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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나호열 / 내 마음의 벽화

by 丹野 2011. 7. 17.

 

 

내 마음의 壁畵 · 1 / 나호열

 

 

 

내 마음의 벽화는
말하자면
거실 한 쪽 벽에
못 박혀 있는
동양화 액자와도 같은 것이다
있어도 없는 듯 하다가
가끔 눈길이 가면
푸른 하늘
마을로 가는 오솔길
밭 가는 농부와 소
텅 빈 여백과
먹빛만으로
한걸음씩 다가오듯이
내가 어디 있나
길 잃고 두리번거릴 때
여기있어 하면서
내 마음에 못 박혀
당신이 손짓하는 것이다

 

 

 ―시집『그리움의 저수지에는 물길이 없다』포엠토피아

 

 

 

 

 

 

내 마음의 벽화. 2 / 나호열

             
글을 모르는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말 인줄 아는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
말이 바람인줄 아는 사람이 그림을 그린다
나는 글을 안다, 그림이 말이 아닌 줄 나는 안다
말이 바람이 아닌 줄 나는 안다
그러므로 그 벽화는 내가 그린 것이 아니다
내게 말을 걸고
쪽지를 건네주고
바람에 펄럭이는 그 벽화는
어두워져야 보이고
비바람 몰아쳐야 보이고
내가 혼자 먼 길 갈 때 보인다
그러므로 그 벽화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해 줄 수 없다
그 벽화가 기쁘다
그 벽화가 슬프다
그 벽화가 까르르 웃고
그 벽화가 젖은 울음을 운다
벽화의 주인은 
벽이다
나를 감싸주는 
그 벽!

 

 

 

―시집『그리움의 저수지에는 물길이 없다』포엠토피아



 

 

내 마음의 벽화. 3 / 나호열


얼만큼의 깊이로
마음에 못을 박아야할 지 모른다
그림 하나를 걸어두려고
못질은 계속되지만
완강하게 밀쳐버리는 그 무엇이 있어
튕겨나오는 작은 불꽃들
마음 아프게 못질을 하지 않으면
걸 수 없는 그림이 있어
미소짓는 그 눈빛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나는, 알아 나는 알아
멀찌감치 빗겨 서서 바라보는 그림이 있어
무엇이 그를 미소짓게 하였는가
무엇이 그를 그윽한 눈빛으로 가득 차게 하였는가

그림을 걸고 싶다
바다를 향하여
너른 초원을 향하여
그러기 위해서 나의 마음은
전생이 나무였을 벽이 되어야 한다. 

 

 

 ―시집『그리움의 저수지에는 물길이 없다』포엠토피아


 

 

 

 

내 마음의 벽화. 4 / 나호열

 

 

 

이상하다

손에 온기가 남아 있다

누군가가 잡아주었던 향기

이상하다

모래 부서져내리는 가슴에

밤 길잡이 별이 달려 있다

이상하다

오래 전에 떠나왔던 나의 방에

누군가가 다녀갔다

선지자들은 왜 벽에 대고 기도를 했을까

잡을 수 없는 이데아는 등 뒤의 햇살

저 너머에 있고

벽에 너울대는 제 그림자를 그토록 지우려 애썼을까

나는 벽에다 인사를 한다

안녕, 나는 오랫동안 슬픔에 대해 이야기 했다

안녕, 만난 적이 없는데 왜 수없이 작별해야 하는가

안녕, 잡을 수 없는 벽이 손을 내민다

안녕, 나는 벽에 등을 기댄다

벽 속에서 길이 열리고 다시 눈이 내린다

벽 속에 문이 있다

안녕, 나는 벽 앞에 무릎을 꿇는다

가장 낮은 자세로 두 손을 올린다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시집『그리움의 저수지에는 물길이 없다』포엠토피아

 

 

 

 

 

내 마음의 벽화. 5 / 나호열


좋은 그림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산을 가득 품은 적막이 
그 모습 드러내지 않듯이 
좋은 그림은 귀로 들어야 하는 법이다 
뻐꾸기는 뻐꾸기를 향하여 
개구리는 개구리를 향하여 
매미는 매미를 향하여 
한 목숨 긴 목청을 뽑아내는데 
누가 그들이 울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한 시절의 절창을 함부로 들었다고 하지 말아라 
뻐꾸기가 건네주는 봄 숲의 빈 터 
개구리가 쏟아내는 초여름 무논의 어둠 
이제는 매미가 십 년 세월 끌고 올라온 흙냄새 
나는 그것들을 펼쳐놓고 
떠오르는 얼굴 하나를 단풍들게 하고 싶을 뿐 
문신으로 아로새기고 싶을 뿐 

 

 

 ―시집『그리움의 저수지에는 물길이 없다』포엠토피아

 

 

 

 

 

 

내 마음의 벽화 · 7 / 나호열

-얼음 이야기

 

 

오래 전에 묻었다. 전별도 없이 투명하고 각진 그것을, 깊이 꺼낸 만큼 깊이 묻었다. 다시는 이 바람 앞에 눈물 흘리지 마라, 사전 한 권의 언어를 이제는 잊어라, 결빙의 시대에는 얼음만이 매장되리라. 뜨거운 가슴을 바람으로 동여메고 깊이 묻었다.
그 자리에 풀이 무성하다. 그 풀을 딛고 나무 한 그루가 자라난다. 나무 한 그루가 푸른 하늘을 데려오고, 푸른 하늘이 동박새를 데려왔다. 동박새의 목소리 멀리 퍼져나가고 그 나무 아래에 서성거리는 한 사람이 있다. 나무를 더듬으며 그는 자꾸 헛손질을 한다.
내 얼음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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