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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창작 강의

테드 휴즈 / 생각하는 법

by 丹野 2011. 7. 2.

 


 

생각하는 법

 

테드 휴즈 『시작법』 , 한기찬 역

 

 이제 나는 무엇보다 먼저, 어떤 類의 사고작용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는 것을 밝혀두는 것이 낫겠다. 우리가 사유라고 부르는 이 활동에서 이상하고도 놀라운 점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람들 모두가 어느 만큼은 자신의 상표를 창안하여 자기 자신의 사상 뿐만 아니라 자기만의 사유를 행한다는 것이다. 만일 아주 전문적인 종류의 사고작용이 요구되는 어떤 아주 전문적인 직업을 갖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이 적절히 생각하지 못한다고 하여 그렇게 염려할 것은 없다. 실제로 해야 할 일은 생각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알다시피 사유란 호흡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 어떤 종류의 사유는 보통 우리들에게서 쉬지 않고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니 대체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문제는, 우리가 다소간에 어떤 것을 혹은 끊임없이 생각하고는 있지만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이 생각하거나 또 어떤 사람은 훨씬 적게 생각한다는데 있다. 우리들 중 몇몇은 매우 원기왕성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부산대며 일을 해치우는데 다른 이들은 그저 들어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 사람의 마음 속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뇌가 모든 시간을 혹은 대부분의 시간을 분투하며 일하며 기억하고 생각을 짜내고 있는 동안, 다른 뇌는 그저 코를 골며 이따금 몸을 뒤척이며 누워 있을 뿐이다. 이제 나는 그 첫 번째 類의 사람들에게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비는 이외에는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내가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대상은 게으르거나 은밀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인데, 내 경험으로 보아 이런 사람들은 스무 명 중 열 아홉 명에 이른다. 나 자신 역시 그러한 속에 속하는데 언제나 늘 그래왔다.

 

 학생 시절, 나는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보다 실제로는 더 나은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것은 내가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거나, 그 생각들이 표현되기엔 너무도 깊고 복잡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내가 생각한 바를 말하거나 쓰려고 했을 때 그러한 사상들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줄리어스 시이저의 맏아들 이름을 묻거나 「7283 곱하기 6956은? 빨리 답해. 생각해 봐. 생각, 생각」말했을 때와 똑같이 마비되고 무미건조한 감정들이었다. 이제는 한 두 가지 이유로 나는 내가 결코 붙잡을 수 없는 나 자신의 그러한 사상에 매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때때로 그것들을 사상이라고 하기 어려운 그러한 것 - 어떤 것에 대한 몽롱한 감정 - 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국어를 제외하고는 역사나 수학 혹은 그러한 類 위 어떠한 특정한 과목과 부합되지 않았다. 나는 이것들이 에세이에 알맞은(그렇다고는 해도 평범한 에세이는 아닌) 그러한 종류의 사상들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점차 나에게서 성숙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내가 그것들을 붙잡아 둘 수 없었기 때문에 내게는 쓸모가 없었다. 아마도 내가 에세이를 쓰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중 어느 한 가지의 끄트러기를 붙잡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렇게 만족스러운 것이 되지 못했다.

 

 이제 여러분은 아마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인지를 알 수 있으리라. 나는 확실히 생각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내게 흥미롭게 여겨지는 사상도 갖게 되었지만 나는 그 사상들을 붙잡아 두거나 내가 필요할 때 끌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내게만 특이하게 일어난 것이어서 아무에게도 흥미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으리라 - 만일 내가 대개의 사람들이 똑같은 곤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말이다.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 - 단지 생각의 섬광, 그런 다음에 사라지고 마는 - 이거나, 그들이 자신이 어떤 것을 알고 있거나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더라도 원할 때에 그러한 관념을 밝힐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의 마음은 그들의 권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리지만 사실인 것이다.

 

 거기에는 內的인 삶이 있는데, 그것은 결정적인 실재의 세계이며, 추억과 정서와 상상과 지성과 꾸밈없는 상식의 세계이고, 심장의 고동처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언제나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 내적인 삶에 뛰어들어 해답을 구하고 거기에서 나온 답을 확증하는 증거를 주는 사고의 과정 역시 존재한다. 급습이나 확신, 잠복, 끈질긴 추적, 굴복 등의 과정은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사유의 종류이며, 만일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때 우리의 정신은 사람들이 낚아 올릴 수 없는 깊은 연못 속에 있는 물고기처럼 우리의 내부에 누워있게 될 것이다.

