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개발을 위한 유형학습
- 창작의 행위에 결부된 자기 정체성의 코드번호 찾기
송수권 (시인)
시쓰기란 결국 발상과 표현의 문제다. 발상은 상상력의 영역이고 표현은 언어의 영역이다.
앞장 ‘상상력이란 무엇인가?’에서 과거에 체험했던 사물의 이미지를 언어로 장악하는 힘 즉, 그 재생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상상력의 전개 양상에 대해서 알아보고 실제로 응용할 수 있도록 상상력 속에서 떠오르는 세계 즉, 그 정신에 의한 유형학습으로 들어가 보자.
콜리지(coleride)는 상상력을 제1상상력과 제2상상력으로 나누고, 제1상상력은 한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 의식수준이며 제2상상력은 개인의 독창적인 사유에 의해 파악되는 의미창조를 뜻한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은 좋은 상상력이란 제2상상력을 말함은 물론이다. 그것은 관습에 물들지 않고 유통언어 즉 소비언어나 상업성 또는 선전성이나 천박한 자본주의의 광고언어에 물들지 않은 상상력이 독창적인 상상력이란 점이다. 발상(감수성)이 신선하다거나 새롭다거나 때묻지 않았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 1 ]마이너스 상상력
여기서부터 멀 — 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 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 「竹篇 ・ Ι-여행」 전문
위의 시는 5행으로 된 짧은 시이지만 단 한군데도 유통언어나 소비적인 언어로 물든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동시에 절제된 언어로 상상력을 숨겨둠으로써 독자를 낯설게도 하며 즐겁게도 하고 당혹하게도 하며 현대시를 읽는 고급독자를 겨냥하면서 재미와 사유의 깊이를 만끽하게 한다.
따라서 소비성의 천박한 언어에 길들여진 대다수의 독자층에게는 재미없는 시가 될 것이며 그 대신 현대시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적 바탕을 갖춘 고급독자는 상상력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어차피 지적知的 수준에 의한 고급오락이란 말은 엘리어트(Eliot)가 한 말이다. 이를 심도 있게 분석해 본다면 자본주의의 일회적 삶이나 소비재로 떨어진 시는 절대로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쇼팬하우어는 「독서와 서적에 대하여」라는 글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어느 시대에나 문학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이 두 형태는 아무런 관계없이 각기 나란히 존재한다. 하나는 참된 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 문학이다. 그것은 학문을 위해 또는 시를 위해 사는 사람들에 의해 영위되고 조용히 엄숙하게 걸어간다. 그러나 이 과정은 아주 느려서 한 세기 동안에 유럽에서 겨우 한 타스의 작품이 나올까 말까 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그대로 지속된다.
가짜 문학 역시 학문 혹은 시에 의해서 사는 사람들에 의해 영위되어 질주한다. 그 당사자들은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그들은 매년 수천이 넘는 작품을 시장에 내보낸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면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대체 그 작품은 어디로 갔느냐고, 그렇게 일찍부터 떠들썩하던 그 명성은 어디로 갔느냐고. 그러므로 이런 문학은 흘러가는 문학이라 부르고, 참된 문학은 머물러 있는 문학이라고 부를 수가 있다.”
아마 이 말을 축소하여 시, 즉 상상력에 대입해 본다면 때묻고 낡은 상상력(감수성)으로 써진 시는 절대로 고전화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 종자받기 note
대숲이 창창한 마을에서 죽마(竹馬)를 타고 놀았던 기억이 새롭다. ‘푸른 기차’란 그 대막대기가 아닐까. 칸칸은 그 옹이진 마디일 테고. 그런 고향을 떠나온 지도 어언 반백년이다. 대막대기를 몇이서 가랑이 사이로 끼워 넣고 ‘칙칙폭폭’하며 마을 돌았던 석이, 돌이, 갑이등 그 깨벗기 친구들은 대처에 나가 살기에 어쩌다 명절 때 고향에 가서 한 번씩 만나곤 한다. ‘여기서부터 멀다’는 고향에 가는 일이 기차를 타고 세계여행을 하는 일보다 더 멀지도 모른다. 대막대기를 타고 놀았던 그 시절의 여행은 얼마나 유쾌한 여행이었던가.
