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읽기 – 육법에 대하여
모든 예술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그림이나 음악도 감상자에 따라 좋기도 하고 전혀 감동을 받지 못 할 수도 있으며 혹은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주관적인 예술작품에서도 잘된 그림, 부족한 그림 등등 의 평가는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러한 평가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그 예술작품의 격의 차이가 있기에 가능할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작품을 많이 감상하려면 감상자 스스로가 작품을 이해도를 높이는 노력을 해야만 하며 그 이해도는 누가 대신해줄 수도 없고 오직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이뤄지며 특히 어릴 적부터 직접 그려본 경험이 없는 옛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제가 옛 그림을 좋아하고 감상하면서 한가지 생긴 의문은 과연 어떤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이라고 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미술사가나 평론가가 잘 그렸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제가 보아도 잘 그렸다고 생각되지만 제 스스로 그림을 품평하는 기준이나 방법을 갖고 있지 않기에 타인의 품평에 많은 부분 의지할 수 밖에 없었으며 지금은 처음보다는 약간 나아졌지만 아직도 저 스스로만의 그림 보는 눈을 갖는 경지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부분은 미술사가나 서화비평가들 중에서도 작품을 평가할 때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서양미술보다는 상당히 평가가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동양화를 보는 관점에 있어서 그림의 화격을 평가하고 품평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 원칙이 있으며 이는 아주 오랫동안 내려져왔기에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림을 품평함에 있어 동양화를 보는 기준으로 가장 많이 일컬어지는 육법화론에 대해 정리해 보려 합니다.
<육법화론>이란 말이 처음 사용한 사람은 중국 남북 조 시대 남조 제 나라의 화가였고 초상화 특히 화장한 여인네를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는 화가 사혁(謝赫)이 그의 저서 '고화품록(古畵品綠)’ 제 1권 머리말에 적혀 있습니다. '고화품록’ 이란 책은 원래는 화품畵品이라고 불렸으나 송 대(宋代)에는 〈고금화풍 古今畵風〉이라 했으며, 현재의 이름은 명 대(明代) 출간 본에 의해 정해진 것입니다.
이 책은 오 나라의 조불흥으로부터 남조 제 나라 말기의 화가까지 27인의 화가를 제1품에서 제6품까지 나누고 짧은 평론을 덧붙인 화론집인데 이 책에 서문에 회화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언급했고, 후대에 매우 큰 영향을 준 '6법론'(六法論)에서 인물화의 창작과 품평에 있어서 꼭 있어야 할 6가지 법칙을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럼 육법화론을 본격적으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기운생동(氣韻生動): 정신성의 표현방법을 말하는데 대상의 형태, 기질, 성격이 생생하게 표현되고 작가의 주관적인 개성과 정신력의 기품, 즉 생명력을 표현하는 화법입니다. (생명감, 운동감, 정신감, 감정표현). 사혁의 육법화론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라 맨 나중에 추가로 설명해보겠습니다.
2. 골법용필(骨法用筆): 회화의 중요한 표현수단인 붓의 사용에 관한 예술적 기법으로 결구(結構) 혹은 운필 방법을 말합니다. 운필에 의하여 나타나는 형태 속에 골격을 형성시키는데 이는 변화 많은 먹색의 세밀한 톤과 여백의 표현에 의하여 자아내게 되며, 사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내면을 포착하는 화법입니다. (필법, 필세, 터치)
3. 응물상형(應物象形): 사실적인 표현 방법을 말하는것인데 사생 즉 묘사를 뜻합니다. 대상을 직접보고 사실적인 형체를 중시하여 사생하는 것으로 이는 형태상의 사실, 즉 형사를 위주로 하는 화법을 말한다. (소묘, 사실 표현, 사생, 스케치)
4. 수류부채(隨類賦彩): 색채 혹은 명암법을 말하는 것으로 색체의 표현을 뜻합니다. 대상의 종류에 따라 색채를 각기 달리하여 칠하는데 먹색에 오채가 있다고 하여 먹의 농담표현도 이에 포함됩니다. (색채, 채색, 농담)
5. 경영위치(經營位置): 구도 및 위치 설정법을 말하는 것으로 구도를 뜻합니다. 화면을 살리기 위한 여러 가지 형상의 배치를 뜻하는 배치 법을 말합니다. (구도, 구성)
6. 전리모사(傳移模寫): 사물의 모방법을 말하는데 임화를 뜻합니다. 묘화의 기법을 수련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화법의 묘사를 통하여 체득하는 것으로 언제나 새로운 창조는 전통의 완벽한 습득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임화, 연습)
사혁의 육법화론을 처음 읽어보았을 때 2~6번까지의 화법에 대해서는 크게 어려움이 없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육법화론의 가장 핵심이라는 기운생동의 의미에 대해서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때론 모호하기도 하여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는데 기와 운이란 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고 관계가 있는 건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쉽게 이해하려면 기운생동을 이해하는 세가지 부류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기운생동’이란 살아있는 즉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옛날에 산수화가 발전하기 전에 그림의 주제는 주로 신선, 부처님을 비롯한 인물화가 주종이었습니다. 따라서 인물화를 그릴 때 얼마나 살아있는 것처럼 그리는가가 중요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기운생동’은 생명력, 운동감등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남북조시대부터 당나라까지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던 모양입니다.
