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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염창권 / 몸 언어로 말하기

by 丹野 2011. 5. 22.

 

 

                                               몸 언어로 말하기

 

                                                           - 체험의 지각 의존성에 관한 단상 -

 

 

 

                              염 창 권 (시인·광주교육대학교 교수)

 

 

 

 

   박명보,「 가시연꽃」전문(《우리詩》2010년 11월호)

   김경성,「 직립으로 눕다」전문(『와온』문학의 전당, 2010)

   고선주,「 밥알의 힘」전문(《열린시학》2010년 가을호)

   이수익,「 잘 가라, 안녕」전문(《우리詩》2010년 11월호)

   문정희,「 우울한 손」전문(《현대시학》2010년 10월호)

   홍일표,「 항아리 사설」전문(《시와반시》2010년 가을호)

 

 

 

 

  이미지는 우리의 정신적 감각에 호소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감각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몸을 주체로 하여 발생하지만, 전달

과정에서 타자의 몸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갖는다. 즉 이미지의 기원은 시

인의 감각에 있지만, 독자에게 지각되면서 그 경험을 복제하고자 욕망한

다. 그러나 독자의 몸은 다른 연원을 갖는 장소이니 시인이 생산한 이미지

가 그대로 소통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단지 그가 어떤 방식으로 대상과 사

물에 반응하고 표현했는지를 추론적으로 확인할 따름이다.

 

  1. 식물성의 몸 : 꽃잎

 

  인식적 주체의 감각은 언어를 통과하면서 전환translation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시인의 문체론적 특성이 드러나게 된다. 대상 세계를 지각하

는 시인의 의식은 지각된 내용과 언어가 뒤섞임으로써 구체적인 형상성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인식적 작용 그 자체가 시인의 시 문법이자 이미지의

기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진정 사물을 본다는 것은 사물을 주체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 아니라,

“보는 주체에서 벗어나 보이는 사물로 달아남(스며듦)”을 의미한다고 퐁티

는 말한다. 이 경우 주체의 일부는 대상에 투사, 분할됨으로써 몸은 주체의

균열을 감수한다. 즉 바라보는 지각의 주체와 지각되는 주체로 분할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각의 이중성을「가시연꽃」이 보여준다.

 

 

불안은 몸을 부풀린다

 

저보다 큰 덩치의 개를 만난 고양이가

온몸의 털을 세우듯,

 

빈손일수록

허기질수록

가시는 잎맥마다 돋아난다

 

그러므로 가시연꽃, 저 가시는

 

돌멩이처럼 쉬이 가라앉지 못하는 자존심

어느 역에도 닿지 못하고 떠도는, 무임승차한 여자의 불안한 눈빛

한강다리 난간에 걸쳐진, 투신 직전 사내의 망설임

이다

 

끝내 자신을 향하는

 

응축된 상처

핏빛 관冠이다

                    - 박명보,「 가시연꽃」전문

                   (《우리詩》, 2010년11월호)

 

 

  이 시는 유사성을 토대로 하여 “가시연꽃”에 대응되는 주체의 관념 상태

를 보여준다. “ 가시연꽃은”, “ ~이다”와 같은 은유의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에 해당하는 것이 주체에 의해 감각적으로 지각되고 해석된 의미이다.

‘가시연꽃’은 주체를 향하여 감각적으로 다가와 몸을 부풀리고 잎맥으로

돋아나면서 핏빛 가시관을 완성한다. 대상이 주체의 안으로 스며드는 동안

주체는 관찰자이자 관찰 대상이라는 이중성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첫 행 “불안은 몸을 부풀린다”는 선언을 통해 시적 발상이 촉발된다. 이

로써 의미의 자장은 불안의 범주에 포위되고 만다. 이어지는 시행들은 “불

안”의 선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불안의 구체적인 형상들은 “큰 덩치의 개

를만난” 고양이의 부풀린 털, “ 무임승차한 여자의 불안한 눈빛”, “ 투신 직

전 사내의 망설임”등으로 대체된다. 이 불안한 생의 형상들이 가시를 세우

게 하고 “쉬 가라앉지 못하는 자존심”으로 스스로를 견디게 한다.

