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사, 즉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과 함께 서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초라해 보일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세상 이치가 모두 상대성이라는 사실 때문이지만, 위만 올려다보고 살았을 때 지치고 온 몸에 힘이 빠지게 되는 것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홀로 동떨어져 아웃사이드의 고독을 느끼며 나르시즘에 빠져보는 맛도 어쩌면 필요한 것이 우리네 인생일지도 모른다. 개울가에 앉아서 돌을 골라도 예쁜 돌을 고르기 마련인데, 화려하고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 주위를 어쩔 수 없이 서성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상대적 소외감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이 말은 경북 영주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과 무량수전의 신라대찰 부석사를 가까이 두고 상대적으로 초라히 서 있는 성혈사聖穴寺란 절집을 두고 한 말이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성혈사는 이름처럼 바위굴에서 성승聖僧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처음 이 절집을 찾았을 때 다가왔던 나한전의 꽃창살과 소슬살문에 넋을 놓은 적이 있었다. 이토록 수려하고 아름다운 문살을 간직한 사찰이 인근에 부석사와 소수서원의 유명세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던 게다. 그리고 막 돌아와 그곳의 문살을 그리워하는 목이 긴 사슴이 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근 오년만이던가? 지난 해 가쁜 숨 몰아쉬며 달려갔을 때, 에구머니~ 나한전이 수리보수의 수술을 하고 있었던 덕에 눈물을 참으며 빈 발길을 돌려야 했던 기억을 되살리고, 새봄이 오기를 바쁘게 기다려 찾는 지금의 발길은 잔잔한 흥분으로 몰아간다. 해맑은 봄날 소백산 비로봉은 지척으로 다가있고, 눈 덮인 정상은 파란 하늘과 함께 눈이 시리다. 실개천 건너 군데군데 잔설이 쌓여있어 가끔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바람은 여전히 차다.
요즈음 절집은 어디를 가도 일 년이 다르게 새 단장이 한창이다. 달랑 부처님 제자를 모셔둔 나한전과 요사채 하나만이 초라하게 이방인을 맞아주던 그때와 달리 부석사 안양루를 모각한 누각이 탁 트인 하늘과 산등성을 기품 있게 바라보며 서 있고, 화려한 단청을 한 대웅전과 산신각이 새로 생겨났으며, 번듯한 요사채가 제일 높은 곳에서 위엄을 부리고 있다. 대웅전의 불경소리가 계곡을 울리고 낮선 이방인은 꼭 닫혀있는 대웅전 너머의 세상에 대고 부러운 마음 속 합장을 한다.
그렇게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리운 나한전을 찾았다. 그곳 나한전 문살은 옛 모습 그대로 이방인을 반기는데 카메라를 찾는 손이 설렌다. 정면 세 칸 맞배지붕의 튼실한 모습과, 살짝 배흘림기둥의 굳건함 가운데 소통으로 움직이는 문살에 눈길을 빼앗긴다. 특이한 것은 단아한 건물에 아름다운 문살을 조금 더 보여주기 위한 배려인 듯 기둥과 기둥사이에 벽체가 없이 곧바로 화려한 문을 달았다. 세 칸의 문살 중 왼편 두 매는 비꽃 문살을 달았으며, 오른편은 두 매는 왼편과 같은 비꽃살문과 모란꽃살문이 투각되어 어우러져 전체로 보자면 균형이 약간 기울어진 모습이다. 그러나 좌우의 퇴칸과 달리 작은 연못의 세상을 만들어 놓은 가운데 것에 가장 많은 눈길을 빼앗기게 되지만 욕심처럼 하나씩 정리하듯 애써 왼편의 문살부터 감상하기 시작한다.