2004. 8. 13.金 - 중앙일보 ‘송수권의 시가 있는 아침’ 「죽편」시평 부분
잠시 말이 비끌렸지만 다시 「죽편竹篇 ・ Ι-여행」으로 돌아가 본다면 이 작품은 대중의 소비성에 의해 조작된 가짜 시가 아니라 참된 상상력에서 나온 ‘머물러 있는 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로트만이 말한 숨겨진 상상력 속에 들어 있는 인생론적 비의秘義는 고독과 염결의 시간 속에 삶의 의지를 세워두려는 인식의 무한성에서 온 상상력의 ‘시詩’라는 뜻이다. 원관념(T)인 수직성의 대竹를 수평으로 달리는 기차(V)로 띄워 여행을 하는 즐거움의 상상력으로서 시인의 정신세계인 이데아(고향)를 찾는 데서 감수성의 통일이 이루어져 자기 동일성을 회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전혀 이질적인 대竹라는 식물성 이미지와 딱딱한 광물성 이미지인 ‘기차’와의 병치 이미지는 정서의 환기력을 불러오면서 시적 효과를 십분 고조시키고 있다. 이른바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인 ‘곡선의 상법想法’으로서 노자의 ‘곡즉전曲卽全’이라는 코드가 꽂혀 있는 것이다. 동시에 노자류老子流의 시가 범하기 쉬운 도학적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강점을 지니고 있다.
‘대꽃이 피는 마을’은 시인의 생체험에 들어 있는 고향 즉 화감의 정서로 읽힌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유형에서 보면 재생적 상상력에 해당된다. 다시 말하면 대竹의 옹이진 마디와 마디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의 공간으로서 ‘푸른 기차의 칸칸’으로 비유되는 백년까지 걸리는 견인의 여행이면서 시간이다.
‘가까운 길로 돌아가라’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스노우비즘(속물주의 근성)의 경구가 아니라 곡선이야말로 신神이 만든 선線이고, 직선이야말로 악마가 만든 선線이며 죄악(분리파)이라는 시적 주체를 교묘히 감추어 둔 것이다. 그러므로 푸른 기차를 타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여행이야말로 ‘느리게 사는 삶’이며 완전한 즐거움의 삶이다.
따라서 다섯줄의 짧은 시에서 분석해 낼 수 있는 상상력이야말로 기상천외하다 할 것이며 노자의 도덕경을 무색하게 하는 상상력이 곡즉전曲卽全(곡선이야말로 완전하다는 뜻)이라는 코드(시인의 정신)가 꽂혀 있어 이 시는 우리에게 이 시대를 구원하는 구원의식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 2 ]플러스 상상력
그대의 허리에서 그대의 발을 향해
나는 기나긴 여행을 하고 싶다.
나는 벌레보다 더 작은 존재
나는 이 언덕들을 지나간다.
이것들은 귀리빛깔을 띠고 있는.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는
가느다란 자국들을 갖고 있다.
몇 센티미터 정도의 불에 데인 자국들을.
창백한 모습들을.
여기 산이 하나 있다.
나는 거기서 절대로 나오지 않겠다.
오오 얼마나 거대한 이끼인가!
그리고 분화구 하나와 촉촉이 젖어 있는
불의 장미 한 송이가 있다!
대의 다리들을 따라 내려오면서
나선형을 그리며 생각에 잠기거나
혹은 여행하면서 잠을 자다가
마치 맑은 대륙의
단단한 꼭대기들에 이르듯이
둥그런 단단함을 지닌 그대의 무릎에 나는 도달한다.
그대의 발을 향하여 나는 미끄러진다
반도半島같은 그대 발가락들의
여덟 개 갈라진 틈새로.
그리고 그 발가락들에서
하얀 시트의 허공으로
나는 떨어진다. 눈 멀고
굶주린 채 그대의 타오르는 적은 그릇 모양의
윤곽을 찾아 헤매이면서!
네루다 「벌레」 전문
이 시는 ‘여자의 육체는 신神이 만든 최고의 그릇’이라는 에로스의 상상력 즉 리비도(Libido)의 코드가 꽂힌 시다.
바슐라르에 있어서 ‘물의 상상력’은 결국 대지로 통한다. 모든 생명현상은 물에 잠기거나 대지를 물에 적실 때 풍요로워 진다. 애초에 생명이 물에서 탄생했음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희랍신화에서 미인을 상징하는 비너스도 바다의 거품 속에서 올라왔다. 그것은 묘하게도 오늘날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생태학자들의 가설과도 일치한다. 빅뱅현상에서는 지구에서 떨어져 나간 달이 식어지고 지구의 물 속에선 한 아메바가 탄생하면서 기포를 만들고 산소를 내뿜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생명의지를 꿈꾸는 아메바의 능동적인 의지에 따른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벌레야말로 이 생명을 꿈꾸는 원형으로 상징된다.
