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 기자의 명화로 보는 경제사 한 장면 <19>
샤갈은 왜 러시아를 떠나야 했나
“다름을 존중했다면 혁명은 위대한 것이 됐을텐데…” 중앙SUNDAY | 제200호 2011.01.08.
1 ‘비테프스크 위에서’(1915~20), 마르크 샤갈(1887~1985) 작,캔버스에 유채, 67x92.7㎝,뉴욕현대미술관, 뉴욕. [색채의 마술사 샤갈전 제공] 10여 년 전 대학생들의 소개팅 명소 중에 서울 강남역 커피숍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 있었다. 사실 나는 그 커피숍 덕분에 그 낭만적인 이름에 영감을 준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알게 됐다. 하지만 김 시인이 마르크 샤갈(1887~1985)의 어느 그림을 보고 이 시를 쓴 것인지는 몰라서 궁금했었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색채의 마술사 샤갈’전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 시는 이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비테프스크 위에서’(사진 1)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2 ‘절대주의(Suprematisme)’,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 작,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 하얗게 눈이 덮인 도시 위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날아간다. 도시의 공간과 면 분할에서는 입체파와 표현주의의 영향이 엿보이지만 비행하는 남자의 동화 속 천진한 소년 같은 묘사는 샤갈만의 것이다. 이 남자는 아슈케나지 유대인(북동유럽계 유대인)의 전형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다. 손에 든 지팡이와 등에 진 큰 봇짐, 흐린 하늘의 가라앉은 분위기로 봐 이 남자는 ‘방랑하는 유대인’처럼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우울한 여행을 계속할 것처럼 보인다.
유대인인 샤갈은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민족의 방랑의 역사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혹시 자기 자신도 사랑하는 고향 비테프스크를 떠나야 할 운명임을 예감하지 않았을까? 그는 유럽에 정착하기 위해 1922년 러시아를 영원히 떠났다. 그 후에도 그림에 계속 비테프스크를 그려 넣을 정도로 애착이 많았는데도 말이다. 샤갈이 떠난 것은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지 몇 년 후의 일이었다. 그는 처음에 기쁜 마음으로 혁명을 맞았다. 혁명 덕분에 제정러시아에서 법적으로 차별받던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동등한 시민권을 누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또 혁명 정부가 부르주아지만을 위한 예술이 아닌 만인을 위한 새로운 예술을 지원하고 그것이 인민을 위한 정치와 상생하도록 하겠다고 했을 때, 샤갈은 진심으로 그것을 지지했다. 하지만 샤갈의 이상은 현실과 괴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혁명을 축하하는 그림을 그렸을 때 사람들은 “왜 말이 하늘을 날아다녀요? 비현실적이잖아요?” “이게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에 대해 뭘 말하는 거죠?”라고 딴죽을 걸기 시작했다. 동시대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1878~1935)는 샤갈의 그림엔 혁명 정신이 결여돼 있고 유럽 부르주아 미술의 영향이 과도하다고 비난했다. 3. 2006년 당시 미술경매 신고가를 기록한 잭슨 폴록(1912~56)의 작품 39넘버 5, 1948’. [중앙일보] ▶ 말레비치라고 해서 직접적인 혁명 메시지가 담긴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지만 추상미술의 선구자 중 하나였던 그는 자신의 쉬프레마티즘(suprematisme·절대주의) 그림들(사진 2)이 절대적으로 순수하며 유럽 부르주아 미술과 단절된 새로운 것이라고 자부했다.
