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휴즈 Ted Huges Poetry in the Making
해변가에서 접는 의자 위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바다이다. 하지만 바다는 그저 바다일 뿐이며 우리는 모두 바다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를 알고 있어서, 그 사람들처럼 마치 바다가 아직도 여전히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기라도 하듯 2백 마일의 거리를 여행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바다가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들은 모두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그저 그 바라보는 일이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그들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으며, 한참 동안 계산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괴물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번 그들이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물어보라.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난 여기서 바다를 보고 있어요, 대체 그 일 외에 내가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어떤 이들은 「일광욕을 하고 있는 중이라오」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일까? 단지 일광욕을 하기 위해서라면 왜 그렇게 먼 바다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그들이 원하는 것이 햇빛뿐이라면 자기 집 뒤뜰에서도 일광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첫째로 바다를, 둘째로 태양을, 셋째로는 아마도 타인들을 보려고 바다에 온 것이리라.
이 말에 의심이 간다면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해변을 긁으며 물보라를 날릴 때까지 기다려 보라. 그러면 사람들은 가능한 한 바다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우고는 굳게 창문을 닫은 채로 음악을 끄지도 않고 차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방풍창을 통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바다에서 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선박이 아니다. 물론 선박이 연기를 뿜으며 수평선을 따라 모습을 드러낼 때 마다 그것을 열심히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하더라도 말이다. 또 그들이 찾는 것은 그들 모두를 휩쓸어 갈 것 같은 해일도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얼 찾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거대한 자석과 핀처럼 해변에 빨려들어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그 일을 좋아할 뿐이며 또 그 일은 즐겁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은 크게 펼쳐져 있는 어떠한 풍경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같은 식으로 생각한다. 만일 그 곳 어디엔가에 물이 있다면 더욱 좋지만 실제로는 그것에 마음을 두는 것도 아니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차를 타고 가다가 심하게 굴곡진 길이나 갑작스럽게 트인 시야에 계곡과 강이 눈에 들어오거니 깎아지른 듯한 산의 뚜렷한 모습을 본 경험이 있다. 그 때 누구나 숨이 막힌 듯 말한다. 멈춰......저걸 봐! 이것은 너무도 공통된 것이어서( 불가피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지방의회들은 이러한 효과가 일어나는 장소마다 도로 옆에 차를 세워 놓을 수 있는 특별 구역을 마련해 놓는다. 심지어 때로는 그곳에 아름다운 조망 애호자들을 위해 아이스크림 판매대까지 만들어 놓기도 한다. 여러분은 자동차나 버스에서 뛰어내려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는 풍경화와 친숙하다. 내 생각으로는 초상화 다음으로 풍경화가 그림의 가장 보편적인 종류인 것 같다. 첫째는 사람이며 그 다음으로는 경치이다. 그토록 많은 뛰어난 화가들이 잇따라서 그림 속에 풍경의 정수를 포착하려 애쓰며 그 생애를 써버렸다고 한다면, 풍경을 우리에게 얼마나 진기한 매혹을 안겨 주는 것인가. 또한 사람들은 마치 황량하게 펼쳐져 있는 콘네마라의 풍경, 혹은 몇 마리 야생 오리가 앉아 있는 개펄, 또는 소들이 서 있는 들판으로 나 있는 어떤 특별한 창문이기라도 한 것처럼 응접실 벽에 걸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돈을 주고 아주 평범한 풍경화나 심지어는 아주 따분한 풍경화 같은 것을 사들이는 것인가.
확실히 우리 모두가 전원과 은밀한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아마도 집 따위는 보이지 않는( 혹은 집들이 있다 해도그것을 전원풍의 집이나 오두막집이거나 莊園같은 것이어야 하는) 풀밭과 숲에 은밀한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결국 모든 기차 칸 마다에 네 개의 풍경화를 거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것은 광적인 심취인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가 양쪽에 나 있는 커다란 차창을 통해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거의 확실히 풍경보다 더 많은 어떤 것이며 우리 모든 여행자들은 그것을 바라보겠기에 말이다. 추측컨대 그 네 장의 그림을 기차가 아낙에게도 맞지 않는 도시나 빌딩 숲 사이로 지날 때를 대비한 것이리라. 하지만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왜 네 장씩이란 말인가? 둘만으로도 충분할 것인데.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우리 모두는, 우리가 일컫는 대로 美적 장소에 반응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대중과 취향이 달라 대중적이 아닌 다른 미적 장소를 찾는 것이거나, 아니면 맛있는 것을 주지 않자 다른 것까지도 먹으려 하지 않는 어린 아이처럼 실쭉해져서 전원을 혐오한다거나 녹색에 넌덜머리가 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은 미적 장소나 그와 유사한 것을 즉시 인식한다.