이 시는 굶주린 작은 벌레 한 마리가 거대한 우주를 여행하는 데에서부터 이미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있다. 그 거대한 우주란 알고 보면 여인의 육체다. 벌거벗은 육체를 아니 침상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의 육체를 스멀스멀 벌레 한 마리가 타고 내려가는 그 사실적 묘사가 신성한 섹스의 감각을 흔들면서 에로틱한 웃음을 만들고 있다.
이 에로스적인 탐미 욕구는 저 끝없는 우주에까지 닿아 있고 그래서 육체는 신이 만든 그릇이며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육체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묘사한 시는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그것도 작은 벌레 한 마리를 여인의 미끈한 허리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그 발가락 끝에서 다시 하얀 시트의 허공으로 떨어지게 만들면서 끝없는 우주정신을 천착하고 있다.
여기서 여인의 육체야말로 신이 만든 최고의 그릇이며, 기쁨이며, 최상의 아름다움이다. 네루다는 자신을 작은 벌레로 비유하면서 굶주린 채 전신으로 타오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벌레보다 작은 존재’라고 말한다.
여기 산이 하나 있다.
나는 거기서 절대로 나오지 않겠다.
오오 얼마나 거대한 이끼인가!
그리고 분화구 하나와 촉촉이 젖어 있는
불의 장미 한 송이가 있다!
그는 이처럼 여인의 육체를 더듬어 내려가면서 불쑥 융기한 “산”의 분화구를 찾아내고 촉촉이 젖어 있는 “이끼”와 “불의 장미 한 송이”를 꺾는 열정의 스킨러브를 노래한다. 오르가즘의 절정! 그는 그 이끼 속에 숨어 나오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이 시야말로 에로티시즘의 절정을 노래한 시라 할 만하다.
그러면서 시의 후반부를 통해 육체의 타고 내려와 그 벌레는 무릎에 당도하고 있다.
그대의 발을 향하여 나는 미끄러진다
반도半島같은 그대 발가락들의
여덟 개 갈라진 틈새로.
그리고 그 발가락들에서
하얀 시트의 허공으로
나는 떨어진다. 눈 멀고
굶주린 채 그대의 타오르는 적은 그릇 모양의
윤곽을 찾아 헤매이면서!
그 미물인 작은 벌레는, 아니 나는 눈멀고 굶주린 채 떨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여인의 육체를 탐하고 정복했다 해도 그 우주인 육체 속의 정신은 다 발가벗길 수 없음을 이 미물의 존재는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신이 만든 오묘한 악기이면서 타오르는 작은 그릇 모양의 윤곽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참으로 네루다의 위대한 정신을 일깨울 수 있다. 일찍이 브레이크는 “모래알 속에서 우주를 보고 들꽃 한 송이에 천국이 있다”고 노래했지만 네루다는 이 신의 그릇, 즉 신이 만들어 낸 이 지상의 최상품인 명기名器 속에서 우주와 천국을 읽어 낸 것이다.
이와 같이 시에서는 ‘엉뚱한 이미지’, 즉 시적 자아를 벌레로 치환시키면서 에로스의 무서운 충격과 웃음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이는 기발한 착상이면서 엉뚱한 발상으로 시의 웃음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넌지시 일깨우기도 한다.
이처럼 한 편의 시를 다 읽고 난 후에 떠오르는 웃음은 얼마나 값진 것인가. 코미디언들이 순간순간 쏟아낸 웃음이 아니라, 다 읽고 나서 가만히 웃게 되는 웃음은 얼마나 이지적이며 소중한 것인가. 이 웃음은 또한 고금소총이나 와이담에서 쏟아내는 웃음도 아니며 그렇다고 소설인 《흥부전》이나 《배비장전》, 《변강쇠타령》에서 맛볼 수 있는 그런 사설조의 웃음과도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는 “발이 마술사”라 불리는 카메라의 영상도 마찬가지다. 이따금 홍콩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경쾌한 웃음, 즉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형사로 분扮하여 화재 현장에 뚜이어 들어 어린애를 구출해 나오다가 바지에 불이 붙었을 때, 어린애가 포대기에 눈 오줌이 불을 끄는 그런 재치로 웃는 웃음도 아니다. 이런 재치나 순간적인 기지로 떨어지는 웃음과 시詩 속에서 웃는 웃음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런 웃음 만들기와는 달리 시속에서의 웃음 만들기는 저 신의 미소에까지 닿아있는 웃음이고,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내밀한 웃음인 것이다. 시인은 단지 언어의 뚜껑을 열고 그 웃음을 꺼내는 마술사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인을 “언어의 연금술사”라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런 웃음이야말로 시에서만 요구될 수 있는 지적知的 상상력의 웃음임은 새삼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이 시는 상상력의 유형에선 리비도(Libido)의 코드에 해당되면서 벌레라는 상관물로 볼 때는 원형상징이 되는 것이다. 예시한 두 편의 시에서 마이너스 상상력과 플러스 상상력(실제화된 상상력) 다시 말하면 고도한 지적 상상력이 독자의 가슴과 머리를 어떻게 흔들고 감동시키는가를 알아보았다.