 

 이제 내가 말하고자 하는 類의 사유를 여러분은 알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것을 사유라고 불러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사유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 속임수나 솜씨가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붙잡기 어렵거나 흐릿한 사상들을 포착하여 한 데 모으고, 그것들을 우리가 정말로 차근차근히 조사해 볼 수 있도록 잘 붙잡아 둘 수 있게 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뜻하는 바를 알기 쉽게 설명해 보겠다. 만일 여러분이, 「네 아저씨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요청을 받으면 - 여러분은 그 아저씨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 얼마나 오랫동안 붙잡아 둘 수 있겠는가? 곧바로 여러분은 그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자 마자 여러분에게 다른 어떤 것을 상기케 해주고는, 자신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는 않는다 해도 배경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그러면 다시 그 아저씨를 불러 오도록 하자. 그리고는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무엇이든지) 생각하지 말고 아저씨에 대해서만 상상해 보라. 그러면 결국 여러분의 아저씨에게 있어서 무수한 것들이 상상될 수 있다. 그의 눈, 그의 표정은 어떠했나? 그의 머리, 가름마가 어디에 나 있는가? 또 얼마나 많은 웨이브가 나 있는가? 그 정확한 모양은 어떤 것인가? 또 만일 그가 대머리라면, 그 머리 피부는 무엇처럼 느껴지는가? 그의 턱 - 그것은 또 어떤가? 그것을 자세히 보라. 여러분도 알 수 있듯이 여러분의 아저씨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있다- 만일 그의 일을 여러 시간 생각하고 잇을 수 있다면 그에 대해 여러 시간을 쓸 수도 있으리라. 또한 기억 속에서 그를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조사해 보면 여러분은 그가 말하고 행한 것에 대한 온갖 기억과, 그에 관한 또 그의 언행에 관한 여러분 자신의 온갖 느낌을 갖게 된다. 그를 마음 속에 붙잡아 두고 또 여러분이 그에 관해 가졌던 생각들을 검토하면서 그에 대해 몇 주일이고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좀 과장해서 말하긴 했지만, 그 아저씨에 대해서 그리고 몇 초 이상의 시간 동안 그 아저씨에 대해서만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곧 알았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에 관한 여러분의 모든 생각들을 모을 수 있기를 희망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이 여러분의 마리 속에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상상력으로 움켜쥐고는 그것의 모든 조각조각을 조사할 때까지 놓아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할 일일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남아 있어서 존속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시 동안은 그 일이 가능하다. 나는 「돼지의 관찰.View of a Pig 」이라는 시를 통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해 보이겠다. 이 시에서 시인은 아주 잠잠한 어떤 것을 응시하여 그것에 관련된 생각들을 모아놓았다.

 

 그는 결코 그 돼지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 일을 아주 신속하고 간결하게 해치웠다. 확실히 그는 있을 수 있는 생각 정부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모여서 시를 이루는데 아주 적합한 생각들만을 추린 것이다. 여기에 「돼지의 관찰」이라는 시가 있다.

 

돼지가 손수레에 죽은 채 누워 있다.

사람들이 말하길 그것은 세 사람 만큼이나 무게가 나갔다고 한다.

그 눈은, 분홍빛 하얀 속눈썹들은 감겨 있다.

다리를 똑바로 뻗고.

 

죽음 속에 놓인 그 무게와 살찐

분홍빛 체구는 그저 죽어 있는 곳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 보다 한층 더 심했다.

그것은 밀가루 자루 같았다.

 

나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것을 때려 보았다.

고인을 모욕할 때, 무덤 위를 걸을 때

사람은 죄의식을 느낀다. 그러나 이 돼지는

꾸짖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지나치게 죽어 있었다. 그저

비계와 고기 한 덩어리.

그 최후의 위엄도 완전히 없어졌다.

그것은 재미있는 모양도 아니었다.

 

이제 연민을 느끼기엔 너무 죽어 있었다.

그 놈이 누렸던 삶과 시끄러움, 세속적인 쾌락의

요새를 회상함이

헛된 노력처럼, 빗나간 일인 듯이 여겨졌다.

 

너무도 치명적인 사실이었다. 돼지의 무게가

나를 압도했다 - 어떻게 그 놈을 옮길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잘라야하는 수고라니!

목의 칼자국은 충격적이었지만 불쌍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나는 소란한 시장 속을 달려본 적이 있었다.