  이 견딤을 바라보는 주체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

시”이다. 불안의 징후인 “가시”는 주체의 내부로 틈입하여 촉각적인 자기

학대를 감행하게 하고 생의 극한을 떠올리게 한다. 촉각에 호소하는 가시

는 몸을 부풀리며 잎맥마다 돋아나서 타자를 향해 두려운 존재가 되지만,

실상 내밀한 자기 불안과 상처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라앉지

못하고 물 위에 떠서 쓸쓸한 자존을 보여주는 가시연꽃은 주체의 내부로

이전되어, 주체의 현존에 뿌리내린 상처의 대유물임을 보여준다. 끝 부분

에서 ‘가시 돋힘’은 “핏빛 관冠”으로 치환되어 긍정되는데, ‘자기 학대’라

는 말을‘ 자기 돌봄’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의미가 통하는 까닭이다.

  식물적 대상에 의탁한 자기 확인은「직립으로 눕다」에서도 나타난다.

 

 

빗방울에 눌려 떨어져도 고요하다

소리 지르지 아니한다

입술 같은 꽃잎, 조금이라도 넓게 펴서

햇빛 녹신하게 빨아들여

몰약 같은 향기 절정일 때

바람에 날린다 해도 서럽지 않다

직립의 시간 허물어뜨리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 눕는다

목단꽃 떨어져도 넓은 꽃잎 접지 않는다

꽃대에서 그대로 시들어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꽃이어도 먼 곳까지 날았던

그림자의 기억이 있다

향기 환장하게 번져나는 꽃나무 아래 서서

꽃물 배이도록 젖어들다가

아, 나도 한 장의 꽃잎이 되어

네 꽃잎 위에 눕는다

포개어진 꽃잎 위로 스쳐가는

바람 부드럽다.

                    - 김경성,「 직립으로 눕다」전문

                    (『와온』, 문학의 전당, 2010)

 

 

  이 시는 소멸하는 꽃의 모습이 대립적으로 나타난다. 꽃은 소멸을 향하

여 존재를 개방함으로써 완성되는데, 그 완성의 방법은 공중을 날아서 낮

은 곳에 떨어져 고요하게 눕는 것이다. 완성의 방식은 강퍅하지 않고 순리

적이며 고요하고 가볍다. 여기서의 세계 인식의 방법은 매우 유미적이다.

존재의 가벼움이 시간의 직립성을 벗어나 완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도 소

멸의 미적 인식을 보여준다. 미를 향해 열려 있는 꽃이 스스로를 완성하는

방식은 조용히 소멸하는 것이다. 그러니 유미성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소리

지르거나 서글퍼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목단꽃 떨어져도 넓은 꽃잎 접지

않는다”에서와 같이 어쩌면 자기 방기의 상태가 세계를 향하여 아름다움을

개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 수 있다.

  그러나 “꽃대에서 그대로 시들어”에서 돌연 의미가 전환되면서 앞에서의

유미적 세계는 주체의 상황에 대응시키기 위한 설정이었음을 보여준다.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꽃이어도 먼 곳까지 날았던/ 그림자의 기억이 있

다”에서 선언되는 바, 꽃으로 날아보는 것이 꽃의 자기 완성 방법임을 확실

히 한다. 이와 대립되는 세계로 날지 못하는 꽃, 그리고 꽃대에서 시들어버

리는 꽃은 아무리 “향기 환장하게 번져나는” 몰약 같은 절정의 상태일지라

도 완성 직전에 멈춰버린 서글픈 존재이다. 시적 주체는 이와 같이 “시들어

버린 꽃”을 연민으로 바라보면서 그 꽃 잎 위에 눕는다고 말한다. 제목에서

“직립으로 눕는다”고 했을 때, 이는 과정적 성취이며 완성 직전에 정지 되

어 버린 것에 대한 연민이자 자기화에 다름이 없다.