문살은 대각선으로 서로 겹쳐지게 하고 세로로 한 줄을 세워 세 개의 긴 나무조각이 서로 맞물리도록 끼워 맞췄다. 그것이 이어지고, 부분으로 다듬은 둥근 선이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비꽃이 되었다. 이 모양은 비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바닥의 물과 만나면서 생겨나는 모습을 꽃으로 묘사해 놓은 것인데, 이것을 순 우리말로 비꽃이라 한다. 떨어지는 순간, 즉 찰라의 모습에서 무엇을 갈구하며 이토록 아름다운 형상을 조각해 놓았을까? 금방 사라지고 말 꽃을 영원히 이곳 문살에 담아서 어떤 교훈을 생에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불법佛法이 물처럼 흐르고,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나다 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생의 덧없음을 그리 표현해 놓은 것일까. 파도가 치고 난 뒤 번뇌가 사라진 마음에는 지난 모든 업과, 앞으로 지어질 업, 그리고 씻어야 할 업이 선명히 보여 해탈에 이른다는 해인海印에 버금가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만히 손끝을 문살에 대고 큰 숨을 몰아쉬며 어릴 적 우리초가집 처마에서 떨어지던 물방울을 기억해 낸다. 맞다! 그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었다. 갑자기 한기가 몰려온다. 어린 시절 대청마루에 턱 괴고 앉아 내리는 비를 청망스럽게 바라보던 그 시절, 삼각 런닝을 입은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초봄의 햇살은 구름에 들락거리며 앵글을 잡은 나를 농락하고, 맛있는 것은 아껴두고 나중에 먹는다는 평소의 버릇처럼 가운데 칸을 애써 지나치며 오른편 문살에 다가선다. 왼편의 문짝은 비꽃인데 오른짝에는 비꽃 위에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탐스러운 모란꽃을 화려한 자태로 피어냈다. 만든자의 장난일까? 그냥이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데 아무렴 생의 미련이 남아 욕심을 꿈꾸며 유혹하고 있는 것일까? 한 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고, 기어이 해답을 얻어내듯 내 나름의 편리한 결론에 이른다. 그것은 마치 인생에 있어 불법佛法을 따르면 고통 없이 편안하고 태평세월을 그렇게 살 수 있다며 조곤조곤 이야기 하고 있었다.
투각기법은 양감의 느낌을 최대한 살렸고, 그 위에 최소한의 채색으로 마감을 해 놓았다. 가볍게 보자면 화려한 꽃밭에서 행복을 즐기며 없는 듯 놀다가라는 뜻이며, 좀 더 심각하게 논해보자면, 불법의 향기가 온 세상에 널리널리 퍼져서 고통을 받는 중생이 단 한명도 없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더불어 찰나의 비꽃위에 올렸으니 그것이 인생이며 덧없음이니,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 성실히 행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나를 되돌아보며 연한 바람에도 흔들리는 약한 심지를 자책하고, 악착같은 삶을 살고 있는 저급한 인생을 잠시나마 반성하며 눈길을 거둔다.
이제 애증의 시선으로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문살로 눈을 옮긴다. 화려한 문살에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전체를 보면 작은 연못을 표현해 놓았는데 이것은 한편의 드라마요, 수많은 이야기를 던지고 있음이다. 중앙 두 매의 문짝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데 각각 네 매의 판자를 이어서 하나의 문살을 만들고 그 아래 빗살문으로 견고하게 끼워 맞추었다.
투각으로 된 문살은 연못에 연꽃과 연잎이 이렇게 저렇게 소담스럽게 피어있고,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는 새와, 조가비를 입으로 쪼는 학, 그리고 여유롭게 거니는 또 하나의 학, 하늘에서 막 내려오는 학, 한 마리의 작은 용, 여러 모양의 물고기와, 연잎에 폴짝 뛰어오른 두꺼비, 어디를 열심히 오르는 게, 그리고 아래에 물살을 가르며 유영하는 물고기들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연잎 꽃잎 또한 활짝 편 것, 막 피어나는 것과 오그라들고 있는 각양각색의 모습은 잔잔한 풍경 속에 부산한 움직임들이 있으니 내 마음처럼 찾아보기가 바쁘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연잎에 올라앉아 연꽃가지를 안고 있는 동자의 모습이다. 소년일 수도 있고, 소녀일 수도 있는 작은 요정이 또 다른 자신의 세상을 빤히 들여다보는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을 건넨다.
“뭐가 그리 궁금하세요?”