고양이보다 빠르고 날쌘

기름 바른 새끼 돼지를 잡으려고,

끽끽거리는 그 소리는 쇠붙이를 찢는 듯했다.

 

돼지들은 뜨거운 피를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 놈들은 화로처럼 느껴진다.

그 놈들은 말보다 더 지독하게 물어뜯는다 -

반달 모양으로 깨끗이 절단한다.

그들은 재를, 죽은 고양이들을 먹는다.

 

이러한 특징과 찬탄은

오래 전에 끝이 났다.

나는 잠시 돼지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끓는 물에 데치려 하고 있었다.

데쳐서는 현관의 층계처럼 문질러 닦으려 했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시인은 그처럼 하나의 물체에 자신의 생각을 앉히는 법을 배웠을까? 그런 능력은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것을 결코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하며, 많지 않은 사람들만이 그러한 능력을 갖고 있을 뿐이다. 내가 가진 능력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못되지만 나는 어느 정도의 기술을 익혔는데, 그것은 학교에서가 아니라 낚시를 하는 동안에 였다. 나는 고여 있는 물에서 찌를 가지고 낚시를 했다. 알다시피 낚시꾼이 하는 일이란 끊임없이 몇 시간 동안이고 자기의 찌를 응시하는 일이다. 나는 수천 시간을 편두콩만한 하며 빨갛고 노란 점이 있는 10 야드 가량 떨어진 찌를 응시하며 보냈다. 그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아주 지루한 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결코 그렇지는 않다.

 

 보통은 여러분의 마음을 산란시키는 모든 조그마한 잡음의 자극들은 녹아 없어진다. 만일 계속해서 낚시를 하려면 그러한 것들은 녹아 없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게 되며 따분해져서 화를 내며 짐을 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것들이 용해되기만 하면 여러분은 희열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러분의 전존재는 그 찌 위에서 가볍게 휴식한다. 그러나 지루하게가 아니라 방심하지 않으면서. 그래서 그 찌의 아주 경미한 경련도 전기적 충격으로 이르게 되도록, 또한 여러분은 그저 찌만 바라보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경계심도 없이 가벼이 도취된 속에서 여러분은 오케스트라 속의 더블베이스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수면 아래 어둠 속에 있는 물고기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순간에 있어 여러분의 상상력은 천천히 수초를 떠나 미끼에게로 접근하는 물체를 보고는 깜짝 놀라는 것이다. 혹은 당신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고 멈춰 선, 저 아래에 있는 아름다움의 세계에, 그리고 이 집중된 흥분의 전 목적은 이 불안과 예측하기 어려운 사건의 무대에서, 무에서 생명을 일으켜 무로 환원시키는 피힐 수 없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살아있는 금속체처럼 어떤 사랑스러운 견고한 물체를 내놓는데 있다.

 

 따라서 찌로 하는 낚시는 작은 점에 집중하는 정신 훈련의 일종이며, 그와 동시에 여러분의 상상력으로 하여금 그 정지된 점과 관련되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수집하도록 작용케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그 정지점은 찌이며 그 찌와 관련된 것들은 여러분이 상상하느라고 분주한 모든 물고기가 된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것과, 어떤 상상된 영상이나 나의 아저씨에 대한 생각을 꾸준히 응시하는 것 그리고 내 마음 속을 배회하는 듯이 보이거나 혹은 그를 결국 바라보게 만드는 그에 관한 모든 상념들을 끌어모으는 것과는 그렇게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어떻게 그 일을 해낼 수 있는지를 안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D.H 로렌스가 쓴, 겨울 씨실리의 편도 扁桃나무에 관한 한 편의 시가 있다. 그는 편도나무에 관해 극히 재미있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가 그 생각과 그의 나무와를 짜 맞추는지를 잘 들여다 보라 - 그러나 그 나무는 언제나 거기에 있으며 그는 결코 그것들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다.

 

「헐벗은 편도나무. Bare Almond Trees」

 

젖은 편도나무들, 비 속에

쇠처럼 굳세게 땅에서 솟아나와 있다.

검은 편도의 줄기, 비 속에

철제 기구처럼 무시무시하게 비틀린 채, 땅 위로 나온,

깊고 부드러운 씨실리의 노루발풀과 먹을 수 없는

흙잔디의 깃에서 나온,

검은 쇠빛으로 음침하게 휘어져 비탈을 기어오르는 편도줄기.

