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사동백 - praha 2000년 봄
동백의 맥을 짚어보다
조용미
새벽 빗소리는 뚝 뚝 아는 이의 거처를 지우며 내 방으로
흘러든다 그곳은 검은색으로 휩싸이며 지워진다 내 아는 이
의 거처에도 비는 내리겠지만 그 비는 이제 내게로 오지 못
한다
먼 길들이 물에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산에서 들고 온 동
백 두꺼운 잎의 맥을 짚어본다
꽃살문 저쪽은 내가 걸어들어갈 수 없는 곳, 연꽃무늬와
국화무늬의 분합문 사이를 서성이며 내가 본 것은 그 속의
동백잎보다 더 두터운 환한 어둠, 산에서 돌아온 후로 자주
새벽예불 소리를 듣는다
절방 뜨거운 방바닥에 몸을 누이고 듣던 경을 외우던 소
리, 창호지 문살에 설핏 비치며 지나가던 사람의 옆모습, 촛
불을 꺼야 이제 그만 촛불을…… 동백숲과 대숲과 굴거
리나무를 쓸고 온 바람이 녹슨 풍경을 건드리며 내 잠속으로
들어왔다 이승에서의 고단한 잠인 듯
법당 앞 연못의 어린 비단잉어들은 단풍잎 사이를 헤치고
단풍잎들은 비단잉어 울긋불긋한 무늬 어린 것들 사이를 떠
다니고 있는 그 시간, 산을 내려오다 무심히 발길을 돌린 것
은 동백 떨어진 잎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탓만은 아닐 텐데
벽에 걸린 못 두어 개 휴지통과 양초 한자루 선반 위에 놓
인 이부자리가 전부인 반듯한 절방에 동백잎 서걱이는 소리
와 풍경소리에 밤을 다 빌려준 새벽, 내 지치고 아픈 몸을 누
일 때
-시집 『일만 마리의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창작과비평사,2000년
'이탈한 자가 문득 > 향기로 말을거는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0) | 2011.01.09 |
---|---|
쓸쓸 / 문정희 (0) | 2011.01.04 |
바람의 독법外 / 전건호 (0) | 2011.01.03 |
관음이라 불리는 향일암 동백에 대한 회상 / 송찬호 (0) | 2011.01.03 |
백 년 후의 편지 / 신현락 (0) | 2011.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