보통 이러한 장소들은 한 가지 공통된 점 때문에 유명한 것인데 그것은 그 장소들이 야생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알맞게 야생적이면 야생적일 수록 우리는 그 장소를 더 좋아한다. 그러면 그러한 야생적인 장소가 우리에게 해 주는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우리를 쉬게 해준다. 실제로 사람들은 쉬기 위하여, 건강한 정신을 만회하고 회복하기 위하여 이러한 장소를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왜 텔레비전 앞이나 공원 앞에서 쉴 수 없을까? 그것은 그들이 쉴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장소에 있어서의 이 휴식과 위안의 기분을 가져다주는 사정은, 그 장소가 우리에게 주입시켜 주는 정신 상태 때문인 것이다. 이들은 한 때 존재했던 세계와 모든 점에서 유사한 유적이다. 그 장소는 우리의 조상들이 15억 년간 살았던 환경으로 우리를 데려가는데, 그 기간은 비문명화된 땅만큼 야생적인 한 장소에서조차 아주 편안하다는 느낌을 키워주기에 충분하리만큼 간 것이다. 문명은 상대적으로 낯선 것이며 여전히 우리의 신경에는 어느 정도 긴장을 준다 -- 문명은 인류에게는 아직도 편안한 것이 못되어서 우리는 여전히 그 오래된 환경으로 돌아갈 휴일을 가끔씩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 대부분이 누리고 있는 원시적 본능과 감정이 편안함을 느끼며 유리한 상황에 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장소에서 뿐이다. 그것은 거의, 마치 이러한 장소가 우리의 다 써버린 전지를 축전시켜줄 수 있는 발전기이라도 한 것과 같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어떤 종류의 전류로 축전하는 것일까? 그러한 유사 이전의 감정과 만족을 즐거운 기분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느껴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수혈과 같으며 야생적 환경 하에서 그것은 표면으로 떠올라 우리를 상쾌하게, 새롭게 해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장소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원기 회복이 된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왜 우리가 그림이나 글에서 표현된 그와 같은 장소를 발견하고는 그토록 여러 번 즐거워하는가에 대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한 작품들은 식물에게 있어 물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건강에 중요한 그러한 감정들을 우리의 내부에 부활시켜 주는 것이다.
여기에 시인인 에드워드 토마스가 쓴 인용문이 있는데 이것은 내가 뜻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시가 아니고 또는 최소한 운문도 아니다. 이것에 바다에 대한 묘사인데 그는 자신이 이른 아침 바다와 마주치게 되었을 때 내가 말해론 바로 그러한 감정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이, 그 가장 특징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는 바다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반응을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다는 ...... 육지처럼 변하지도 움츠러들지도 성장하지도 않았다. 또 태양열로 더워지지도 않았다. 바다는 인간과 동물들을 현재의 그 모습으로 바꿔온 시간의 문밖에서 잠자고 신음하며 시간에 의해 흔들리지 않은 채로 누워 있는 괴물이다. 실제로 그 싸늘한 운명적 요소와 그것의 무수한 거주자는 그것이 희미하게나마 과거를 느낄 수 있고 시간의 여명-- 그 때 바다는 불가해 했고 지나갈 수 없었던-- 을 회상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동경심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 때 육지는 다만 최근에 와서야 물 밖으로 솟아올랐지만 다시 아래로 하강했다. 육지는 인간이 부슬비 내리는 세계의 여명 속에서 人跡未踏의 산과 숲과 늪을 조망하면서 갖게 된 생각을 머리 속에 쏟아 넣으며, 죽음 이외엔 모든 것이 알려지지도 확실하지도 않은 황무지의 형태가 되었다. 지금의 바다는 바로 산과 숲과 늪이 태연한 敵이었을 그 때의 바다이어서, 그것을 바라보면 그 옛날의 공포가 되살아난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복원이 완벽했던 어느 한 새벽을 기억하고 있다. 아직 어두웠고 바람은 낮은 잿빛 하늘을 솟구쳐오르며 질주했고 종다리 한 마리가 가시금작화 덤불의 신음 소리와 문의 삐꺽거리는 소리와 만조의 깊게 들여쉰 숨소리 한가운데서 노래하고 있을 때였다. 또한 갈매기들이 소용돌이 위의 거품이나 뒤섞여든 눈발과도 같은 동작으로 선회하고 빙빙 돌며 떠 있기 시작한 때 아직 밝지도 않은 때였다. 갈매기들도 검은 모서리들이 어두운 바다의 거품으로 침칠해져 있는 바위산 가파른 언덕에서 끄덕거리며 부딪치며 교차하는 고기잡이배의 둘레 주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의 안쪽 벽들을 지나 그 깎아지른 바위가 거대한 우상의 모습을 꾸미고서 있는 검은 곶의 우중충한 계단과 수문에 이르기까지, 배 사이나 회색빛 집 근처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높은 돌산에는 덤불이 우거지고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아르메리아와 세잎잔개자리와 흰부레석죽 따위가 쿠션처럼 나 있었다. 그것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곤두선 바다, 어둡고 차갑고 거대한 바다였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에서 육지는 날아오르는 작은 새의 울음소리와 희고 금빛인 작은 꽃들의 아름다움을 그 우상들에게 바치며 무릎을 꿇었다. 그것들은 정말 무서웠다. 그러나 바다는 더 무서웠다.
