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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풍경 너머의 풍경

[스크랩] 잘 못 찍은 사진의 매력

by 丹野 2011. 1. 29.


 

마크 코헨 Mark Cohen( 1943 ~ )

 

 

마크 코헨(Mark Cohen)의 사진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그의 사진이 명백한 의미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해서 실망하지 말자. 우리는 그저 그의 사진이 제공하는 상상의 유희를 얼마나 자극하는지를 즐기면 된다.

코헨의 사진은 일부러 잘 못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찍혀져 있지 않다. 마치 현실의 부분적인 단면을 미완성인채로 잘려져 있다. 때로는 초점이 맞지 않은 것도 있다. 그가 사용하는 라이카 35mm 카메라의 직사각형 프레임은 어떤 목적도 없이 무작위도 찍혀진 듯하다. 구도라고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듯한 이런 프레임과 ‘의미’의 모호함은 도대체 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곤란하게 한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영역이 왜 이렇게 매력적일까?

사진에 찍혀진 대상은 현실의 단면이 아니라 온전한 형상으로 보여 질 때 그 의미의 명확함을 들어낸다. 그러므로 사진에는 초점이 잘 맞아야하고 선명해야 한다. 비록 부분적인 형상이 찍혀 있을지라도 전체를 유기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화면 구성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 조건들이 갖추어 져 있을지라도 찍혀진 대상을 처음 보는 경우, 그것은 낯설 거나,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 사진 밑에 적절한 텍스트를 첨가해서 의미의 모호함을 해결하면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진이 의사전달의 경로를 거치면서 사진의 의미는 첨가되고, 해석되고, 변질된다. 이것은 사진의 ‘의미’가 처음부터 분명하고도 확실한 실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불안한 상태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사진이 객관적인 사실을 담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믿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관습과 인식체계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진속의 ‘의미’는 새로운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제차 확인 하고 있을 뿐이다.


[1975]


[1975]

사진가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어떤 일관성 있는 문맥 속에 사진을 배치하고 작가의 의도를 명백히 하려 한다. 그러나 코헨의 사진을 보면 이런 사진의 모호한 의미적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시각화 하고 있다. 그의 사진은 그 사진이 찍혀진 때와 장소 그리고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그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의 사진 속에 우리가 이미 어떠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가 구사하는 파편적인 화면 구성은 분명한 ‘의미’를 읽어내는데 상당한 방해적 요소로 작용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파인더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찍은 듯한 혹은 실수로 셔터버튼을 누른 듯한 사진들은 사진에 원초적으로 달라붙어 있는 사실( 한때 존재 했었던 )조차 어쩔 수 없이 흐려진다. 다만 그것은 그저 찍혀져 있을 뿐이다.

코헨의 작품의 소재는 그야말로 다양하다. 어린소녀의 다리, 정원의 꽃, 손가락 등 한 롤의 필름에는 어떠한, 일관성도 가지지 않는 소재들이 찍혀 있을 뿐이다. 하물며, 주제가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서 작가의 의도를 물어보는 일은 정신건강에 해롭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당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하는 것이 즐길 수 있는 지름길이다.

코헨은 1943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월크스 바에서 태어났다. 61년 포티 포트 고등학교를 나와 처음엔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에 들어갔으나, 월크스 바 대학으로 옮겨 졸업을 했다. 대학을 나온후 2년후인 67년엔 개인스튜디오를 차려 사진을 본업으로 삼았다. 그는 사진을 전공한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는 공학을 전공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사진을 취미로 했다고 한다. 생업의 목적으로 사진관을 차리긴 했지만 아마도 그는 취미로 하던 사진의 재미는 얻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상업사진가로서 그는 틀림없이 정해진 사진의 어법으로 고객들을 만족시켜야 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주는 일련의 사진들이 그의 스튜디오에서 고객들의 만족을 위해서 찍혀지는 사진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정해진 문법으로 읽혀지는 사진은 사진가와 고객의 일정한 공모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71]


[1972]

사진을 보는 일은 매우 자명한 일인 듯 보인다. 단 사진을 보면서 하나하나 찍은 사람의 의도를 읽어내고, 이를 통해서 정보나, 지식을 투명하게 흡수하는 행위로 이해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또 이 과정에서 작가에 의해서 전달되는 단일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 또한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흔히 사진이라는 것을 해석을 거치지 않고 존재하는 실체, 다시 말해서 고정적이고 완전한 의미를 ‘이미’ 부여받은 상태에서 사진속의 대상을 현실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이 정말 ‘자명’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듣다. 예를 들어 집에 있는 가족 앨범을 보기로 하자, 앨범 속에 있는 사진들은 대게 특정한 날을 기념 하기위해서 찍혀져 있는 사진들이 대분이다. 아이의 백일, 돌 사진으로부터 졸업, 결혼, 관광 등 주로 기쁨 날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다. 앨범 속에는, 가족 중에 누군가 죽었을 때, 그날을 기념하기위해서 기념사진을 찍는 경우는 없다.

단 영정사진만이 죽은 자에 대한 부재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혹 누군가 “오늘 우리가족이 죽었으니,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읍시다.” 라고 한다면, 이런 행위는 가족사진의 범주를 이탈하는 것이 되며, 우리의 인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식 밖의 일이 된다. 즉 기념사진을 찍는 행위는 즐거운 날에 대한 기억을 오래토록 보존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여행을 가서 관광 명소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행위는 여행목적 그 자체가 되었다. 누군가 여행을 다녀온 후 한 장의 사진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는 여행에 대한 완전한 충족감에 사로잡힐 수 없을 것이다. 증거로 제시될 사진이 없음으로서 여행을 다녀온 사실이 소멸 되는 것이다.