[ 3 ]상상력이란 정신(identity)을 드러내는 코드다.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 라
위의 시는 한하운韓何雲의 「개구리」 전문이다. 그의 상상력 속에서 청각 이미지로 빚어진 「개구리」의 의미는 무엇일까?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차용하여 우리 자모음을 순서대로 배열해 놓은 까닭은 제1상상력으로 볼 때에는 단순히 개구리의 울음소리로 깊은 의미가 없지만 제2상상력으로 들어가면 깊은 의미지평이 열리게 된다.
한하운은 천형天刑을 앓는 문둥이 시인이었고, 그의 유명한 시 ‘가도가도 전라도 길 붉은 황톳길... 오늘도 버드나무 아래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하나 뭉그러졌다’에서 보듯이 소록도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가다, 여름날 밤 어느 거름더미 밑에서 노숙을 하며 무논에서 서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쓴 시라는 체험적 사실을 가정해 본다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듯 하다.
이 시는 아마도 어렸을 때 어머니 무릎 밑에서 ‘가갸’를 읽었던 그 추억의 장면을 재구성한 것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감동이 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하운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시를 썼다고 가정해 본다면 그 감동은 이처럼 진하게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한 편의 시는 결론적으로 그 사람의 인생 체험에서 깊은 감동이 따라온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상상력의 질은 같은 체험이라도 쓰는 사람의 독창적인 사유와 체험의 고백에서 그 감동의 깊이는 달라진다.
따라서 바슐라르(Bachelad)는 상상력을 문학작품의 원동력이라 믿었으며, 존재를 파악하는 근원적 힘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물질 즉, 4원소인 불・물・공기・땅과 관련되어 본질을 해명하는 정신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슐라르의 유명한 ‘물질 상상력 이론’이다. 다기 말하면 상상력이란 대상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경험에 의해 재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러스킨(Ruskin)이 나누고 있는 통찰적 상상력, 연상적 상상력, 명상적 상상력, 또는 윈체스터(Winchrester)가 나눈 창조적 상상력, 연상적 상상력, 해석적 상상력등 그 어떤 상상력이든, 상상력은 지적 발산능력에서 온다. 이 지적 발산 능력은 곧 지식과 경험의 깊이를 말하는데 우리는 보통 이 힘을 직관력이나 통찰력으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사물의 깊이를 들여다보는 ‘지혜의 눈’이 비로소 생긴다. 그러므로 ‘백문이 불여일견’ 이라는 말처럼 독서와 체험, 여행 등은 시쓰기의 아주 중요한요소다.
프랑스의 조가가 브르텔은 모든 예술은 ‘지식의 열매’라고 규정했다. 마찬가지로 글쓰기 작업, 혹은 시 창작도 시인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 이상의 그 무엇을 그릴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것이다. 관찰력과 직관력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미 강의한 바 있다. 아무리 직관력이 뛰어나도 지식이 축적되어 있어야만 훔치기고 가능하고 모방하기도 가능하다. 또는 반은 자기 언어이고 반은 남의 언어라고 텍스트를 들어 설명한 바 있다. 달리 말하면 시 창작이란 자기의 예술적 소양과 지식을 총체적으로 집약시켜 표현하는 정신적 작업이다. 영혼이 세계와 사물을 장악하는 힘 즉 자기정체성(selfidentity)을 만들어야만 비로소 지적 상상력을 발산할 수 있다.
제주 귀양살이에서 제주수선화, 그보다는 세한도歲寒圖로 유명하고, 추사체秋史體로 자기정신을 열어 놓은 김정희(金正喜1788~1856)는 ‘난초를 그리는 비결’ 즉 사란결寫蘭訣에서 99를 얻고도 나머지 1푼 때문에 사이비 난초만 그리다가 입문은커녕 문전에서 서성거리고 만다고 창작정신을 말한 바 있다. 그 1푼이란 난초를 치는 기법은 다 터득했으면서도 ‘자기 영혼이 실리지 않은 난초가 되어버린다’는 뜻과 같다.