  「가시연꽃」에서 두드러지는 감각이 촉각적 심상이라면,「 직립으로눕다」

는 후각적이다. 촉각적 인식이 보다 구체적이며 현실성에 기원을 둔다면,

후각적 인식은 관념적이며 유미적인 세계 인식과 결부되어 있다. 몸은 자

아와 타자를 매개할 수 있는 두께와 깊이를 가지고 있으며, 상호 교섭의 통

로로 작용한다. 몸 지각을 통하여 세계는 주체로 이전되며 이윽고 주체화

된다. 즉 대상과 세계는 몸 감각을 통해서만 주체의 내부로 스며들 수 있

고, 주체는 몸 감각의 치환을 통해서만 자기 내부에 깃들어 있는 세계를 확

인할 수 있다.

 

  2. 몸의 객관화 : 밥알

 

  신체화된 의식이란 의식과 신체, 의식과 세계가 분리되기 이전의 원초적

자아요, 자연적 자아이다. 신체지각은 세계로 향하는 방식이며 세계와 관

계하는 방식이다. 아래 시는 발에 밟히는 “밥알 하나”에서 생의 상관물을

찾아내고, 주체의 지각에 호소하는 물질성을 토대로 하여 생의 의미를 반

추한다.

 

 

아이가 흘린 밥알 하나

흐들흐들한 저 가운데

세상의 무게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있다

 

아이가 먹다

흘린, 유들유들한 밥알들

아이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러나 눈 찔금 감고

마음의 물기까지 말린다

 

눈물을 아는 것 아니냐

그 눈물 너머 단단한 삶이 놓여 있다는 것을,

 

어느 날 무심코 아이가 흘린 밥알을 밟았더니

가늘은 아픔 하나가 머리끝까지 잽싸게 오는 것이다

 

뼈만 앙상해진 밥알 하나

사느라 고열에 시달린 지난 시간들 뉘여

한 생애 거둘 새도 없이

막 풍장風葬을 끝내고 있는 것이다.

                           - 고선주,「 밥알의 힘」전문

                           (《열린시학》, 2010년 가을호)

 

 

  위의 시에서는 “아이가 흘린 밥알 하나”에서 자아의 상관물을 찾아낸다.

이 시의 지배소인 “밥알”은 주체의 삶을 대응시키는 환유물이다. 그런데 이

“밥알”이 힘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의 물기”,“ 눈물”,“ 단

단한 삶”등의 시어들과 만나면서 의미가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상의 무게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아이가 “밥알 하나”

를 흘려서 버려진 채 단단하게 굳어가고 있는데, 이를 밟는 순간 “가늘은

아픔 하나가 잽싸게” 다가온다. 이 촉각적인 순간은 아주 짧으나 주체의 현

존을 강하게 환기시키면서 시적 발상을 매개한다.

  이 밥알을 얻기 위해 기울였던 노고의 순간들이 “사느라 고열에 시달린

지난 시간들”에서 확인되는 바, 그 노동의 형상은 “뼈만 앙상해진 밥알 하

나”와 같이 허약하다. 그러나 제목 “밥알의 힘”에서도 나타나듯이, 물기를

지우면서 단단해져가는 버려진 존재로서의 실존주는 그 “단단함”으로 인해

힘을 갖게 된다. 세상과 대결하면서 거듭 단단해지는 것은 그가 거느린 식

솔들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가 흘린 밥알 하나에서 보듯 그 식솔들로부터

도 약간은 소외된 상태이다.

  끝 행에서 버려져 말라가는 밥알 하나를 “풍장風葬”에 비유하면서 주체는

대상을 통해 자신의 실존적 상황을 제시하고 있는데, “ 그 눈물 너머 단단한

삶이 놓여 있다”는 인식에서 보듯 생에 대한 피로감이 나타난다. 물기를 지

우고 말라가면서 풍장을 치루는 밥알 하나와 단단한 세상을 살아가는 생의

고단함이 상호 대응을 이루면서 실존적 삶을 극복하려는 건강한 자기 확인

을 보여준다.

