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능소화
[중앙일보] 입력 2011.08.06 00:11 / 수정 2011.08.06 00:11능소화 Campsis grandifolia K.Schum.
능소화 - 문성해(1963~ )
담장이건 죽은 나무건 가리지 않고 머리를 올리고야 만다
목 아래가 다 잘린 돼지 머리도 처음에는 저처럼 힘줄이 너덜거렸을 터
한 번도 아랫도리로 서본 적 없는 꽃들이
죽은 측백나무에 덩그렇게 머리가 얹혀 웃고 있다
머나먼 남쪽 어느 유곽에서도
어젯밤 그 집의 반신불수 딸이 머리를 얹었다고 한다
그 집의 주인 여자는 측백나무처럼 일없이 늙어가던 사내 등에
패물이며 논마지기며 울긋불긋한 딸의 옷가지들을 바리바리 짊어 보냈다고 한다
어디 가서도 잘 살아야 한다
(……)
홀로 서지 못하는 능소화는 담장이든 죽은 나무든 가리지 않고 타고 오른다. 덩굴식물이라 부른다. 곁에 서 있던 것들이 힘에 겨워 지친 듯 보인다. 그러나 세월의 더께가 넌출 위에 내려앉으면 오래 전부터 하나였던 듯 미소 띄운다. 꽃잎 안을 들여다 볼라치면 목젖 드러내고 깔깔거리는 처녀 아이의 해맑은 웃음이 떠오른다. 머리를 올리고 즐거워하는 표정이 영락없다. 한여름이면 어김없이 볼우물을 패고 환히 웃음 짓는 능소화의 붉은 빛은 여름 햇살만큼 뜨겁다. 늙고 지쳐도 사랑은 언제나 붉은 빛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사랑 빛이다. <고규홍·나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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