다시 말하건대, 시란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된다는 뜻이 아니라 사물에 가 닿는 시인의 깨달음의 정신이 아름답다는 뜻과도 같다. 이것이 곧
시인의 정서 속에 들어 있는 언어의 정신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정체성(identity)이다. 이것이 곧 그 시인의 시세계가 된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추사의 ‘세한도’는 59세 때 유배지 제주(대정골)에서 당시 연경에 유학하고 있던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 보낸 작품이라고 한다. 스스로 표제하여 ‘절후가 추워져야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구절을 패러디 하여 그 기개를 보인 그림이다. 빈 오두막집 그리고 네 그루 소나무들은 참혹한 겨울의 시대를 견뎌내는 선비의 올곧은 정신세계를 그림으로 펼친 것이다. 그야말로 이 그림에서 읽어 낼 수 있는 적적성성한 독특한 분위기는 그대로 추사의 정신이 된다.
추사의 정신을 표현하는 그림으로 묵죽墨竹과 묵란墨蘭이 또한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 ‘묵죽墨竹’이란 그림을 언어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가 되지 않을까 싶어 소개한다.
갈가마귀 울음 자옥히 잦아가는
언 하늘에 온통 시푸른
靑竹을 친다.
삭풍이여, 삭풍이여,
우리를 다시 한 몸으로 묶으라.
또 한 차례
땅 속 깊은 뿌리들을 출렁이게 하고
우리들을 다시 한 뿌리로 묶으라
그리고 地上에 홀로 남아
칼을 입에 물고 노래하는 歌人을
오래 머물게 하라.
切腹의 時代가 온다
삽과 망치와 깃대를 땅 속 깊이 매장하고
삭풍 앞에 나서서,
입에 문 칼끝을 삼키며
스스로를 증명하는,
切服의 時代가 온다
한 뿌리에서 올라온 수천의 잎
다 찢겨가고
헐벗은 나뭇가지에
언 하늘빛 환히 뿜을 때
언 하늘가에다
竹을 치며 竹을 치며,
자신의 발등에다
스스로 얼음을 터뜨리며
스스로 맨발로 얼음 위를 딛는...
스스로 증명하는 이여
切服의 時代가 오고 있다.
조정권 - 山頂墓地 ・ 5
위의 시에서 겨울 하늘에 청죽靑竹을 치는 행위는 맨발로 얼음 위를 딛는 초극의 정신을 표현한다. 즉 입에 칼을 물고 포복하는 삶은 추사처럼 한 시대를 관통하는 삶의 정신이다. 그래서 시인은 ‘삽과 망치와 깃대를 땅 속 깊이 매장하고’ 삭풍 앞에 나서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절복의 시대가 온다고 예언한다. 마치 예수의 ‘산상수훈’과도 같은 수난 받는 시대, 한 시인의 삶과 고통 그리고 정신세계의 깊이가 잘 그려져 있다.
우리말에 ‘맥도 모르고 침통만 흔든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맥을 잡을 줄 알아야 침을 놓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맥을 잡는 일은 독서(동서양 고전)의 깊이와 삶의 체험에서 온다. 위의 <산정묘지・5>는 ‘세한도’를 언어로 펼칠 때 탄생할 수 있는 그림임도 쉽게 알 수 있다. 혹은 막연한 추측일 수도 있겠지만 “초극적인 정신”에서는 코드가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곧 패러디를 차용하여 자기의 정신세계를 나타내고자 하는데 불과하다. 그리고 많은 작품들을 텍스트로 사용할 때 비로소 눈이 열린다. 이때부터 창작행위가 가능한 길로 들어선다. 사자가 얼룩말을 사냥할 때 단번에 잡는 것은 오랜 경험으로 목을 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이다. 이것이 ‘사자굴신법獅子掘伸法’이다. 사자 굴신법이란 곧 언어로서 이 세계와 사물을 장악하는 힘을 말하고, 그것은 자기 체험에 쌓인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상상력의 유형을 만들어가며 이 유형 중 어느 한 패러다임 속에 자기 피를 투입시켜 새로운 영혼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때서야 우리는 그 시인이 새로운 시대의 언어를 창조했다고 믿으며, 그의 고뇌와 고통이야말로 값진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음은 여러분의 영혼이 구원받고, 그 영혼이 투입된 자기 세계를 열어 보이기 위한 상상력의 발상법에 따른 전형적인 유형이다. 이 중 여러분은 어느 한 유형, 또는 새로운 자기 정신의 유형을 계발해서 상상력에 의한 자기 시세계를 열어가기 바란다.
상상력(imagenation)이란 imagenation이 뜻한 대로 <이미지+이미지=이미저리>를 말한다. 언어로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말함인데, 이미지가 곧 ‘정신세계’를 뜻하는 말과 일치하고 있어 흥미롭다.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모차르트 / 바이올린 협주곡 No.2 in D major, K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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