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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나호열 시집 / 눈물이 시킨 일 (시학시인선 040)

by 丹野 2011. 2. 5.

 

 

출처 / 시인의 방(구재기 시인)

        http://cafe.daum.net/koo6699

 

  

  ▲시집 [눈물이 시킨 일]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눈물이 시킨 일]

나호열 시집 / 시학시인선 040 / 도서출판 시와시학(2011.01.30) / 값 8,000원

 

 

 

 

시인의 말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하였다

생각해 보니 길 아닌 길을 너무 오래 걸었다

타인에게는 샛길이며 뒷길에 불과하지만

나는, 훤하다


2010년 겨울

나 호 열

 

 

 

 

 

 

 

 

 

눈물이 시킨 일

나호열

 


한 구절씩 읽어 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만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어록語錄

 

나호열

 

 


아침 아홉시 반에 떠난 봉고차는

저녁 다시 반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다

환갑을 다 된 아들은 바람을 피해

한 번도 울음소리 들리지 않는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발자국을 새고 있다

가끔은 길을 잃어버리고

자주 배고픔을 잊어버리는 아득한 거리

얘, 날도 추운데 나와서 기다리지 마라

치매 걸린 노인네들이나 그러는 일이지

뿌리 허옇게 드러낸 고목이 겨우내 붙ㅂ잡고 있던

허공이 우르르 무너지는 저녁이다




참, 멀다

나호열


한 그루 나무의 일생을 읽기에 나는 성급하다

저격수의 가늠쇠처럼 은밀한 나무의 눈을 찾으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창을 열어 보인 적 없는 나무

무엇을 품고 있기에 저렇게 둥근 몸을 가지고 있을까

한때 바람을 가득 품어 풍선처럼 날아가려고 했을까

외로움에 지쳐 누군가가 뜨겁게 안아주기를 바랐을까

한 아름 팔을 벌리면 가슴에 차가운 금속성의 금이 그어지는 것 같다

베어지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신

비석의 글씨처럼 풍화되는 법이 없다


참, 멀다

나무에게로 가는 길은 멀어서 아름답다

살을 찢어 잎을 내고 가지를 낼 때

꽃 피고 열매 맺을 때

묵언의 수행자처럼 말을 버릴 때

나무와 나 사이는 아득히 멀어진다


한여름이 되자 나무는 인간의 마을로 온다

자신의 몸에 깃든 생명을 거두어

해탈의 울음 우는 매미의 푸른 독경을

아득히 떨어지는 폭포로 내려 쏟을 때

가만가만 열뜬 내 이마를 쓸어내릴 때

나무는 그늘만큼 깊은 성자가 된다




안개의 바다

 