 

  3. 몸의 기억과 서사 : 손

 

  막스 쉘러는 우리 몸의 구조 속에서 자아와 타자가 구별 없이 존재하고

있으며, 각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말한다. 여

기서 사람이 자기 안에서보다는 먼저 타자 안에서 산다고 말할 때, 타자의

시선, 그리고 공동체의 시선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

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억의 흔적을 가장 잘 드러내

는 것이 몸이다. 영화「메멘토」에서 보여준 것처럼 몸에 남기는 기록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몸에 남겨진 기록은 생의 매순간 참조되면서, 현실이 결

국 과거의 지속임을 끊임없이 깨우쳐 준다.

  아래 시는 기타 치는 한 사내의 남루함을 통하여 쇠잔하게 저물어가는

일상을 보여준다.

 

 

더럽게 물 묻은 옷을 껴입고서

 

저 사내, 꾸불텅거리는 손과 또는 발로서

 

숨죽일 듯 기타를 치고 있다네

 

마치 살아 있는 한 편의 죽음 같네

 

소리는 깊고도 가득하여 차마 움직일 수 없는 법

 

그만의 울음이 소용돌이쳐서 화음을 이루면서

 

뼈아픈 고독과 불안을 읊조리고 있다네

 

어디 한번 씻어보기라도 하였는가 후미진 팬티 속

 

우울한 습기를 털어내려는 듯 기타의 선율을 짚으면서

 

저 사내, 오늘 보다 더 푸른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네

 

 

또는 내일 보다 더 조그만 소망의 모레를

 

읽어내고 있다네

 

끝없이 희미한 하루가 가고 있네

                                  - 이수익,「 잘가라, 안녕」전문

                                  (《우리시》, 2010년 11월호)

 

 

  “더럽게 물 묻은 옷을 껴입고서” 기타를 치는 사내의 경우는, 누추한 몸

이 그 음원이다. 여기서 푸른 내일의 노래와 깨끗하지 못한 사내의 몸이 병

치되면서 불화를 일으킨다. “어디 한번 씻어보기라도 하였는가 후미진 팬

티 속/ 우울한 습기를 털어내려는 듯 기타의 선율을 짚으면서” 사내는 “푸

른 내일”을 “또는 내일 보다 더 조그만 소망의 모레를” 노래하고 읽어낸다.

그러나 그 내일이 푸르지 않으리라는 걸 예감하듯이 시의 어조는 비관적이

다. 어제는 오늘보다 더 깨끗하였을 것이고 푸른 내일이라고 지목했을 오

늘을 노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노래하였던 어제의 희망은 오늘 실

현되지 않았으며, 오늘의 노래는 다시 실현되지 못하는 내일이 되리라는

것을 몸의 서사를 통해 보여준다.

  “꾸불텅거리는 손과 발로서/ 숨죽일 듯 기타를 치고 있”는 사내의 남루

함과, 그 누추한 음원에서 뽑아내는 “뼈아픈 고독과 불안”의 노래는 주체

에게 이전된다. 주체는 이와 같은 타자 체험을 통해 그 노래와 사내의 현존

을 스스로에게 겹쳐 입는다. 이로써 사내의 노래는 주체의 노래이며, 더 이

상 푸르게 열리지 않을 내일에 대한 뼈저림도 주체의 현존을 나타낸다. 제

목에서 “잘가라, 안녕”이라고 했을 때,“ 끝없이 희미한 하루”에 대한 작별

이자, 푸르지 않을 내일과 소망스럽지 않을 모레에 대한 작별을 예언적으

로 보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관론은 사내로 대변되는 타자의 한계상황

에 대한 인식을 통해, 그에 “뒤따르는 지각이나 느낌”이 주체로 투사되어

자신의 실존적 한계상황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 가라, 안녕”이

라는 작별인사는 사내의 희미한 하루에 대한 것이자, 주체의 일상에 대한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사내의 연주를 통해 “마치 살아 있는 한 편의 죽음”

과도 같이 진행되는 생의 희미한 끝을 예감하는 탓이다.

  「우울한 손」에서 “손”은 생의 환유물이다. 여기서 주체는 균열을 일으키

며, 왼손이 오른손을 만지듯이 오른손은 느끼면서 다른 손을 통하여 느껴

지는 상태가 된다. 즉, ‘ 손’은 현재시를 쓰는 감각의 주체이면서 한편으로

는 시적 관찰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시인은 바라보는 지각의 주체이자 지

각되는 대상인 주체로 분할된다.

