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 대해서
김정환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발설의 입도 없고
다만 나는 아직도 어두운 밤 뒷골목에서
뒤에서(혹은 앞에서) 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두고 차분히
걷지 못한다.
돌아보면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내 왜소한 그림자를 삽시간에 삼켜버리고
다시 토해내고, 토해낸 그림자는 갑자기 산더미만해지고
헤드라이트와 내 그림자는
골목 저편 끝으로 아주 조그맣게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게가 된다 담벼락 끝으로 설설 기어오르는
헤드라이트는 다만 번쩍거릴 뿐인데
뻔뻔스레 번쩍거릴 뿐인데
헤드라이트의 절망과
내 몸 속, 그립고 또한 아주 왜소한 나의 절망이
그리고 절망의 절망이
일순의 거대한 시대를 지나
골목 저편으로 어둠을 몰고 사라져가는 것을
나는 다만 한 마리 비겁한 게처럼 설설 기면서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어두운 밤 뒷골목에서
뒤에서(혹은 아무데서) 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그대로 두고
안심하지 못한다. 참지 못한다.
눈도 귀도 입도 없이 맹목적인 속도로 지나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밤 뒷골목을 걷는 사람을 위협하기에 충분하죠. 달리는 헤드라이트에 비친 그림자가 산더미 만해졌다가 작아졌다가 이윽고 사라지는 모습은, 처음엔 두려움에 크게 놀라 심장이 덜컥 떨어질 것 같다가 점점 콩알 만해지는 소시민의 심리 상태를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70~80년대의 어두운 뒷골목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이 그림자의 유희가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나약한 개인을 덮쳐버릴 것 같은 위협적인 빛만 강렬하게 다가오고 그 빛에 가려진 실체는 보이지 않는 그 육중한 속도의 힘 앞에서 한없이 왜소해지고 소심해지는 자신을 자주 경험했을 테니까요.
문학집배원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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