나호열


밤이 그토록 깊었던 까닭을

길을 잡고 나서야 알 것 같았다

출렁거렸고 아득한 멀미에 잠 이루지 못했던

꽃봉오리의 개화를 문득 깨닫게 되었다


덕산에서 면천, 면천에서 당진으로 가는 길

꽃향기가 빛을 내고, 그 빛이 바다를 이루고

섬처럼 마을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고

몇 번인가 길을 놓치고 이윽고 편하게

발걸음을 그 빛 위에 올려놓자

비로소 한 자루의 촛불로도 세상이 눈물 나는 것임을

느린 걸음으로 마주치고 말았던 것

그윽하게 한 걸음씩 몇 갈피의 긴 이야기를

먼 곳으로 내밀어 두어도 아깝지 않은

안개의 바다




종점의 추억

나호열


가끔은 종점을 막장으로 읽기도 하지만

나에게 종점을 밖으로 미는 문이었다


자정 가까이

쿨럭거리며 기침 토하듯 취객을 내려놓을 때

끝내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귀잠 들지 못하고 움츠려 서서

질긴 어둠을 씹으며 새벽을 기다리는 버스는

늘 즐거운 꿈을 선사해 주었다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얼마나 큰 설렘인가

서강행西江行 이름표를 단 버스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유년을 떠나갔지만

서강은 출렁거리며 내 숨결을 돋우었다


그곳에 가면 아버지를 만날까

이윽고 내가 서강에 닿았을 때

그곳 또한 종점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내 몸에 잠들어 있던 아버지가

새살처럼 돋아 올랐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말한다

이 세상에 종점은 없다




옛사랑을 추억함

나호열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나

꽃 피고 바람 불고 속절없이 죄다 헐벗은 채로

길가에 서 있었던 때가 있었나

이제는 육탈하여 뼈 조각 몇 개 남았을 뿐인데

얇아진 가슴에 돋아 오르는

밟을수록 고개 밀어 올리는

못의 숙명을 닮은 옛사랑이여

나는 아직 비어 있는 새장을 치우지 않은 채로

횃대에 내려앉은 깃털과

눈물 자국을 바라본다

작은 둥지에는 무모했던 ,무정란의

꿈의 껍질 그대로

이제는 치워야지 하면서

또 누군가를 감금하기 위하여

시간을 사육하고 있다

덫 인줄 모르고 내 가슴에 내려앉으려면

튼튼한 날개가 필요하다

한 번 날아오르면 별이 된다고

죽어야 별이 된다고

눈물의 망원경은 막막하게

허공을 조준하고 있다




지도책

나호열


땅거미 지는데

어머니, 지도책 달라신다

길눈이 어두워져

집으로 오는 길 죄다 잊어버리는데

개미꼬리만한 지명들을

밝게도 짚으신다


어디 가시게요 묻는 내가 어리석어

멋쩍게 고개 돌리면

어머니는 저만큼 세월 속에 묻혀 버린

마을을 향해 등 굽은 뒷모습을

팽팽해진 활시위에 얹고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길을

마음으로 열어 나가시는지

자주 눈시울을 닦아 내면서

재미있는 이야기책을 읽어 나가듯

지도책을 한 장씩 넘겨 갈 때마다

이 나이에 고아가 된다는 것이 문득문득

무거워진다




눈빛으로 말하다

나호열


떠나보지 않은 사람에게

기다려 보지 않은 사람에게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잔뜩 움켜쥐었다가

제 풀에 놓아 버린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독약 같은 그리움은 찾아오지 않는다


달빛을 담아 봉한 항아리를

가슴에 묻어 놓고

평생 말문을 닫은 사람

눈빛으로 보고

눈빛으로 듣는다


그리움은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꽃


그저 멀기만 하다

멀어서 기쁘다




봄의 가면

나호열


마음껏 안으라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분명 앞에 있는 듯싶었는데

한 걸음 내 딛을 때 서늘해지는 등 뒤

서걱거리는 소리에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뛰어내릴까 말까 망설여지는 벼랑 앞에서

배후의 유혹을 느끼게 된지만

걸어온 생은 이미 막막한 사막의 물결에 덮여

널름거리는 바람의 혀에 문장을 바꾸고 있다

양파를 까며 눈물 흘리듯

가면을 벗기다 가는 봄

웃음을 벗기면 슬픔의 속살이 보이고

슬픔을 벗겨 내면 또 어떤 얼굴이 돋아 오를까

마지막 한 장의 가면은 남겨 두기로 한다

시간과 겨루고 싶은 꿈을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모란꽃 무늬 화병花甁

나호열


한 겨울

낟알 하나 보이지 않는

들판 한 가운데

외다리로 서서 잠든 두루미처럼

하얗고 목이 긴

화병이 내게 있네

영혼이 맑으면 이 생에서

저 생까지 환히 들여다보이나

온갖 꽃들 들여다 놓아도

화병만큼 빛나지 않네

빛의 향기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문 반의 발자국 소리

바라보다 바라보다 눈을 감네

헛된 눈길에 금이 갈까 봐

잠에서 깨어 하늘로 멀리 날아갈까 봐

저만큼 있네

옛사랑도 그러했었네




느리게

나호열


우체국은 산속 저물녘에 있다

이 가을에 나는 남루한 한 통의 편지

산길 초입 그리고 저물녘에서

느릿느릿 우체국을 찾아간다

블랙홀처럼 황홀한 어둠

문득 아찔한 절벽 위에 몸을 가눌 때

바위에 온몸을 부딪치고

으깨어지면서 물은

맑고 깊어지는 흩날리는 꽃잎이다

바람은 또 이렇게 깊은 산에 들어야

솔 내음을 품어낼 수 있는 것

이 가을에

우체국 소인이 찍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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