이 인용문이 지닌 효과를 정말로 그토록 힘차게 해주는 것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종다리와 문과 배와 갈매기와 적은 꽃들 --거대하고 죽은 듯이 어두운 바다에 정반대되는 그러한 작고도 생기에 찬 사물들-- 을 뒤덮고 있는 바다에 대한 그 섬뜩한 설명인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풍경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단지 그 속에 있는 요소들을 제시함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요소를 이루는 사물과 생명체, 즉 아마도 인간 사이의 만남을 부여하는데 있어서 진술한 바대로 이것이 풍경이 우리로 하여금 의식케 해주는 그러한 인간적인 감정의 표출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라. 넓은 호수와 멀리는 칠턴스가 보이며 유원지와 해안림이 섞인 천 오백 에이커의 땅, 이것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거의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그것은 꼭 초라한 광고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와 같은 면적의 땅이 영국 화가인 터어너의 그림 속에 나타난다면 아마도 그것은 힘차고 풍부한 감정의 렌즈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풍경을 언어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작은 범위에서조차도, 물감으로 아주 신속히 해치울 수 있는 완벽함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거기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언어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다음 작품을 예로 들어 얼마나 생생한 영상을 그릴 수 있는 지를 살펴보라. 이 시의 제목은 北美 서남 지방에 있는 주 가운데 하나인 버지니아 Virginia 주이며, T.S 엘리오트의 작품이다.
붉은 강, 붉은 강
천천히 흐르는 더위는 고요하다
어떠한 의지도 고요한 강물처럼
고요하지 않다, 더위는
언젠가 들었던 입내새를 통해서만
움직일까? 아직도 언덕들은
기다린다, 문들이 기다린다, 자주색 나무도,
흰 나무도 기다린다, 기다린다,
猶豫를, 부패를, 결코 움직이지 않는
삶, 삶, 한 번은 움직이는
냉혹한 생각들이 네게 떠올랐지,
그리고 지금은 나와 함께 가고 있다.
붉은 강, 강물, 강물이
나와 비슷한 점이 있다면 여러분은 이 시에서 한 장소에 대한 아주 격렬하리 만큼 생생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것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고 느끼리라. 그렇지만 이 시는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흰 나무들 곁의 자줏빛 나무들일까? 그 문들이란 정원의 문일까, 아니면 들판의 문일까? 그 문은 나무 곁에 있을까, 아니면 강가에 있을까? 거기에 집이 있는가, 없는가? 나무들은 강가에 있는 걸까? 아니면 언덕 위에 있는 걸까? 이 시는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그토록 힘찬 연상을 창조한 것인가? 좀 전의 인용문처럼 이 시도 강렬하고 생생한 감정을 창조함으로써 생생한 영상을 창조하고 있다. 이 시가 묘사하는 것은 천둥과 번개로 변하게 될 어느 뜨거운 오후, 버려진 서남부의 어느 느른한 대낮처럼, 짓누르는 위기감이 낮게 깔려있는, 열기와 건조함과 피로, 정지된 시간, 널리 퍼지고 있는 정적과 더불은 완만함의 감정인 것이다. 모든 것은 천천히 감겨들고 있는 諸局面의 진행 속에 놓여져 있다. 아마도 이 작품을 파악하는 그럴듯한 방법은 이 더위로 망연해진 땅 밑으로 가라앉아 흘러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강물에 대한 표현으로서 이 작품을 생각해 보는 것이리라. 언덕들, 풀들, 흰 나무들, 자줏빛 나무들 모두가, 강이 천천히 여행을 하고 있는 그 위 지표면에 반사된 것들처럼 움직이면서도 정지한 채 뒤집혀 있는 것이다.