둘째는 송나라 때 유명한 품평가였던 곽약헌의 [도화견문지]에 “기운생동이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인품이 좋아야 나온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견해는 예술작품은 어찌되었건 예술가로부터 창조되어지기에 예술가의 품성과 인격이 좋은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약간은 철학적인 내용입니다.
예술에서의 기는 모든 형상의 기본근간에 위치하며 인간의 내면에 위치한 인간의 그릇(器)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인데 마음을 주체로 보며 만물은 마음의 투영이며 마음은 만물의 존재 근거로 보는 것이며. 자신의 본심을 철저히 깨닫는 것입니다.
회화의 형상화 과정 중 마음을 스승으로 삼아 기운으로 그린다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경계를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창작과정을 거쳐 완성된 그림은 오묘한 감동을 감상자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견해는 매우 오랫동안 지배했습니다. 무려 송나라 때부터 청나라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동양의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마음을 닦는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명경수지 같은 마음의 고요를 얻은 후에야 비로서 붓을 들었나 봅니다.
세 번째 견해는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이어지는 시기에 견해인데 아주 잘 그린 그림이 ‘기운생동’한 그림이라는 기술적인 견해입니다. 아주 재주가 뛰어난 화가가 그린 것을 보면 정말 살아있고, 꿈틀 되는 무엇이 있으니 기술에서 ‘기운생동’이 나온다는 기술론인 것입니다.
기운생동은 지금까지도 해석에 대한 새로운 논문이 발표될 정도로 매우 어려운 주제입니다. 저는 이 세가지중 어떤 것이 가장 정확한 정의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 세가지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 바로 기운생동이 아닐까 합니다.
한가지 확실한 건 ‘기운생동’이란 주제는 마음을 중시하는 중핵을 이루어온 동양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며 이른바 마음을 중시하는 경향은 동양회화의 가장 큰 특징, 이른바 영혼의 예술, 사상적 예술이라는 특징의 뿌리입니다.
또 기운생동은 단지 인물이나 동물 즉 생물에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닌 산, 들, 바다 등 모든 자연을 하나의 살아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동양사상과 맞물려 산수화 및 화초도나 산수도에서도 적용될 만큼 폭 넓은 개념이며 더 나아가 화가의 인격의 문제로까지 확장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미술사가인
따라서 화가는 창작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완전히 일치 될 때까지 온 기력을 집중해야 하며 그 대상의 상(象)이 충분히 마음속에 떠올랐을 때 그것을 그리기 시작해야 합니다.
동양의 氣의 사상은 동양예술의 이론적 자각으로 氣를 기르는 예술은 마음의 기술과 밀접하게 관계 되어 있으며 붓을 사용함에 있어 가슴속에 응집된 심상에 몰두함으로 붓과 뜻이 하나 되고 무의식 중에 심상이 옮겨져 뜻 가는 대로 맡겨두는 심수필운(心隨筆運)의 실현이야말로 진실 된 창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선, <박연폭> 비단에 수묵, 119.5 X 52.2 cm 이우복소장
그림을 보는 순간에 쏟아지는 폭포의 장대한 물줄기와 그 소리로 인해 귀가 멍멍해지지 않나요?
장대한 폭포, 육중한 바위와 밑에 조그만한 인물들을 비교해보세요. 자연에 대한 겸재의 겸손함이 느껴지지 않는지요? 화가의 품격과 뛰어난 기술이 만나 살아넘치는 기운을 창조해내는 '기운생동' ... 이런것이 바로 기운생동 아닐까 합니다.
옛부터 우리에게는 어떤 큰일을 앞두고 몸을 정갈히 하는 풍습이 남아있고 아낙들이 치성을 드릴 때 사용하는 정한수는 새벽에 깨끗한 곳에서 떠온 물로만 사용했을 정도로 자기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바램과 그 바램이 이루어지는 결과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했기에 옛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이 좋은 작품을 남기기 위해 얼마나 자기자신을 엄하게 채찍질 했을지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감상하며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림들은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부단한 노력과 고귀한 정신세계의 결과물이며 따라서 감상자가 그런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화가들의 고매한 품격과 인격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혁의 육법화론은 단순히 그림을 품평하기 위한 방편뿐 아니라 왜 오늘날 진실로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고귀하게 만들어 나가야만 하는지를 알려주는 인생지침서와 다름없는 것 같습니다.
2006. 8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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