여행에서 사진 찍는 행위가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은, 사진으로서 그 증거를 남기는 행위가 곧 자신이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타인에게 보여줌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장의 사진은 혼자 보고 즐기기 위한 행위라 말할 수 없다. 사진을 찍어두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주시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사진은 가족의 화합과 끈끈한 유대관계를 표상하기위한 것이다. 가족사진을 촬영할 때 가족 중 누군가 뒷모습을 보이거나, 눈을 감는 행위 혹은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다면 그 가족사진은 실패할 것이다.

즉, 가족사진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가족구성원들이 매우 화목하다는 사실을 사진에 들어내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진가는 다음과 같이 주문한다. “자 여기를 보세요, 치즈! 눈 감지 마시고 하나, 둘, 셋” 철커덕. 그 순간 사진가의 구령에 맞추어 가족상호 간에 갈등의 모습들은 지워지는 것이다.


[1978]


[1978]

사진에 찍혀지는 사람도 사진을 찍는 사진가도 이 암묵적 합의와 공모 속에서 사진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진에 들어난 사실들은, 그러니까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욕망의 반영체이다. 사진에 선택되어진 ‘사실’ 대게의 경우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와서 사진가의 시선과 대상과의 시선이 만나는 공모관계가 잘 들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진에 찍혀진 사실은 감추고, 들어내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배제하고, 선택된 인위적이고 조작된 허구의 사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에 찍혀진 모든 것은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분명히 한때 존재했던 사실을 그 현장에서 물리적인 접촉에 의해서 마치 지문을 찍듯이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진에 찍혀진 대상은 과거에 한때 분명히 존재 했었던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정확한 기계인 카메라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사진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사진가는 언제나 선택하며, 해석한다. 사진의 의미를 읽어내는 우리도 일정한 맥락 속에서 의미을부여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진에 찍혀진 사실이라는 차원은 늘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의미적 맥락 차원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는 결국 같은 사진이 문제의식의 변화에 따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앞서 가족 앨범 속에서 지시하는 사실들은 그것이 가족 앨범이라는 문맥 속에서만 읽혀 질 때 가능한 것이지, 앨범 속에서 빠져나와 다른 문맥 속에 위치지어 질 때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장의 가족사진은 그 가족구성원의 관계가 인물의 배치에 의해서 아버지, 엄마, 자식 등으로 파악된다. 당연히 중요인물의 위치는 항상 정 중앙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치가 변경되면 서로간의 관계가 모호하게 된다. 이러한 사진을 우리는 앨범 속에 끼어 넣기 어려운 것이다. 더군다나 모범적인 가족사진이라 할지라도, 이 사진이 앨범 속에서 빠져나와 신문지면, 전시장, 광고매체, 수사관 파일등에 들어가게 되면 그 의미는 가족 앨범 속에서 읽혀졌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게 읽혀지게 된다.


[1978]


[1978]

사진은 찍혀진 객관적 현실을 보고 있다는 우리의 상식이 이처럼, 사실은 환상에 불과 하다. 우리는 다만 사진에 찍혀져 있는 대상을 넘어 비워 둔 공간, 즉 여백에서 자유롭게 욕망하고, 유희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사진이 통일된 실체가 아님은 자명해진 듯 하다. 이제 사진이 수많은 의미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래서 문맥에 따라서 사진의 의미는 서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쉽게 이해될 것이다.

사진은 하나의 의미를 중심으로 묶여져 있거나 하나의 일관된 의미로 짜여져 있지 않은, 즉 상호 모순적인 부분들로 구성된 이미지 일 뿐이다. 그리고 상호 대립적인 의미들을 보완되어야 할 사진의 불완전함이나 결함으로 이해하지 않고 사진 그 자체의 특성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볼 때 사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관철되는 일관된 논지를 찾으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비일관성이나 모호함 아니면 모순뿐이다. 이제 사진을 일관성 있고 식별 가능한 의미의 단일체로 보는 관념은 해체된다.

코헨의 사진에서 개관적인 실체나, 의미의 완전함을 찾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사진이 거칠게 표현되었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차라리 그것은 사진 그 자체의 특성 때문에 기인하며, 의미의 문맥 속에 적당히 끼워놓을 수 없는 자리가 비워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진을 보다가 의미가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을 경우, 곧잘 사진이 던지는 질문의 핵심은 이중의 부재(不在), 즉 사진이 의사전달 가능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 의해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찍혀진 대상은 항상 여기에 존재하지 않고, 의미는 끊임없이 지연된다. 그러므로 사진의 의미는 명백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모호함’내지는 ‘텅빈 의미’만이 있을 뿐이다. 소위 말하는 예술사진의 범주 속에는 이러한 사진들이 너무도 많다. 예술사진은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고 늘 의미의 ‘경계 틀’을 문제 삼는다. 한편 이것은 매우 불안하기는 하지만, 관람자의 상상의 공간을 제공하는 놀이터로 이기도 하다. 그러니 제발 작가의 의도를 그 ‘의미’를 논리적으로 따져 묻지 말자!

코헨의 사진이 가지고 있는 매력은 한마디로 잘 못 찍은 사진 같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잘 찍은 사진들로 꽉 차있다. 이 숨 막힐 듯한 영상이미지 속에서 어린아이 그림 같은 사진을 만나기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이영욱 : 연변대학교 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rxli@ybu.edu.cn

출처 : 이영욱의 사진보기와 사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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