.....결코 움직이지 않는
삶, 삶, 한 번은 움직이는
냉혹한 시간들이 내게 떠올랐지,
그리고 지금은 나와 함께 가고 있다.
붉은 강, 강물, 강물이.
이 다음의 시에는 우리가 정직한 묘사라고 부를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 생생한 세부들은 모두 한 가지 사항을 목표로 하는데, 그것은 날카로운 초점에 맞춰진 장면, 어떤 황폐하고 외진 장소의 유쾌함과 불안스러운 명랑함, 침울하면서 빛나는 모든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내가 시에서 알고 있는 관례적인 미적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 것은 너무도 선명하고 적절해서 내가 실제의 경치에서 그와 같은 것을 보게 될 때마다 정말 「인버스네이드」 처럼 훌륭하고 생각할 정도인데, 「인버스네이드 Inversnaid」는 이 시의 제목이며, 제랄드 맨리 홉킨스의 작품이다.
이 어스레한 개울, 말 잔등처럼 갈색인,
그 바위 구르는 대로를 울리는,
우리에서 골짜기에서 그 거품의 흰 무리는
피리 소리를 내며 호수 낮은 곳으로 깊이 떨어져 내린다.
바람에 날린 엷은 황갈색 깃털 하나가
선회하다가 떨어진다, 무섭게 찡그린,
그토록 시꺼먼 웅덩이 수면 위에,
그것은 돌다가 돌다가 마침내는 자포자기하여 익사하고 만다.
이슬로 더럽혀져 있다., 이슬로 얼룩져 있다
시냇물이 밟고 지나가는 산허리의 궁륭들은,
뻣뻣한 히이드의 무리, 양치류의 덩어리,
그리고 개울가를 덮고 서 있는 구슬처럼 고운 물푸레나무.
세상은 무엇이 될까? 한 번 습기와 야생을
빼앗긴,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오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야생과 습기를,
잡초를 그리고 또한 황야를 오래도록 존속케 하라.
이러한 시의 가치는 몇 가지 점에서 실제의 풍경보다도 우수하다는 데 있다. 우리가 실제로 그러한 장소 속에 있을 때 받게 되는 혼란스럽고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마는 감정들이 이러한 시 속에서는 집중되고 순화되며 강렬하게 된다. 이따금 시를 쓰려는 충동을 갖는 사람들 사이에 아주 공통된 감정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어떤 인상적인 경치를 보게 되거나 어느 장소에서 특별한 분위기를 느끼게 될 때 그들이 어떤 방법을 써서 그것을 포착하고, 그것에 중요한 것들을 추출하여 움켜쥐고, 그것에 대해 충분한 기쁨을 느끼고 파악해 내려고 하는 욕망을 갖는다는 점이다. 풍경과 더불어 이 일을 해내기는 어려운데, 왜냐하면 풍경은 너무도 많은 세부를 수반하며 또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징후를 제시해서 우리가 압도되기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전부는 다만 우리의 인간적인 흥분, 그 장소에 대한 아주 깊은 감정을 개진해 주는 약간의 실마리뿐이다. 우리는 사진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들어맞는 음악이 수반된 감광막을 원하는 것이며, 그 음악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음의 시에는 바로 전 작품보다 더 많은 시각적 묘사가 나온다. 그러나 각각의 이미지는 두 가지 일을 하는데, 즉 그것은 카메라 촬영처럼 장면의 몇몇 세부를 투사하는 동시에 여러분이 그 촬영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제한해 주고 있다. 그것은 마치 영화에서의 음악이 화면보다 훨씬 더 강하게 우리의 감정에 작용하는 것과 같다 - 화면 없이는 아마도 우리는 음악의 대부분에 거의 흥미를 갖지 못하게 되며, 또 음악이 없다면 화면은 우리의 주의를 끌기에, 그것 혼자만의 힘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고된 작업을 치러야 할 것이지만, 이 작품은 황혼 무렵서 요크셔 지방에 있는 워터링 언덕의 황야를 산책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이다. 이 시는 미국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작품이며, 제목은 「워터링 언덕 Wuthering Heights」 이다.
지평선은 나뭇단처럼 나를 에워싸고 있다,
기울어지고 흩어진, 또 언제나 불안정한 나뭇단처럼.
