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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한옥순 첫 시집『 황금빛 주단』

by 丹野 2011. 5. 11.

 

 

한옥순 첫 시집『 황금빛 주단』

 

 

한옥순 첫 시집『 황금빛 주단』 도서출판 원애드 2011

 

해설 / 나호열-나이테, 사슬을 풀어내는 나무의 노래

 

 

 

 

自序

 

 

미련처럼 꼭 잡고 있던 탯줄 같은

끈을 이제야 끊는다

아직 미완성인 이것들,

호적에 올리듯 한 놈 한 놈

詩라는 이름으로 묶는다

마음 가뿐할 줄 알았는데 어제보다 더 부끄럽고

두렵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 진 일,

거꾸로 가는 생이 없듯이

이젠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잘 가라

못난 자식 같은, 못 생긴 애인 같은 나의 문장이여

가난하고 쓸쓸한 내 열등감의 그림자여

자유롭게 떠나라

떠나선 어딘가에라도 닿게 되면

부디 슬프지 않은 풍경으로 피어나라

아프지 않은 사랑으로 피어나라

뒷 소식은 묻지않을 거다 다만

귀퉁이 닮은 종잇장 같은 가슴 벽에다

생전 지워지지 않는 잉크빛 지문으로 새겨두겠다

 

아랫배가 휑하니 허전하고 아리다

절벽 위에 선 듯 어지럼증까지 인다

알 수 없는 무늬가 얼룩처럼 군데군데 남은 채로..

 

달콤한 꽃잠에 들어 화르르 시(詩)꿈이나 꾸고 싶다

 

 

  이천십일년 오월 한 옥 순

 

 

 

 

      시인 한옥순은 부동 不動의 나무와 같다. 현실을 떠나서 살 수 없으나 몽유 夢遊는 가능한 까닭에 그 나무에는 수많은 칼집이 아로새겨져 있다. 나무는 부동이지만 뿌리는 흙을 움켜쥐며 물을 찾아 움직이고 있고, 그가 보았던 요동치며 흘러갔던 사람들과 풍경과 바람과 폭풍우의 기억은 소리 없는 아우성, 나이테로 자신을 친친 동여매고 있다. 『 황금빛 주단』에는 이와 같은 기억이, 아픔이 가득하다. 아직은 낭창낭창한 줄기며, 가지들이 허공에 흡반吸盤처럼 매달려 있는 잎들이 한옥순의 시이다. 꽃인가 싶으면 낙엽이고 낙엽인 듯 싶으면 열매로 떨어지는 시들이 우리의 마음으로 내려올 때 삶의 이면을 돌아나가는 야멸찬 인정과 고뇌에 손을 내밀며 강철이 되어버린 심장을 다시 부들부들한 인간의 심장으로 되돌리고 싶은 감정의 역류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시집 『 황금빛 주단』은 바로 우리가 잊었던 외면했던, 불편했던 우리의 이야기이다.             - 나호열

 

 

 

 

황금빛 주단

 

한옥순

 

 

 

저녁 무렵, 베란다로 이어지는 주방문이 수상쩍다

누군가 꼭 서 있을 것 만 같은 묘한 기색이 들어

문을 살그머니 열었더니만

이런 세상에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황금빛 주단이 발아래로 깔린다

그 한 자락을 끌어당기려 해도 도저히 잡을 수가 없어

그냥 깔아 둔 채로 멍하니 서 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가 그 위에 누워본다

엎치락뒤치락 거리니 온 몸에 휘휘 감겨온다

비단을 두른 양 부드럽고 따순 기운에 눈마저 감긴다

꿈을 꾸듯 황홀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

서서히 몸이 식어가는 느낌이 들어 눈을 뜨니

어느새 몸에 감겼던 비단이 스르르 흘러내리고 있다

흘러내려가는 비단은 벽을 타고 창을 넘어 가고 있다

아름다운 주단을 깔아주고 간 이는 누구일까

이내 황홀한 기운을 다시 걷어가는 이 누굴까

고맙다고 해야 하나

서운타고 해야 하나

내일 이맘때엔 소쿠리라도 하나 놓아두어야 할까보다

 

 

 

 

 

아름다운 인생

 

한옥순

  

 

빈집 마당에 홀로 대문을 바라보는 감나무

감나무가지 사이에 줄을 치는 거미

감꽃송이에 살며시 앉는 나비 한 마리

빈집 건너편에 등이 굽은 미루나무

그 나무 허리에 매달린 녹슨 자전거

미루나무 우듬지에 둥지를 트는 까치

늙은 나무 밑둥에 전기톱날이 박히고

연주가 시작될 기미를 보이는데

나무 그림자 아래 이삿짐을 푸는 달팽이

 

 

 

봄날 같은 인생이다 

 

 

 

 

 

꽃이 피면 너를 잊겠다

     

한옥순


 

 

꽃이 피면

나는

너를

잊어야 겠다 

 

  

청춘의 빛으로 물든 꽃을 보면서

젊은 날 내 흰 치맛자락에

치자꽃빛 노을로 물들이던 너를

기어이 잊어내고야 말겠다

 

 

사방천지 흐드러진 꽃에게

내혼을 던져줄 수 있다면 

그때엔 

너를 잊을 수 있지 않느냐 

 

모진 겨울 다 이겨냈는데

모진 네 생각쯤이야

다시 못 이기겠느냐

못 이겨내겠느냐 말이다

 

 

꽃이 피면,

꽃을 꺾어 놀다보면

너도 나를

나도 너를 반쯤이야 잊어가질 않겠느냐

 

청춘아, 붉디 붉던 내 청춘아

 

 

사이

 

한옥순

  

창경궁 통명전 뒤편 진달래꽃 나무아래에서

할머니 셋이 앉아 옛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옥천교 옆 앵두꽃 흐드러지게 핀 잔디밭에

비둘기처럼 앉은 노인이 어제 날짜의 신문을 들추고 있네

 

하늘과 땅 사이에 가깝고도 먼 바람이 불고

그 바람결에 절정인 꽃잎들이 흩날리어 비로 내리니

반나절 사이에 대지는 아롱아롱 저승꽃을 피우네

새들이 앉았던 자리에도 그림자 꽃이 피었다 지네

 

꽃이 피고 지는 일이나

우리네 인생살이나

절정이란 건

단 한번이면 족하지 않겠나 싶네

 

봄꽃에 홀리는 사이

봄날은 슬그머니 지나가네

그 일이 아침과 저녁 사이만큼이나

순식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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