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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스크랩] 사랑하는 내 딸아 - 다산 정약용의 매화쌍조도

by 丹野 2011. 4. 30.

정치가 어지러운 시절이라고 합니다.

민생의 고통은 가중되고 그 고통을 개선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경찰의 방패와 법 앞에 무릎 꿇기를 강요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은 잘 보이지 않고 앞으로 더 어려워지거라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정치가 어지럽고 국민들이 생활이 힘겨워질 때마다 저는 늘 다산 약용 선생님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백성의 삶을 돌봐야 하는 관리로써, 책 읽는 선비로써 백성에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단 한 시절도 포기하지 않았던 그 태산 같은 책임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정치가와 관리로써의 정약용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인간적인 내면의 모습과 예술적 진면목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다산에 대한 많은 연구물과 대중서들 이 발표되어 차츰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닌 살아 숨쉬는 인물로 느껴지고는 있으나 아직도 많은 분들이 그가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이고 개인적으로 얼마나 크나큰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만 했던 인물인지 잘 알려져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하고 싶은 그림은 바로 다산이 얼마나 따뜻한 인간미를 가지고 있고 넘치는 서정을 가진 분인지를 확인시켜주는 그림입니다. 그림의 제목은 이름 붙인 분들 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매화병제도(梅花倂題圖), 매화쌍조도(梅花雙鳥圖) 라는 이름이 제일 많이 불리는데 저는 미술사학자 고 오주석님의 표현인 매화쌍조도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비단에 채색, 44.7 x 18.5 cm, 고려대 박물관

 

말이 그림이지 큰 화면에 대부분은 글씨로 채워져 있고 1/3도 안 되는 상단에만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기 전에 우선 다산 정약용의 그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정약용은 한강의 부교를 만들고 수원 화성을 건설하는 건축계획서를 썼으며 거중기라는 신 기계를 발명 했을 정도로 매우 공학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오주석 미술사학자의 [옛 그림읽기의 즐거움2]에 다산의 회화를 대하는 태도를 가름할 수 있는 내용이 있는데 정조가 하사한 김홍도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부채에 대한 다산의 기록입니다.

 

이 부채는 접으면 한 손에 들어오지만 펼치면 석 자나 된다. 화면 가득 연꽃을 그렸는데 활짝 핀 것이 한 쌍이요, 봉긋하니 필 듯하면서 채 피지 못한 것이 셋이다. 잎이 싱싱한 것이 다섯이요, 겹치게 처리해서 반쯤 가려진 것이 셋이요, 시들어 수그러진 것이 하나요, 위로 말려 올라간 것이 둘이다. 고운 오리는 물살을 가르며 가는 놈이 한 쌍이요, 잠든 놈이 하나요, 부리를 날개에 박고 깃을 고르는 놈이 하나다. 대저 김홍도의 작품이다.

[임금께서 하사하신 연꽃 부채의 모양을 적은 글] 다산.– 옛 그림의 즐거움 2에서 인용

 

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기술적인 문체입니까? 그림 서술을 마치 어떤 물건을 기록해 놓듯이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기계공학자가 기술해 놓은 듯 그림을 이렇게 기록한 것을 볼 때 그는 정말 회화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재 남겨진 그의 그림들을 보면 비록 전문화가의 솜씨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솜씨가 여타 문인화가 못지 않는 수준을 보여줍니다.

 

  

정약용의 산수화. 좌측 동아대박물관 소장, 우측 서강대박물관 소장

유배생활 또는 그 이후에 그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그림인데 이상향을 갈망하는 그의 마음이 잘 전해지는 그림이다. 유배생활이 얼마나 그를 고단하게 했는지 짐작하게 된다.