할 말을 잊었다. 진흙 속에서도 빼어난 자태를 드러내는 연꽃이 만발하고, 청결하고 신성한 모습에 빠져든다. 살짝 살짝 간을 보듯 입혀놓은 색상은 질감과 양감이 확연히 살아나고, 어쩌면 꽃이슬을 머금어 내 마음 속에 한 방울 똑 떨어트리는 청량한 미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청령화성의 소리가 내 마음을 비집고, 이 모습은 아무리 악한이라도 처연한 감성의 본성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힘이 도사리고 있음이다. 그리고 나 또한 그로인해 마음이 맑게 개고 지난날의 작은 소망들이 되살아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다분히 내 감성의 사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고, 우리 민속적 해석을 가미해 보자. 학이란 평화로운 삶과 무병장수를 뜻하는 것이며, 두꺼비는 대식가이다. 또한 두꺼비는 집지킴이이며, 은혜를 갚고, 재복을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 인간들의 소망 한 자락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부정적 시각도 있다. 원래는 툭 튀어나온 눈, 울퉁불퉁한 등껍질의 모습이 아니었다. 시쳇말로 잘생기고 멋진 까도남 모습이었는데, 욕심이 많아 하늘에서 불사약 두 개를 몽땅 삼켜버려 지위를 박탈당하고 지금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쓰라린 설화가 있다. 그것으로 인해 욕심 많은 양반계층의 이미지를 동시에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서민들의 비 권위적 사상과, 친밀한 감정과 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동시에 담고 있으니 친근한 모습으로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또한 물고기, 즉 잉어는 알을 많이 낳는다. 이것은 다산의 상징이며 노동의 원천인 식구가 늘어나게 되는 당시 사회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훌륭한 존재로 비유되는 용龍 또한 비를 관장하며 하늘에서 풍운을 일으키니 농경사회에서 꼭 필요한 믿음의 상징이 되는 것이며, 불교에서는 불법을 수호하는 상상의 동물로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유일한 갑각류인 게는 등껍질이 딱딱하여 갑甲, 즉 천간(天干)혹은 십간의 첫째라 장원급제를 이루라는 희망이 담겨있는 것이니 우리들의 소망들이 몽땅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이며, 우리 민속신앙과 불교가 자연스럽게 접목되는 현장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심성이 유순한 민족만이 이룰 수 있는 힘이며, 지혜라고 할 수 있다.
한편의 문살에 이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며 감정의 기복과 내 응어리진 삶의 찌꺼기들을 쉼 없이 몰아내니 숨이 가쁘다. 기왓골에 녹지 않은 눈들이 빛을 발하고, 새봄은 지루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된다. 그리고 뒤돌아서 내려오는 계단 아래 좌·우로 이형석등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석등이란 부처님 세상을 환하게 비추며 불법이 온 세상에 널리 비추라는 상징적인 의미와, 절집 마당을 밝히는 실용적 용도로 쓰이는 것인데, 팔각의 정형화된 석등이 아니라 거북의 등에 꼬불꼬불 꽈리를 튼 용이 부처님 품속을 파고들 듯 어리광으로 간주석을 대신하고, 그 위에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올렸다. 늦은 조선의 작품이지만 잔잔한 익살이 주는 아름다움과 그것으로 느끼게 되는 행복감은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불법을 수호하는 수문장 역할을 동시에 하면서 저리도 무표정할까 싶다. 문살에 과도한 정을 주고 난 뒤 소품으로 맛스럽게 연결 해 놓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나한전 안에서 어느 보살이 울어대는 불경소리가 들려온다. 운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으나 불안한 심정이 되어 한 없이 칭얼대는 목소리였다. 문득 남산동 도루메기 막걸리집에서 만난 어느 선생님이 들려준 말이 생각난다. 우가풍가雨家風家라 했던가? 참 힘든 세상을 살다보면 온갖 풍파 다 겪는다는 말이지만, 세상사란 그저 연약한 바람인 것인데 무엇이 한스러워 저토록 서럽게도 풀어내는가 싶었다. 그 소원이 무엇인지 부디 성취하시길 마음으로 빌며 그렇게 발길을 돌린다.
감사하며 내려오는 길에 가슴인양 고이 담아놓은 카메라를 보듬어 안는다. 화면을 켜고 다녀온 그것의 향연을 다시 한 번 감상하는 맛을 나는 안다.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 277
긴 글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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