 

 

새것으로 다가온 사랑을 번번이 쭈그러뜨린

은박지처럼 차고 날카로운 손을 바라본다

비애의 엽록소들이 마른 가지처럼 뻗쳐 있다

 

둔도로 내리치는 이 무거운 힘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그 힘으로 시 하나 낳으려고 끙끙거리는

천명을 모르는 작은 짐승을 시인이라 부르는가

 

사실 나의 손은 좀 미친 건지도 모르겠다

봄을 그렇게 다 날려 보냈다

그 아까운 입맞춤을……

 

나는 짚으로 만든 돼지[芻狗]*일 뿐이니

다가오는 시간을 미래라 부르지 않고

비겁하게 노후나 여생이라고 부르는

아, 무산자의 더러운 가을이 오고 있다

 

 

* 노자의 말

* 추구(芻狗): 중국에서 제사 때 쓰고 태워버리는 물건

                                  - 문정희,「 우울한 손」전문

                                (《현대시학》, 2010년 10월호)

 

 

  나의 존재를 보장하는 것은 타자와 관계를 맺는 나의 몸이자 손이다. 이

시에서 “손”은 행위의 도구이자 내 의식의 대변자이다. 손은 주체의 인식과

의지를 대변하여 타자나 세계와 교섭을 하는 통로이다. 시적 화자는 타자

와의 관계와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탄식과 후회를 보여주는데, 몸의 일부

인 손을 독립적 개체로 객관화시키며 지난 일들이 손이 해낸 일이라며 행

위 자체를 부정한다. 시에서 자탄의 감정이 심화되는 부분은 “새것으로 다

가온 사랑을 번번이 쭈그러뜨린” 일이나 “그 아까운 입맞춤을……”을 날려

보낸 일이다. 자탄의 감정이 시간성에 닿아 있기에 지난날들은 소모되어

버려진 것으로 인식한다.

  시인은 손을 바라보면서 “비애의 엽록소들이 마른 가지처럼 뻗쳐 있다”

는 몸의 확인으로부터 소모된 시간에 대한 반성과 함께 “천명”이라는 한계

상황을 인식한다. “봄을 그렇게 다 날려 보냈다”와 같은 자책은 남겨진 시

간에 대한 거부로 연결된다. “다가오는 시간을 미래라 부르지 않고/ 비겁하

게 노후나 여생이라고 부르는” 등과 같은 평가적 입장은 시간 앞에 선 단독

자로서의 실존적 고독을 보여준다. 더구나 “무산자의 더러운 가을”이라는

선언에서 보듯, 주체의 자기 인식은 비관적이며 가혹하다. 보편적인 사랑

에 대한 욕망과 유한자로서의 자기 확인 사이의 거리감이 회의와 비탄으로

끌고 가는 요인이 된다. 특히 스스로를 추구芻狗와 같은 제웅으로 전락시킨

다는 점에서 “우울한 손”에 나타난 자기 응시는 가혹하기만 하다. 그것은

치열했던 젊은 날이 망가져서 되돌릴 수 없다는 상실감에서 연유한다. 몸

은 주체의 현존을 가장 강력하게 환기하는 관찰 가능한 또 다른 주체로 표

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 사랑을 번번이 쭈그러뜨린” 일은 일회성의 포즈가 아니라, 무수

히 시도했던 젊은 날의 행적이다. 여기서 추구芻狗는 물질적 외형을 나타내

는 것으로 불태워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은박지처럼 차고 날

카로운 손”도 외형적인 표상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열정은

다시 추구芻狗를 만들어 사랑을 불러들이고 주술사적인 굿판을 벌이고자 하

는 주체의 의지에 해당하므로 이 시를 포기와 좌절로만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산자의 더러운 가을”을 결코 불러들이지 않겠다는 주체의 강력한

반작용이 또 다른 의미 축으로 읽혀지는 까닭이다.