 

매화쌍조도의 구도는 단순합니다. 우측 상단에서부터 내려온 매화 가지에 새 두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비록 꽃이 피어 있지만 매화는 매우 핍진한 느낌을 줍니다. 그 새들의 머리 위에는 마치 그들을 보호하는듯한 가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입을 벌리고 노래하는듯한 새들은 보호본능이 생길 만큼 매우 작게 그려져 있고 갈필로 그려진 나무들로 인해 전체적으로 애잔한 느낌을 줍니다.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아래 글을 읽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큰 글씨로 써진 부분은 4언 절구로 쓰여진 시()이고 그 뒤 작은 글씨는 그림을 그리게 된 연유가 적어 놓았습니다.

 

시 부분을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

 

편편비조(翩翩飛鳥) 식아정매(息我情梅펄펄 나는 저 새가 우리 집 매화 가지에서 쉬는구나

유렬기방(有烈基芳) 혜연기래(惠然基來) 꽃다운 그 향기 짙기도 하여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다

원지원서(爰止爰棲) 락이가실(樂爾家室) 여기에 올라 깃들여 지내며 네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

화지기영(花之旣榮) 유분기실(有賁基實) 꽃이 이제 다 피었으니 열매도 많이 달리겠네

 

이 시에 대한 설명은 정민 교수님의 한시이야기 라는 책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4언 절구는 우리 시에 자주 사용되는 방법은 아니었다 합니다. 보통 5얼 절구나 7언 절구가 보통 사용되었는데 이렇게 4언 절구를 사용하여 시를 쓴 이유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4언 절구로 사용된 대표적인 시집이 바로 2500년 전 고대 중국의 시집인 [시경] 이란 책이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시경]은 중국이나 조선에서나 글 읽는 선비들이 반듯이 익혀야 하는 필수 교과서입니다.

 

또 시경에 이 시와 비슷한 구절이 있는 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아가위꽃> 이란 시입니다. <아가위꽃>은 옛날에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여 잔치하면서 부르던 노래였다고 합니다.

 

아내와 자식이 정답게 지내는 것이 마치 금슬을 연주하는 것 같아도,

형님과 아우가 화목해야만 즐겁고 기쁘다고 할 수가 있다.

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그대의 처자식을 즐겁게 해 주어라.

이렇게 하려고 애를 쓴다면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아가위꽃> 中 에서

 

위 구절 중에 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라는 구절이 바로 정약용의 시 중 네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아마 정약용의 시를 읽으면서 바로 시경의 <아가위꽃>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바로 정약용의 시는 가족의 화목과 부부간의 금술을 당부하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전 시의 표현을 빌려와 자신의 생각을 담는 것을 한시에서는 용사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림과 시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뒤에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적은 관지를 읽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강진으로 귀양 온 지 여러 해가 되자 부인 홍씨가 낡은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는데 해가 묵어 붉은 색이 다 바랜 것이다. 이것을 오려서 서첩 네 책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작은 족자를 만들어 딸아이에게 준다.

가경 16(1813) 초가을(7)에 다산의 동암에서 쓰다.

 

그렇습니다. 귀양생활은 시작하지 13년이나 지났지만 그 당신 부인이 남편을 만나서 먼 곳을 오고 갈 수 있는 환경은 안되던 시절. 부인은 자신이 시집올 때 입고 온 치마를 멀리 있는 남편에게 보냅니다. 다산은 그 빛 바랜 옷을 받아 들고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을까요?

 

하지만 다산은 실용주의자답게 그 옷을 쓱쓱 잘라 공책처럼 만들어 두 아들에게 편지를 적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천으로 딸에게 주는 그림을 그리고 시경을 싯구를 빗대어 시 한 수를 적어 보낸 것입니다.  색 바랜 치마로 만들었다는 뜻의 하피첩은 이렇게 탄생되었습니다.

 

다산은 슬하에 6 3녀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4 2녀를 대부분 천연두로 잃고 이 글을 쓸 당시에는 21녀만 남아 있었습니다. 금쪽 같은 자식들이 천연두로 죽어가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파 천연두를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마과회통> 이란 의학서까지 저술 할 정도로 자식들의 죽음은 그를 매우 아프게 했습니다. 그런 위기를 넘어 살아남은 자식들에게 얼마나 아버지로써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겠습니까?