 

테라스 난간 아래의 편도나무,

검고 녹슨 쇠빛 줄기,

너는 너의 가는 가지를 용접시켰다., 더 미세하게,

강철처럼, 공기에 민감한 강철처럼,

잿빛, 연자줏빛, 민감한 강철, 가늘고 부서지기 쉽게 포물선으로 휘어져 있다.

 

12월 빗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네 강청 첨단은 낯 선 전류를 감지할 수 있는가?

어떤 이상한 자석 장치처럼

너는 공기에서 전기 감응을 느끼는가?

하늘의 굶주리고 에트나 山을 끊임없이 배회하며 둘러싸고 있는 방황하는 전류로부터

너는 이상한 부호의 메시지를 받고 있느냐?

 

공기 속에서 유황의 속삭임 소리를 듣고 있는가?

태양의 화학제인 액센트를 듣고 있는가?

전화로, 지구를 덮은 바다의 표효를 듣고 있는가?

그리하여 이 모든 것으로부터 계산을 하고 있는가?

씨실리, 비 투성이의 씨실리의 12월,

낡고 비틀린 기구처럼 녹슬어 음침하게 가지를 뻗는 쇳덩이,

휘두르며 땅 위의 싸늘한 깃을 덮친다., 먹을 수 없는 부드러운 풀이 자란

비탈을 기어오르며!

 

 확실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 모두가 죽은 돼지나 나무처럼 그렇게 꼼짝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 내가 쓴 또 한 편의 시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괴물에 관한 것이다 - 나는 이 생물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음이 방금 발견된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여 의문으로 가득찬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알게 되고는 아주 당황하게 된다. 이것이 그 일련의 생각 전부이지만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이제 알게 되듯이 이 생물체와 그것의 어리둥절함이 놓인다. 이 시의 제목은 「오우드오우 Wodwo 」이다. 오우드오우는 反人反獸의 숲의 정령이다.

 

나는 무엇인가? 여기서 냄새 맡고, 잎사귀를 뒤집으며

공기 속의 희미한 얼룩을 따라 강가로 가서

나는 물 속으로 들어간다. 유리 같은 물결을

뒤집는 나는 무엇인가 위를 보면

정반대로 내 위에 河床이 보이고

나는 여기 공중에 떠서 무얼 하고 있는걸까? 왜 나는

이 개구리가 그렇게 재미있어 그 자장 은밀한

내부를 조사하고 가지려고 할까? 이들 수초는

나를 알고 있을까, 나는 그들의 세상에 알맞은 걸까? 나는

땅에서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뿌리는 없지만

일시적인 것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지도 않다. 나는

나를 무엇에고 붙잡아 맬 실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어느 곳에든 갈 수 있다

내겐 이곳의 자유가 주어진 것

같다 그럼 나는 무엇일까? 이 썩은 그루터기에서

나무껍질 조각을 떼어내도

즐겁지 않고 소용도 없는데 나는 왜 그 짓을 하고 있을까

나와 행위는 아주 이상하게도 일치하는데

그러나 나는 무어라고 불릴까 나는 최초인데

내게는 주인이 있을까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거대하다 만일

이 나무들을 지나서 이 나무들을 지나서 이 길 끝까지 간다면

내가 피로하게 될 때까지 그것이 내 한 쪽 벽을 만지는 것

잠시 동안 내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얼마나 모든 것들이

멈춰서는 나를 바라보는지 나는 내가 정확히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엔 이 모든 것이 다 있다 그것이 무얼까 뿌리들

뿌리들 뿌리들 뿌리들 또한 여기엔 물이 있다

또 다시 아주 이상한 물이다 그러나 나는 지켜볼 것이다.

 

 이러한 한 가지 사물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에 달라붙거나 여러분의 사상을 끌어내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예로 우리는 이러저러한 사물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치 않을 때도 있다. 우리는 사고의 진행을 - 이야기나 논의에서처럼 한 가지가 다른 한 가지에 이어지는 식의 - 원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그 때 하나의 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다음에 다른 한 가지의 것을 끌어내어 그 각각에 차례로 집중하는 것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것이 내가 설명해 온 기술을 획득한 그 다음 단계, 즉 두 번째 학과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지금까지 읽은 시들은 첫 번째 학과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위에서 말 한 대로 충분히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 노트

 

국어과목과 요가시간을 교체하지 않고도 이 장에서 나온 생각을 아주 쉽게 실행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

 

작고 단순한 대상에 단순한 집중을 해보는 일은 모든 정신 훈련에 있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어떤 대상도 괜찮다. 5분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며 시작하는 데에는 1분으로도 족하다. 만일 이 훈련이 모든 수업 때 마다 되풀이 된다면 그 결과가 곧 나타날 것이다.