샤갈은 말레비치와의 다툼에서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미술가들에게는 정부 지원이 절대적인 수입이었지만 샤갈은 혁명적 정치성이 결여돼 있다는 이유로 정부 지원 순위에서 하위로 밀려났다. 말레비치가 지원 위원회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으니 샤갈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런 상황에서 샤갈은 러시아를 떠났다. “혁명이 이질적이고 다른 것들에 대한 존중을 유지했다면 위대한 것이 됐을 텐데”라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그렇다면 샤갈이 러시아를 떠나는 데 한몫했던 말레비치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잘 먹고 잘 살았을까?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추상화 등 전위미술은 무조건 부르주아 미술로 간주돼 배척됐다. 오로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그림 형태에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림들만 권장됐다. 말레비치도 많은 작품을 압수당했고 한동안 붓을 잡는 게 금지될 정도였다. 한때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의 빛나는 기수였던 말레비치는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쓸쓸히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바실리 칸딘스키와 말레비치 등 추상화의 선구자들이 나온 러시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추상화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편 소련과 대립하는 미국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20세기 초만 해도 추상화 등 모더니즘 미술은 미국에서 낯선 존재였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대로 대공황 타개를 위한 뉴딜 아트 프로젝트에서도 아방가르드 미술은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제외됐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갑자기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미술이 급부상하게 된다. 이러한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 주자가 ‘액션 페인팅’으로 유명한 잭슨 폴록(1912~56)이다. 폴록은 그의 작품 ‘넘버 5, 1948’(사진 3)이 2006년 당시 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며 팔리는 등 미술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현대미술사에서 폴록의 이름이 빠지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런데 이러한 폴록의 인기와 권위에 대해 1970년대부터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이 음모론을 제기했다. 1950년대 CIA가 뉴욕 현대미술관(MoMA)과 합동작전으로 폴록을 포함한 추상표현주의 미술 화가들을 띄웠으며 그것은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이론이다. 에바 콕크로프트는 그녀의 저서에서 추상표현주의가 “냉전의 무기”였다고까지 말했다. 이 학자들에 따르면 미국은 문화 면에서 소련을 압도하고 유럽을 매혹해 유럽에 미치는 소련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새롭고 세련된 미술이 필요했는데, 추상표현주의야말로 그것에 잘 들어맞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CIA와 MoMA가 함께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유럽 전시를 기획하고 또 거부들에게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살 것을 종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에 대해 반론도 많다. 예를 들어 뉴욕 타임스의 수석미술칼럼니스트 마이클 키멀맨은 MoMA가 당시에 해외 기획전을 많이 책임지지도 않았고 추상표현주의 그림이 MoMA의 해외 기획전에서 지배적이지도 않았다고 자료를 들어가며 반박했다. 어쩌면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폴록의 그림이 ‘알아먹지 못할’ 현대미술 중에서도 특히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반면 미술시장에서는 특히 비싸게 팔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현대미술을 보고 종종 “저건 나도 그리겠다”고 말하지만 사실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 그림을 따라 그리기가 생각만큼 쉬운 건 아니다. 하지만 폴록의 그림은 비교적 흉내 내기 쉽다(거대한 캔버스를 펼쳐 놓고 물감을 뿌려대면 되니까). 그런데도 그는 왜 이다지도 미술사에서 중요하며 그의 작품은 왜 이다지도 비싸단 말인가? 이런 의문을 가져본 사람이면 (솔직히 나도 포함해) CIA 개입설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가설은 정설로 자리 잡지 못했으며 많은 강력한 반론에 부딪혀 오히려 약해지는 추세다. 어쨌거나 순수한 미술을 주장했던 말레비치는 러시아에서 서글픈 최후를 마쳤고 순수한 미술의 대표로 뽑히는 폴록의 추상표현주의는 이렇게 정치적 음모설에 휩싸여 있다. 독립과 순수성을 갈망하지만 정치경제 상황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또한 예술의 운명인가 보다. 문소영씨는 영자신문 코리아 중앙데일리 문화팀장이다. 경제학 석사로 일상에서 명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찾는 것이 즐거움이다. 글도 쓰고 강의도 한다. |
'이탈한 자가 문득 > 풍경 너머의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 생각] 더 많은 나무 이야기를 더 생생하게 전해드리기 위하여 (0) | 2011.01.10 |
---|---|
겨울 꼬막과 홍합 (0) | 2011.01.09 |
Zena Holloway (0) | 2011.01.09 |
충북 보은 용곡리 고욤나무 (15) (0) | 2011.01.07 |
[솔숲의 나무 편지] 식물처럼 천천히, 그리고 나무처럼 왕성하게 (0) | 2011.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