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의 "승무(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출전 : '문장' 11호(1939. 12)
시 「승무(僧舞)」의 시작 과정 / 조지훈
이제 나는 한 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에는 어떠한 과정을 밟는가 하는 데 대해서 졸시 「승무(僧舞)」의 작시 체험을 말함으로써 시의 비밀을 토로하겠다.
내가 승무를 시화해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기는 열아홉 때의 일이다. 나는 이 승무로써 나의 시 세계의 처녀지를 개척하려고 무척 고심하였으나 마침내 이보다 늦게 구상한 「고풍의상(古風衣裳)」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난산(難産)의 시를 회잉(懷孕)하기까지 나는 세 가지의 승무를 사랑하였다. 첫 번은 한성준(韓成俊)의 춤, 두 번째는 최승희(崔承喜)의 춤, 세 번째는 어떤 이름 모를 승려의 춤이 그것이다.
나는 무용비평가가 아니므로 그 우열을 논할 수 없으나, 앞의 두 분 춤은 그 해석이 나의 시심에 큰 파문을 던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승무에의 호기심을 일으켜 몇 번의 기녀가 추는 승무에까지 이끌려갔던 것이니 승무를 시화케 한 최초의 모멘트가 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참 승무를 보기는 열아홉 살 적 가을이다. 그 가을 어느 날 수원 용주사(龍珠寺)에는 큰 재(齋)가 들어 승무 밖에 몇 가지 불교 전래의 고전음악이 베풀어지리라는 소식을 거리에서 듣고 난 나는 그 자리에서 곧 수원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밤 나의 정신은 온전한 예술 정서에 싸여 승무 속에 용입(溶入)되고 말았다.
재(齋)가 파한 다음에도 밤늦게까지 절 뒷마당 감나무 아래서 넋없이 서 있는 나를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시정을 느낄 땐 뜻 모를 선율이 먼저 심금에 부딪힘을 깨닫는다. 이리하여 그 밤의 승무의 불가사의한 선율을 안고 서울에 돌아온 나는 이듬해 늦은 봄까지 붓을 들지 못하고 지내 왔었다. 춤을 묘사한 우리 시가로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이 아직 없을 때이라 나에게는 오직 우울밖에 가중되는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이 한 마디의 언어, 한 줄의 구상도 찾지 못한 채 막연한 괴로움에 싸여 있던 내가 승무를 비로소 종이 위에 올리게 된 것은 내 스무 살 되던 해의 첫 여름의 일이다. 미술전람회에 갔다가 김은호(金殷鎬)의 「승무도(僧舞圖)」 앞에 두 시간을 서 있은 보람으로 나는 비로소 무려 78매의 스케치를 가질 수 있었다. 움직임을 미묘히 정지태로 포착한 이 한 폭의 동양화에서 리듬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발견이었으나, 이 그림은 아마 기녀의 승무를 모델한 성싶어 내가 찾는 인간의 애욕과 갈등 또는 생활고의 종교적 승화 내지 신앙적 표현이 결여되어 그 때의 초고는 겨우 춤의 외면적 양자(樣姿)를 형성하는 정도의 산만한 언어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그림을 통해서 내가 잡지 못해 애쓰던 어떤 윤곽을 잡을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이 초고를 몇 날 만지다 그대로 책상에 버려둔 채 환상이 가져오는 소위 시수(詩廋)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 승무로 인하여 떠오르는 몇 개의 시상을 아낌없이 희생하기까지 하였으나 종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용주사의 춤과 김은호의 그림을 연결시키고도 왜 시를 형성하지 못했던가? 이는 오직 춤을 세밀하게 묘사하면 혼의 흐름의 표현이 부족하고 혼의 흐름에 치중하면 춤의 묘사가 죽는, 말하자면 내용과 형식, 정신과 육체, 무용과 회화의 양면성을 초극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것을 초극하고 한 편 시를 만들기는 또 다시 몇 달이 지난 그 해 10월 구왕궁(舊王宮) 아악부(雅樂部)에서 「영산회상(靈山會相)」의 한 가락을 듣고 난 다음날이었다. 아악부를 나서면서 나는 몇 개의 플랜을 세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시를 이루는 골자가 되는 것이다.
먼저 초고에 있는 서두의 무대묘사를 뒤로 미루고 직접적으로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을 그릴 것,
그 다음, 무대를 약간 보이고 다시 이어서 휘도는 춤의 곡절로 들어갈 것,
그 다음, 움직이는 듯 정지하는 찰나의 명상의 정서를 그릴 것, 관능의 샘솟는 노출을 정화시킬 것,
그 다음, 유장한 취타(吹打)에 따르는 의상의 선을 그리고 마지막 춤과 음악이 그친 뒤 교교한 달빛과 동터오는 빛으로써 끝막을 것.
이것이 그 때의 플랜이었으니 이 플랜으로 나는 사흘 동안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여 스무 줄로 한 편의 시를 겨우 만들게 되었다. 퇴고하는 중에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장삼의 미묘한 움직임이었다. 나는 마침내 여덟 줄이나 되는 묘사를 지워버리고 나서 두 줄로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라 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나는 전편 15행의 다음과 같은 시 하나를 이루었던 것이다.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臺에 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煩惱는 별빛이라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合掌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三更인데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오래 앓던 작품을 완성하였을 때의 즐거움은 컸다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처음 의도에 비해서 너무나 모자라는 자신의 기법에 서글픈 생각이 그에 못지 않게 컸던 것도 사실이다. 어떻든 구상한 지 열한 달, 집필한 지 일곱 달만에 겨우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로써 나의 「승무」의 비밀은 끝난다. 써 놓고 보니 이름 모를 승려의 춤과 김은호의 그림과 같으면서도 다른 또 하나의 승무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춤은 내가 춘 승무에 지나지 않는다. 춤추는 승려는 남성이더랬는데 나는 이승(尼僧)으로, 그림의 여성은 장삼 입은 속녀(俗女)였으나 나는 생활과 예술이 둘 아닌 상징으로서의 어떤 탈속한 여인을 꿈꾸었던 것이다. 무대도 나중에는 현실 아닌 환상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곧 이 승무는 나의 춤이 되는 까닭이 된다. 그 때 어떤 선배는 나의 시에서 언어의 생략을 충고하였으나, 유장한 선을 표현함에 짧고 가벼운 언어만으로써는 도저히 뜻할 수 없어 오히려 리듬을 위해서는 부질없는 듯한 말까지 넣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한 해조(諧調)를 이루는 빈틈없는 부연은 생략보다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여기서 절실히 느꼈다.
― 시(詩)의 원리(나남, 1996), 180~185면.(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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