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적 문학
정유화(계간 <<시와 산문>> 편집위원)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우리 사회는 스피드를 위한 스피드의 삶을 경영하고 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다른 사람보다 빨리 끝내는 것이 하나의 미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니 미덕을 넘어 자기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되고 있다. 그래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한 정보 수집도 남보다 빨라야 되고, 그에 대한 정보의 재생산도 가급적 빨라야 된다. 더 나아가 재생산된 하나의 정보라도 다양하게 응용해서 최대한 부가가치를 산출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몸으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기에는 역부족일 때가 있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자기 몸이 둘이나 셋 정도로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푸념어린 상상도 했을 터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달리 명명하자면 디지털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적인 삶의 방식은 그 일의 존재론적 가치보다는 그 일의 효율적 가치를 매우 중요시한다. 자연스럽게 그 효율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스피드가 요구된다. 예의 그 스피드를 위해서는 합리성, 논리성 등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적 사고, 기계적 사고가 필수적이다. 물론 이러한 삶의 방식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삶을 비난할 수가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디지털적인 삶의 방식이 보편화, 정형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최첨단 정보화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삶의 경쟁을 요구한다. 이에 따라 아날로그적인 삶의 방식으로는 그 경쟁에서 살아 남기가 퍽 어려운 게 사실이다.
아날로그적인 삶의 방식은 순차적 시간의 특성을 요구하는 것으로써 그 존재성을 중요시 한다. 가령, 서울에 있는 남산타워를 올라갈 때에 남산케이블카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비탈진 산길을 따라 천천히 도보로 갈 수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전자는 디지털적인 접근 방법이 되고 후자는 아날로그적인 접근 방법이 된다. 알다시피 아날로그적인 방법은 느리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디지털적인 방법에 비해 매우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아날로그적인 방법은 걷는 ‘나’와 ‘길’과 ‘산’의 존재론적 가치를 음미하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바로 아날로그적인 방법이 지닌 가장 큰 이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방법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번거롭게 시간도 투자해야 하고 불편하게 육체적 노동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우연하게 ‘실천문학사’에서 발행한 ‘시집詩集’들의 장정裝幀 편집디자인을 보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물론 특별한 생각 없이 그냥 보면 여느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시집 장정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시집들의 장정을 만들기 위한 그 과정을 이야기로 듣고 시집을 보면 저절로 경탄하게 될 것이다. 먼저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그 시집들의 장정 편집디자인이 디지털적인 방식이 아니라 아날로그적인 방식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문예출판사들은 효율성, 편리성, 능률성, 상업성, 경제성 등등을 따져서 모든 디자인 편집을 기계에 의존하여 디자이너가 획일적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요컨대 디지털적인 방식의 디자인인 셈이다. 그러나 실천문학사는 그런 획일화를 완전히 탈피하고 있다. 실천문학사에서는 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진 홍익대 안상수 교수의 도움을 받아 철저하게 아날그적인 방식으로 디자인하고 있다.
그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한다. 먼저 안 교수는 디자인할 시집을 읽고 난 다음, 그 시집 내용 중에서 시인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시적 이미지들을 나름대로 확보한다. 그러고는 편집 주간과 함께 시인이 현재 거주하는 마을로 찾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시인과 함께 시인이 유년시절에 살았던 옛 고향마을을 찾아가기도 한다. 시의 근원이 되고 있는 시인의 삶과 생활환경을 직접 두루 체험하기 위해서다. 안 교수는 그 체험을 통해 시집 내용과 가장 잘 어울릴 수 있는 장정 디자인의 재료를 그 공간 안에서 발굴해낸다. 가령 농사를 주된 소재로 하는 시집일 경우에는, 그 시인의 논밭에서 흙을 채취하여 그것으로써 시집 겉표지를 누런색(흙 고유의 색)으로 디자인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 마을에 있는 겨울 저수지의 연잎 풍광을 사진으로 찍고 이것을 다시 수작업으로 디자인하여 시집 초두의 속표지에 하나의 잔상처럼 옮겨 놓는다. 마찬가지로 갈아엎어 놓은 논에 쌓인 잔설 풍광을 사진으로 찍고 이것을 수작업으로 디자인하여 시집 말미의 속표지에 하나의 잔상처럼 옮겨 놓는다.
이렇게 안 교수는 편집디자인을 하기 위해 발로 뛰어서 재료를 얻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재료를 몸소 수작업으로써 시집 장정을 디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적인 방식으로 보면, 얼마나 불편하고 번거롭고 고된 육체적인 작업인가. 얼마나 비능률적이고 비효율적인 작업인가. 그러나 아날로그적인 이러한 방식이 있기에 창조적인 시집 장정 디자인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자연적 삶의 원리(자연성)와 기계적 삶의 원리(인위성)가 융합된 시집이 창조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표지 장정은 자연성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으며, 표지 안의 시 내용은 컴퓨터에 의한 기계성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시인의 시집은 아날로그적인 삶의 원리와 디지털적인 삶의 원리를 융합한 문학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시집 장정 디자인은 시집 내용을 담고 있는 큰 그릇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표지 장정은 그 효율성(획일성)을 지향하기보다는 그 존재성(다양성)을 지향한다.
문학은 인간적인 삶을 지향하는 존재적 거울이다. 문학마저 상업성에 매몰되어 디지털적인 삶의 방식만을 수용하고 또 그것을 재생산해내는 방식에 대해 한번쯤 반성해볼 필요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날로그적인 방식만을 고집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적어도 디지털적인 삶의 방식과 아날로그적인 삶의 방식을 융합할 수 있는 문학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럴 때에 문학이 다른 장르와 변별되어 그 생명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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