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고딕 숲
[중앙일보] 입력 2011.08.04 00:09 / 수정 2011.08.04 00:09전나무 Abies holophylla Maxim.
전나무 기둥이 떠받치는 숲 속
검은 고딕 나무가 자라서
연등천장의 내면이다
고딕 숲에서 내 목울대는 하늘거리는 풀처럼
검은색 너머 기웃기웃,
수사복 사내들의 뼈가
나무의 뼈라면
내 이야기의 시작은 주인공의 죽음/자살이다
(……)
어떤 관습들에서 열거되는 투니카와 쿠쿨라의
수도복 입은 발자국이 모여들겠다
오래된 불빛이 鬱鬱 침엽수를 밝히려 한다면
내 묵언은 천천히 닫아야 할 입이 너무 많다
절집에 드는 숲길에 울울창창 들어선 전나무에서 기독사원의 건축 양식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 천장에서 연등을 떠올리는 건 더 그렇다. 평창 오대산에서도 부안 능가산에서도 절집에 들려면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는 전나무 숲을 지나야 한다. 누구라도 이 숲에 들면 하늘 높이 뻗은 전나무의 기개 앞에 수도승이 된다. 저잣거리에서 울긋불긋했던 의복도 하늘을 가린 전나무 그림자에 덮여 투니카 양식의 검은 수도복으로 바뀐다. 자박자박 길을 걸으면 세상의 모든 언어들이 우주의 침묵에 닿는다. 전나무 숲의 견고한 침묵은 죽음을 닮았지만, 우주의 온 생명을 시작하는 첫 발짝이다.
<고규홍·나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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