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향기로 말을거는 詩

참 좋은 말 / 천양희

by 丹野 2011. 3. 24.

 

 

참 좋은 말 / 천양희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시집:<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창비, 2011)중에서

 

 

 어디 없을까요?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 같은 말. 치료하지 않아도 아픈 게 다 나을 것 같은 말. 답답하고 꽉 막힌 마음이 확 뚫려 시원해지고 편안해질 것 같은 말. 이런 말들로 사람을 만나고, 시를 쓰고, 노래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마음에 가득 찬 더러운 때를 뱉어내느라 입은 쉴 틈이 없고, 바람으로 침묵으로 음악으로 아무리 씻어내도 귀는 곧 말로 더러워지고 말죠.

저도 '참 좋은 말'로 시를 써본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의 재료는 대부분 탁한 말로 되어 있답니다. 좋은 시는 이 더러운 말을 발효시켜서 독을 빼고 향기가 나도록 푹 익히지요. '참 좋은 말'은 마음에 있는 것을 그 자리에서 바로 말하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담가 두고 잊은 채로 오래 숙성시켰다가 잘 익어 향기가 날 때 꺼낸 말이랍니다.

 

- 김기택 시인

 

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