 

  4. 몸의 가소성可塑性: 자궁

 

  아래 시「항아리 사설」에서는 “항아리, 극장, 배부른 여자, 밀봉된 검은

봉지”등이 유사성에 따라 대비되면서 상호주관성의 망을 형성한다. 이 시

에서 몸과 몸은 서로 겹쳐지며 다른 몸에 담겨지고 태어난다.

 

 

항아리 속에 숨어서 목숨을 구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배부른 여자를 보면 울음의 방식으로 웃는다

 

극장은 세상의 밤이 담긴 항아리

사람들이 꼼짝 않고 앉아서 숨을 죽인다

팔다리를 떼어 내려놓고

조금씩 끓어오른다 가끔 소리를 지르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처럼 시간 밖으로 사라지려는 사람도 있다

 

극장이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밀봉된 검은 비닐봉지 속

 

너무 컴컴하여 밤이 숨기에 좋은 곳

얼굴이 보이지 않는 밤이 가장 완벽하게 죽는다

 

극장은 뜨겁고 은밀한 자궁이다

몸과 마음이 축축하게 젖어 어둠의 껍질을 벗겨내면

갓 부화하여 발그레한 햇덩이가 걸어나온다

 

배부른 여자가 원형극장을 통째로 안고 간다

                           - 홍일표,「 항아리사설」전문

                          (《시와반시》, 2010년가을호)

 

 

  “극장은 뜨겁고 은밀한 자궁이다”는 선언은 이 시의 중심 의미축이 되는

데, 이 극장에 담겨진 사람들은 태아와 같이 수동성의 꿈을 꾸는 상태이다.

이 태아들은 “팔다리를 떼어 내려놓고/ 조금씩 끓어오른다”와 같이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하지만, “몸과 마음이 축축하게 젖어 어둠의 껍질을 벗겨

내면/ 갓 부화하여 발그레한 햇덩이가 걸어나온다”와 같이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 탄생은 역으로 죽음을 강력히 반향시키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는 밤이 가장 완벽하게 죽는다”와 같이 대립적인 세계를 배경으

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탄생/ 죽음”은 등을 맞댄 채 선택을 강요한다.

  살아남은 사람이나 재생을 꿈꾸는 사람이나 간에, “밀봉된 검은 비닐봉

지”와 같은 극장이나 항아리 속에 담겨져 밤의 시간을 견뎌야만 한다. 이윽

고 밤이 가장 완벽하게 죽을 때,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만이 어둠을 비집

고 나와 햇덩이 같이 발그레한 얼굴을 드러낼 수 있다. “ 얼굴이 보이지 않

는 밤”이란, 그 어둠 속에서 익명으로 사라진 이가 있음을 함축하기도 한

다. 그래서 배부른 여자를 보면, 그 자궁 안에는 “탄생/ 죽음”이 등을 기댄

채 웅크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다. 그래서 “울

음의 방식으로 웃”게 되는 것이다.

  “극장은 뜨겁고 은밀한 자궁이다”는 최종적으로 “배부른 여자가 원형극

장을 통째로 안고 간다”를 향해 병치되면서, 극장에 담겨 있는 사람들의 태

아기적 수동성을 원형 심상으로 연결시킨다. 극장과 자궁은 은익의 장소이

다. 은익은 피호성을 강화하지만, 한편으로 어둠과 감금 장치로 인하여 폭

력에 노출될 경우에는 속수무책의 밤으로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몸의 은유나 상징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선별하여 읽

고 나름의 해석을 붙여 보았다. 근래에 들어 몸 담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

고 있다. 몸 담론에서는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가 상호 교섭하는 통로로

서 몸을 중심에 두고, 인식과 감정이 어떻게 몸 지각을 통해서 소통될 수

있는가를 살핀다.

  이 글에서는 시인마다 고유하게 야기되는 몸 지각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부족함이 많은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드린다. 

 

 

 염창권 시인

* 시조(동아일보 1990),

  시(서울신문 1996) 등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 시집으로『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햇살의 길』,

  비평집으로『집 없는 시대의 길가기』가 있음.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 gilgag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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