는
비겁한 사내의 초조와는 거리가 멀다
우두커니 서서 되새김질 하는
소의 눈망울을 닮은 신호등 앞에서도 공손하다
한 번 껌벅일 때 마다 점멸하는 몇 번의 신호를 흘려보내는 것이
마치 소의 생 속으로 들어갈 듯 하다
밤이 깊을수록 거세지는 바람에
살을 내주고 이윽고 그림자만이 남은 듯하다
멈춤과 결코 뒷걸음질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소의 긴 한숨이 그림자를 포도 鋪道 위로 날려 버리자
그는 사라지고 뭉툭해진 열쇠 하나가 스키드 마크 위에 얹혀졌다
무언가 급정거한 불온한 생 위로 마치 새 싹처럼 돋아 오른 열쇠
그의 천천한 발걸음은 아마도 사라져버린 방을 찾기 위해서일까
온통 굳은 자물쇠로 채워진 세상의 어딘가에
사라져버린 방은 이미 남의 수중에 들어갔던 것인데
그는 그렇게 밤길을 갔다
가장 행복한 얼굴로 바람의 매를 맞으며
웃으며 물음표를 닮은 열쇠를 지상에 남겨두고
새벽을 향해 걸어갔다
사진 / p r a h a
너에게 묻는다 / 나호열
유목의 하늘에 양떼를 풀어 놓았다
그리움을 갖기 전의 일이다
낮게 깔려있는 하늘은 늘 푸르렀고
상형문자의 구름은 천천히 자막으로 흘러갔던 것인데
하늘이 펄럭일 때 마다
먼 곳에서 들리는 양떼 울음을 들었던 것이다
목동이었던 내가 먼저 집을 잃었던 모양이다
잃었거나 잊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도망쳤던 그 집
아마도 그 집은 소금이 가득했던 창고
아버지는 비와 눈을 가두어 놓고 바다를 꿈꾸었던 것인지
밤새 매질하는 소리 들리고
눈과 귀 그리고 입을 봉한 소금처럼 우리는 태어났던 것
유목을 배우고 구름의 상형문자를 배웠으니
하늘이 바다이고 바다가 하늘인 것 또한 알 수 없는 일
내가 잠깐 이 생의 언덕 위에 올라 발 밑을 내려다 볼 때
울컥 목젖이 떨리면서
깊게 소금에 절여 있던 낱말을 뱉어낼 수 있었던 것
여기에 없는,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았으나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고 믿어버린 약속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강열한 햇볕 속에 태어나 그 햇볕으로 사라져가는
소금 등짐을 지고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나
사진 / p r a h a
검 / 나호열
사진 / p r a 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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