 

글쓰기 연습은 이 뒤에 따르는 것이다. 학생들이 어떠한 작은 작고 단순한 대상을 선택하여 그것에 집중하는 동안 제 1 장의 노트에서 설명된 방법, 즉 주어진 길이로 주어진 시간에 자유로운 운문 형태로 묘사적인 글쓰기를 완수하는 법을 사용하게 된다.

 

모기

 

D.H 로렌스

 

언제 그런 기술을 익혔는가?

선생께선.

 

그렇게 긴 다리로 무엇을 지탱하겠는가?

그처럼 갈래갈래진 긴 다리로

뭘 그리도 으tm대는가?

그것은 무게 중심을 위로 들어올려

내게로 착륙할 때 공기처럼 가벼워져

무게 없이 앉아 있기 위해서인가? 그대 유령이여.

 

어느 여인인가가 너를 날개달린 승리의 여신이라 했지.

나태한 베니스에서.

그러자 너는 뒤를 돌아보고는 미소를 지었지.

 

어떻게 그처럼 심한 장난을

살무른 屍身에서 나온 희미한 유령같은 장난을

칠 수 있는가?

 

이상도 해라, 그 얇은 날개와 펄럭이는 다리로

어떻게 왜가리나 희미한 공기 덩어리처럼

無처럼 날아다닐 수 있는지.

 

그런데 靈氣가 너를 에워싸고 있다니,

먹이를 찾아 헤매며 내 마음을 마비시키는 사악하고 작은 영기가.

그것은 너의 속임수, 추잡한 마술의 일부.

네게 쏠리는 내 주의력을 죽여버리는

미학적인 힘, 그리고 不可視.

 

그러나 이제 나는 네 계략을 알지, 변덕스런 마술사여.

그런데 이상해라, 어떻게 공기 중을 활보하고 헤매는지

선회하고 도피하며, 나를 공격하면서,

날아다니는 송장 귀신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이여.

 

내려앉아서 길고 가는 다리로 서서

옆 눈으로 나를 보며 내가 알고 있음을 쇼활하게 의식하고 있는

너 작은 얼룩이여.

 

너에 대한 나의 敵意를 읽고는

갑자기 허공에서 옆으로 비틀거리는 그 수법이 나는 싫다.

 

그러면 오라, 서로 모르고 나도 네가 있는 줄은 모른다.

그럼 이제 시작이다!

 

이것은 너의 패군,

지겹고 보잘 것 없는 패구나,

증오로 갑자기 내 피를 뒤흔들어 놓는

너 날카로운 악마여,

너의 작고 높은 지겨운 나팔 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

 

왜 그렇게 하지?

확실히 그건 좋지 않은 수야.

넌 이제 피할 수 없게 됐군.

 

그러면 나는 결백을 지켜주는 섭리나 믿어볼까.

하지만 그건 놀라운 함성처럼 들린다.

네가 내 머리 가죽을 움켜쥘 때 승리의 외침처럼.

 

피, 붉은 피

초마술적인

금지된 술.

 

나는 네가 서 잇는 것을 보고 있다.

잠시 망각에 잠겨 경련하며,

음탕하게 황홀감에 젖어

살아 있는 피, 나의 피를

빨고 있는 너.

 

이 침묵, 멈춰 서 있는 도취,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이 불법적인 외설.

 

너는 비틀거린다.

당연하게도.

다만 너의 그 저주받은 털 같은 미약함,

헤아릴 수조차 없는 그 가벼움이

너를 구한다, 분노로 너를 움켜쥘 바로 그 吃水에서 나는 너를 날려보낸다.

 

조소의 韻脚(Paon: 장 1 단 3의 운각, 여기서는 다음의 행에서의 운각을 가리킴)과 더불어,

너 날개 달린 핏방울이여.

 

내 너를 따라잡지 못할까?

네가 내 힘에 벅찰까?

내 너를 능가하는 모기가 되지 못할까?

 

이상도 하다, 네가 만든 아주 작고 희미한 점에 비교하면

빨린 나의 피가 얼마나 큰 얼룩을 만들었는지!

이상도 하다, 네가 사라져 간 곳은 얼마나 흐리고 어두운 모깃불 속이었는지!

 

 

참깨를 털면서

 

김 준 태

 

산 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내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썬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 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1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