성냥불에 닿으면 그것은 나를 따뜻하게 해 주리라,
그리고 그 섬세한 線들은 대기를
오렌지 빛으로 그슬리리라
그것이 억누르고 있는 遠景이 증발하기 전에,
창백한 하늘을 강한 색채로 무겁게 하며,
하지만 그것은 녹고 또 녹을 뿐이다.
일련의 약속처럼, 내 걸어 나갈 때,
여기엔 풀잎 끝보다 아니면 양의 심장보다
더 높은 생명은 없다, 그리고 바람은
동일한 운명으로써 흐른다, 모든 것을
한 방향으로 굽히며,
나는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나의 열기를 집중케 하려 애쓰고 있음을,
만일 내가 히이드 뿌리에
아주 밀접히 주의를 쏟는다면 그들은 나를 이끌어
그것들 속에서 내 뼈를 하얗게 해 주리라.
양들은 자기들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
날씨처럼 잿빛인
그 더러운 양털 구름 속에서 어린 잎을 먹으며,
그 瞳孔의 검은 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것은 공간 속으로 우송되고 있는
하찮고 어리석은 傳喝같다.
그들은 할머니같이 假裝하고 서 있다,
곱슬거리는 가발과 누런 이를 하고서
엄하고 냉담하게 매애 거리며.
나는 바퀴 자국과,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달아나는 외로움처럼 맑은
물가에 이른다.
텅 빈 층계가 풀잎에서 풀잎으로 나 있고,
가로대와 문지방은 이미 구분되어 있었다.
사람들 가운데 공기만이
몇 개의 이상한 음절을 기억하고 있다.
공기는 그 음절들을 신음하듯 되풀이한다.
검은 돌, 검은 돌 하고.
하늘은 나에게 기댄다, 모든 지평선들 가운데
유일하게 직립해 있는 나에게.
풀잎을 미친듯이 자신의 머리에 때리고 있다.
그것은 너무도 섬세한 광경,
사람 틈에 있는 한 생명에게는,
어둠이 그것을 위협한다.
이제 돈지갑처럼 좁고
어두운 계곡에서 집은 등을 켠다,
작은 변화처럼 반짝거리는.
□ 노트
이 章에 인용된 작품들이 실마리를 줄 것이긴 하지만, 학생들에게 풍경에 관해 이처럼 객관적인 문체로 긴장해서 글을 쓰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무리라고 여겨진다. 내 경험에서 볼 때 가장 생산적인 방법은 학생들을 있는 그대로 어떤 특별한 환경 속에 풀어놓은 다음 그들에게 그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보통은 학생들이,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보다는 낯설거나 극단적인 모습을 띤 풍경에 대해서 보다 더 가치가 있는 (그들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글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학생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여하튼간에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라야 비로소 상상이 되고 펜에 유용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막, 대초원 지대, 남극, 달 같은 것들은 모두 그들의 침실 창문으로 보이는 전망보다 훨씬 쉬운 것들이다.
여기에 서로 다른 여러 시기를 통하여 내가 성과를 거두었던 일 곱 가지 주제를 제시해 보겠다.
염두에 두었던 주된 것은 그 세목들이 명확하고도 특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1. 나는 거대한 낙지이다. 어떤 해일이 밀려와 나를 좋지 않은 바다- 너무 추운 바다로 데려갔다. 나는 바다 밑바닥 위에서 집으로 돌 아가는 길을 찾으려 하고 있 다.
2. 나는 대서양 최남단의 어느 섬에 있는 은둔자 혹은 표류자이다. 나는 단지 먹이만 찾는 일을 할 뿐이다.
3. 나는 외계에서 온 생물이다. 나는 바다 근처에 착륙했다. 이것은 본거지에 보내는 내 보고서이다.
4. 나는 아마존(희랍 신화에 나오는 용맹한 女部族이다.
5. 이 망원경으로 네가 볼 수 있는 것을 써 보아라.
6. 나는 장님이다. 그런데 한 번, 단지 5분 동안 나는 볼 수 있었다. 이것이 그때 내가 보았던 것이다.
7. 나는 개에게 쫓기고 있는 탈옥수이다.
출처-세상과 세상사이
'나호열 시인 > 詩 창작 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근수 / 시와 소설-무용가에게 영감을 주는 마르지 않는 샘 (0) | 2011.07.06 |
---|---|
정유화 /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적 문학 (0) | 2011.07.06 |
테드 휴즈 / 생각하는 법 (0) | 2011.07.02 |
테드 휴즈 / 사람들에 관한 글쓰기 (0) | 2011.07.02 |
나호열 / 예술가의 초상 (0) | 2011.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