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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혹독한 계절을 모질게 지나온 나무들의 이른 봄 안간힘

by 丹野 2011. 2. 14.

 

 

[나무를 찾아서] 혹독한 계절을 모질게 지나온 나무들의 이른 봄 안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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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시련의 계절을 보내는 태장리 느티나무.

   [2011. 2. 14]

   “우리 마을만 이런 것도 아니고, 천재지변이라는 걸 어찌 하겠수!” 구제역 때문에 힘드시겠다는 인사에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하신 노파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긴 세월 동안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 온 경북 영주 순흥면 태장리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나 뵈온 노파의 이야기입니다. 마을로 들어오는 온갖 잡귀 잡신을 막아주는 커다란 느티나무 앞에는 구제역 방역 시설이 겹으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무거운 걸음을 옮겨 나무 아래 다가섰습니다. 영원토록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어야 할 나무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아껴 모셨던 크고 아름다운 나무이건만 구제역 사태까지 막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세월의 무게가 힘들었던 걸까요? 혹시 자연의 흐름을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들을 원망한 탓일까요? 나무 곁을 맴돌고 있는 사이에 어디에선가 다가오신 노파 한 분이 어쩔 수 없는 일이잖느냐며 오히려 걱정하는 나그네를 위로하십니다.

   지난 겨울이 남긴 상채기를 붙안고 마을 어귀에 쓸쓸히 서 있는 태장리 느티나무.

   태장리 느티나무에서는 옛날부터 당산제를 지냈지만, 한 동안 당산제를 지내지 않았답니다. 몇 해를 거르고 다시 당산제를 지낸 것은 최근 얼마 전부터라네요. 나무를 바라보며 함께 선 노파는 이 마을에 서있는 작은 교회의 권사입니다. 노파는 하나님이 아닌 나무 같은 데에 정성을 드리는 마을 사람들이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나그네에게도 모든 지혜는 성경에서 나온다며,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권하십니다.

   교회는 있지만, 이 마을에서 교회에 나가는 신도는 그리 많지 않답니다. 노파는 그게 더 안타깝습니다. 이 마을에 시집 오기 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던 노파는 자연스레 마을에 교회가 들어오자 열심히 나갔지만,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나무만 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도가 안 된다는 거지요. 나그네의 표정을 읽으신 건지, 노파는 구제역 사태의 책임을 나무 탓으로 미루지 않습니다. 그나마 고맙습니다.

   한 달 쯤 늦게 피어난 천리포수목원의 납매 꽃.

   모질게 세월이 흐릅니다. 그래도 꽃은 피어납니다. 천리포수목원에는 엊그제부터 납매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노랗게 피어나는 소박한 꽃입니다. 하지만, 다른 꽃을 보기 어려운 계절이어서, 납매의 꽃은 언제나 반갑습니다. 혹한을 뚫고 피어나는 꽃이 고맙기만 합니다. 설 연휴를 마치고 돌아온 지킴이들도 무척 기다렸던 모양입니다. 설 쇠고 돌아오자 가장 먼저 돌본 게 납매의 개화 소식이었습니다.

   납매는 꽃은 소박하지만 향기만큼은 여느 꽃이 따를 수 없을 만큼 화려합니다. 바람 쌀쌀했던 엊그제에는 고작 세 송이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의 화려한 향기를 탐색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자그마한 꽃송이에 코를 바짝 갖다 대도 언감생심입니다. 온 가지에 노랗게 꽃망울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올랐습니다만 아무리 돌아봐도 입을 연 건 세 송이 뿐입니다.

   늦었기에 더 화려한 개화를 꿈꾸는 납매 꽃망울들.

   돌아보니, 납매의 개화는 늦어도 너무 늦은 겁니다. 음력 섣달인 납월 시작되면 피어나는 꽃이어서, 납매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인데, 이듬해 정월, 그것도 중순 되어서야 겨우 꽃을 피웠으니까요. 지난 겨울의 추위는 납매도 견디기 힘들었던 게 분명합니다. 몽실몽실 피어난 꽃망울을 눈길로 어루만지다가 문득 꽃들의 시간 속으로 틈입합니다. 그들을 스쳐간 시간을 거슬러 짚어보다가 꽃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피어나는 게 아니라는 지극히 뻔한 사실을 다시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또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긴 시간의 주도면밀한 채비가 필요하지요. 이른 봄에 한 송이의 꽃을 피우려면 나무는 추운 겨울부터 제 몸 속에서 천천히 채비를 해야 합니다. 지난 겨울의 추위는 차마 그 채비를 이루기 어려울 만큼 추웠던 겁니다. 까닭에 적어도 한달 전 쯤에는 피었어야 할 납매가 이제야 꽃을 피운 거지요. 늦은 개화는 결국 추위 속에 식물이 겪었을 모진 안간힘이 담겨있는 겁니다. 아직 향기조차 머금지 않은 납매 꽃이 장하고 고마운 이유입니다.

   오후의 찬란한 햇살을 머금어 더 검붉은 빛으로 드러난 복자기 열매.

   검붉은 날개를 달고 하늘 가에 걸린 복자기 열매도 그렇습니다. 아직 제 자리를 찾아 날아가지 못하고, 가지 끝에 매달려 간당이는 복자기 열매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가만가만 다음 세상을 준비합니다. 저 하나하나의 씨앗들이 이뤄갈 다음 세상은 더 아름다운 세상이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길, 올레 길을 걷기 위해 행낭을 꾸렸습니다. 시작은 올레길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곰솔에서부터입니다. 잘 다녀와 나무 이야기 더 전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