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독법外 / 전건호
바람의 독법
전건호
새벽안개 가르며 자유로 질주하는데
뒷자리에 던져놓은 책장을
바람이 펄렁펄렁 넘긴다
속도 높아갈수록
열려진 창틈 비집고 들어와 삼매경에 빠져든다
슬쩍슬쩍 건성으로 책장 넘기다
속도계 가파르게 높아갈수록
책갈피 사연에 푹 빠져
감정 추스르지 못하고 바쁘게 넘긴다
판도라 상자 열리듯
얼핏 보이는 문장에 몰입되는가 싶더니
내가 미처 읽지 못한 은유를 해독한 걸까
제풀에 감정 복받치는지
창밖 흙먼지 일고 차체 격렬히 흔들린다
길가 줄지어선 은사시 파르르 전율시키는
그의 독법에 휘몰이 되다
임진각 어귀에서 속도를 줄이자
책갈피 넘기는 속도 더뎌지더니
조용히 책을 덮고 구름 속 뛰어오른다
횡단보도 무시하는 가파른 속도에 짓눌려
내가 미처 넘겨보지도 못하고 던져놓은 책
한 꺼풀 한 꺼풀 넘겨보다
이슬 맺힌 문장에 감정 복받치는지
울컥 구름 속에 올라
가을 비 후두둑
시야 아득하게 흐려놓는다
변압기
전건호
주렁주렁 매달린 식구들 부양하다
몸살을 앓던 여자가
끝내 쓰러졌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아파트며 공장이 순식간에 절망에 휩싸였다
파르르 떨던 가로등도 목을 꺾었다
밥솥이 끓다 말고
청국장도 식어버렸다
웃음꽃 피우던 TV도 멈춰버렸다
여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검은 피가 흥건하게 거리를 적셨고
구급차 달려와 심장을 수술하는 동안
집집마다 촛불이 켜졌다
무관심하던 사람들까지
소생을 빌며 간절히 기도했다
누가 저 지경이 되게 방치했냐고
서로를 탓하며 분개했다
간신히 소생한 여자는
그날 일을 금방 잊어버렸다
그녀가 관심을 받아본 건
그날 그 순간뿐
오늘도 상처난 몸으로
허공에 매달려 신음하는데
쳐다보는 사람 하나 없다
길 위의 조문
전건호
출근길 외곽순환도로를 달린다
영구차 행렬이 앞을 막아
졸지에 길 위의 조문객이 되고 말았다
꽉 막힌 도로
엉거주춤 망자의 뒤를 따르며 발을 굴러보지만
마음은 좀처럼 속도를 올리지 않는다
세상사 뭐 그리 바쁘다고
추월을 포기하고 뒤따르다보니
망자와 나 사이에
피치 못할 고리로 얽혀져 있다
한때 서로 몸 기대었으나
낯선 거리 스쳐 지나던 동행이라는 건가
엉거주춤 따라붙는 나를
칠성판에 누워 지긋이 바라보다
이젠 되었다는 듯
한참 만에 길을 열어주는데
이쯤이면 서로 빚을 갚았다는 건가
도열한 가로수 손을 흔들자
굴뚝 위 흰 연기가
너울너울 만장을 흔들고
낮달이 요령을 잡는다
홍도동
전건호
산 아래 불빛 다 잠든 다음에야
홍도동 골목은 비로소 부산해지곤 했는데요
십 년만의 한파에
쪽방촌 하숙생들 볼 얼어터져
홍도 같았던 그 겨울
기차 칼바람 가를 때 마다
양철지붕 피리를 불고
비 오면 콩 볶는 소리 요란하던 끄트머리 집
19공탄에 끓이던 라면발처럼
배배 꼬인 그 골목
한눈팔다 스무 해 만에 돌아와 보니
푹 퍼진 면발같이 길은 넓어지고
사륜구동 바람 굉음을 일으키는데요
주인집 딸 속옷 걸린 빨fot줄에
얼굴 붉히던 홍도화 대신
도화살 만발한 벚꽃 피어나는데요
양철지붕 못질하던 빗방울
후두둑 차창에 달라붙어
호기심 가득 낯선 사내 들여다보고
랩송만 깔깔대는데요
불야성 이루는 불빛만
홍도화 대신 화르르 만발했어요
밤안개 속 더듬이 세우고 아무리 달려도
홍도는 울지 않아요
시집『변압기』 2010년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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