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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나호열시인 수상작품

1991년『시와시학』중견시인상 수상작품 / 나호열

by 丹野 2007. 9. 28.

 

 

 

[나호열 시인]   1991년『시와시학』중견시인상 수상작품

 

 

 

 

 

어떤 참회록(1916-)

 

 

어둠으로 켜켜이 쌓여있는
한 생애를 읽는다
으스러지도록 껴 안았던
상대는 무엇이었을까
작은 물방울들이 으깨어져
안개로 흐느적거리는 
실존의 외길을
날마다 조금씩 읽으며
조금씩 더 잊어버리며
한 장씩 넘기면
어둠 탓으로 돌리며 짚어 내려가던
아버지의 행방이 묘연하다
낡고 얇아져 바람 불 때 마다
가슴에서 산란히 서걱거리는
한 권의 비망록
세월 탓이겠지 듬벙듬벙
넘겨가던 마지막 갈피를 넘기고
나는 문득 소리죽여 눈물을 쏟는다
아무 것도 없었구나
평생동안 이룬 일 없다고
다 소용 없다고
한 줄도 기록되지 않은
참회의 무게
눈물 속으로 언뜻
휘적휘적 걸어가는
아버지가 보이네

 

 

 집, 그리고 상계동

 

 

 

마음을 그냥 비우라 하셨지만
그냥 버릴 수눈 없었습니다
귀하고 아까웠던 것
다 잃어버린 후에
정녕 곡식 거두어들인 빈 들에
새롭게 돋아오르는
이름 없는 하루살이 풀꽃이
나의 몸인줄 알겠습니다
집인줄 알겠습니다

 

 

 

 

 상계동. 1

 

낯선 사람들이 낯설게 살고 있다
날이 갈수록 낯선 사람들은
낯 선 사람들 사이에서 편안하게 묻히는 법을 배우고
낯설어져야 잠이 잘오는 병에 걸린다
앞집과 뒷집의, 일층과 이층의
벽들이
동아건설 창동공장에서
실려 나온다 끊임없이
나는 어디에든
따뜻한 알을 낳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벽과 벽 사이에
무관심 사이에
생전 보지 못한 이상한 동물을
숨겨두고 싶다

 

 

 

 

 

 

상계동. 16

 

 

공단에서 흘러나온 매연이
수면제처럼 뿌려지는 상계동의 밤
한결같이 남쪽을 향하여 가슴을 연
아파트의 불빛이
용이 되어 승천하고 있다
하늘에도 빽빽한 별들의 집,
그래도 텃밭같은 나의 희망은
아직 넉넉하다
꽃이 되든지
나무를 심든지
아니면 좀 더 기다려야 할
씨앗을 뿌리듯이
나의 밥은 희망이며
희망은 나의 목숨,
난파당한 유령의 섬으로 흘러가고
흘러오는 도시의 밤
유리를 잔뜩 먹여 얼레를 풀어
나는 가장 순한
양들을 방목한다
사랑이며 믿음
심지어 고통까지도
스스로 자라 열매를 맺어
왕관을 쓰듯 황홀한 별자리가 된다
바람은 하염없이 구름을 밀어가고
구름은 깨끗이,깨끗이 닦아내는 하늘
파라슈트를 타고 하강하는
단내나는 꽃빛,
평화와 안도
나는 가슴 속에 가득한 그것들을
다시 하늘 위호 헌화하듯 날려 보낸다



 

 상계동. 20

 

 

 

담벼락에 기대어 귀뚜라미로 실컷 울었으면 좋겠어요
애들이 많으면 방 구하기도 수월치 않지요
시끄럽고 더군다나 우리 집엔 고삼짜리가 있거든요
단촐한 세입자를 원해요
중첩되는 두 얼굴이 적막하게 퍼져간다
모래들이 모여서 사막을 이루어
불모지로 변해가는 세상의 한가운데
독같은 얼굴을 가리려고 사람들은 가면을 쓴다
여우탈, 사자탈, 패랭이탈, 양반탈 뒤집어 쓰고
내가 네가 아님을 열심히 증명하려고
비싼 값으로 면죄부를 더 많이 차지하려고
여기저기에 가면무도회는 끊이지 않는다

 

 

 

 

 

상계동. 24

 

 

 

옆집 아무개씨가 이사를 간다
삼 년 동안 내왕이 없었으므로 그가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 지 알리가 없다
단지 트럭에 실리는 장농을 보며
천 만원 짜리 통영자개장이라는 수근거림에
그가 부자였다는 사실과 그런 부자와 나란히
삼 년을 살았다는데 신기함을 느낀다
불편함 없이, 기죽는 일 없이
그가 고기국을 먹을 때 김치찌게를 먹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얼마나 편안했던가
잠시간이었다 하더라도 얼마나 평등했던가
우리의 죽음이 그러하듯
홀로 먹이를 찾아 허공을 배회하는 독수리처럼
평생을 이고,지고 다닐 짐들이
작별의 아쉬움도 없이 떠나가는
손 없는 날의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