 

그 중에서도 아들들이야 먼 귀향 지까지 가끔 오고 가기도 했으나 귀양살이 이후 한번도 보지 못한 딸이 한 해전에 혼사를 치른 것도 보지 못했으니 딸아이가 얼마나 눈에 밟혔을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인데 혼사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딸에게 얼마나 미안하고 또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 딸에게 어머니의 빛 바랜 치마에 이제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뤘으니 행복하게 살라는 당부를 두 마리의 꾀꼬리가 정답게 지저귀는 그림으로 그려준 것입니다.

 

 

, 이 그림을 받아 들은 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마 이 그림을 받아 들고 아버지가 너무 그립고 안쓰러워 펑펑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림은 단순한 구도, 아마추어적인 붓질 등으로 그리 잘 그렸다고는 볼 수 없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림의 내용과 동기를 살펴보면 참 많은 생각을 갖게 만드는 그림입니다. 역시 좋은 그림은 기술적으로 뛰어난 그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감상자에게 전달되면 그 그림이 좋은 그림 아니겠습니까?

 

저는 한편으로는 낡은 치마를 남편에게 보낸 부인 홍씨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부인에게는 일언 반구도 없이 그 치마를 잘라 자식들에게만 글을 보낸 다산의 마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다산은 15살 되던 1776년 2월 22 풍산 홍씨와 결혼하여 60년을 해로합니다. 그리고 부부의 60주년 회혼일인 1836년 2월 22 회혼을 기념하는 시 한 수를 남기고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 친지들 속에서 숨을 거둡니다.

 

육십 년 세월, 눈 깜빡 할 사이 날아갔으니

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 같구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이 늙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이 밤 목란사 노래 소리 유난히도 좋으니

옛날의 하피첩은 먹 흔적이 아직 남았소

나뉘었다 다시 합함은 참으로 우리의 모습

한 쌍의 표주박을 남겨 자손에게 주노라

-회혼시- 다산 정약용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외쳤던 다산이 죽음을 앞두고도 이렇게 다정스런 시를 썼다니 그 분이 얼마나 넓은 가슴을 가진 분인지 알 것 같습니다. 바로 자식과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의 기초가 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운명을 개척해나갔던 인물들은 전부 가족과 사회를 분리하지 않았나 봅니다. 젊은 시절 자신의 가난으로부터 빈곤이 개인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나라의 구조적인 문제임을 갈파하여 평생 백성의 살림살이 걱정에 밤 잠 못 이뤘던 다산 정약용. 600권이 넘는 여유당 전서에 실린 주옥 같은 산문과 연구서들을 쥐꼬리만큼이나마 읽어보면서 우리 시대에 진정 사회를 아파하는 지식인들이 얼마나 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배해제가 결정되었으나 의도적으로 석방시키라는 공문을 보내지 않아 몇 년 동안이나 유배지에 계속 갇혀있는 아버지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큰 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의미 있는 구절이 있어 함께 읽어보는 것으로 글을 마칠까 합니다.

 

...사람이란 때로 물고기를 버리고 곰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삶을 버리고 죽음을 택할 때도 있다………내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운명이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운명이다...

- 학연에게 답한다(1816년 5월 3)

 

삶과 죽음 하나이고 모든 것은 운명이라는 어느 분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정녕 폐족의 마음은 다 이런 것이란 말입니까?

 

읽어볼 만한 도서

옛 그림익기의 즐거움 2 - 오주석

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 - 정민

뜬 세상의 아름다움(정약용 산문선) - 박영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상,하 - 이덕일

내 아들딸에게 아버지가 쓴다 - 허경진

  

 

2009 . 6 . 16

 

 

금강안金剛眼

출처 : 우회전금지
글쓴이 : 금강안金剛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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