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 읽기]<7>타인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는 감수성을 그리며
어느 날 가수 김민기는 동료의 집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우연히 동료 여동생이 쓴 일기를 넘겨보게 된다. 흰 털을 가진 개, 즉 ‘백구’의 죽음에 대한 슬픈 기록이 적혀 있는 일기였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김민기는 9분에 해당하는 긴 곡을 하나 짓게 된다. 그것이 바로 ‘백구’라는 노래다.
“내가 아주 어릴 때였나. 우리 집에 살던 백구, 해마다 봄가을이면 귀여운 강아지 낳았지. 어느 해에 가을엔가 강아지를 낳다가, 가엾은 우리 백구는 그만 쓰러져 버렸지. 나하고 아빠 둘이서 백구를 품에 안고, 학교 앞의 동물병원에 조심스레 찾아갔었지. 무서운 가죽 끈에 입을 꽁꽁 묶인 채, 슬픈 듯이 나만 빤히 쳐다봐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 하얀 옷의 의사 선생님 큰 주사 놓으시는데, 가엾은 우리 백구는 너무너무 아팠었나 봐. 주사를 채 다 맞기 전 문 밖으로 달아나, 어디 가는 거니 백구는 가는 길도 모르잖아. (…) 학교 문을 나서려는데 어느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앞을 지나가면서 혼잣말로 하는 말씀이 웬 하얀 개 한 마리 길을 건너가려다, 커다란 차에 치여서 그만 (…) 백구를 안고 돌아와 뒷동산을 헤매이다가, 빨갛게 핀 맨드래미 꽃 그 곁에 묻어주었지. 그날 밤엔 꿈을 꿨어, 눈이 내리는 꿈을, 철 이른 흰 눈이 뒷산에 소복소복 쌓이던 꿈을.”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1970년대 싱어송라이터의 노래로는 너무나 애처롭고 처량하기까지 하다. 왜 김민기는 얼핏 동요에 가까워 보이는 ‘백구’를 짓게 되었던 것일까. 바로 여기에 그의 비범함이 있다. 민주주의를 절망적으로 갈망하다가 그는 마침내 민주주의가 떠안고 갈 수밖에 없는 숙명적 과제를 자각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독립을 긍정하는 이념이다. 그렇지만 개인의 자유와 독립이 극단적으로 긍정되는 순간, 인간들은 서로에 대해 냉담해지고 따라서 서로를 경쟁상대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어떻게 하면 개인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고, 개인 간의 유대와 연대 의식을 강화할 수 있을까. 김민기는 민주주의에 걸맞은 개인 사이의 관계를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핵심은 바로 고통의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백구’라는 노래에 등장하는 소녀가 백구의 고통을 공감하는 영화와 같은 장면들을 떠올려 보라. 병원에서 공포에 질린 백구의 불안한 눈에 공감하는 대목, 병원을 탈출한 백구를 애타게 찾는 대목, 그리고 끝내 교통사고로 죽은 백구의 사체를 매장하는 대목은 우리에게 고통의 공감이 무엇인지를 애절하게 느끼게 만든다.
소녀와 백구 사이의 관계를 통해 김민기는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고통의 공감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민기의 생각은 명도(明道)라는 호로 더 유명한 정호(程顥·1032∼1085)라는 중국 북송 유학자의 속내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학 서적에서는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면 불인(不仁)하다’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인(仁)이란 명칭의 형상을 가장 잘 드러낸다. 인자(仁者)는 천지만물을 한 몸이라고 여기므로, 어떤 것도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이 없다. 자신이라고 여기니 어디인들 이르지 못하겠는가. 만일 자신에게 있지 않다면, 자연히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마치 수족이 마비되어 기(氣)가 통하지 못하면 모두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정집(二程集)’
유학자답게 정호는 공자(孔子)의 인(仁)☆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려고 노력하며 평생을 보낸다. 어느 날 그는 의학 서적을 넘기다가 짧은 구절 하나를 발견한다.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면 불인(不仁)하다’라는 구절이었다. 이 짧은 구절은 정호에게 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다리가 마비되었다면 누군가가 칼로 다리를 찔러도 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불인’이다. 반대로 누군가가 다리를 찔렀을 때 고통을 느낀다면, 나는 다리와 인(仁)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다른 사물이나 타인에게까지 확장해 보라. 꺾인 꽃을 보고서 고통을 느낀다면, 꽃은 나의 것이다. 참혹하게 죽은 백구를 보고 고통을 느낀다면, 백구는 나의 것이다. 병에 걸린 타인을 보고서 고통을 느낀다면, 그 타인은 나의 것이다. 만약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겪는 고통에 공감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만물일체(萬物一體)이다. 만물일체는 세계의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단순한 형이상학적 주장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것은 모든 타자가 겪는 고통에 대한 감수성, 혹은 공감에 대한 소망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현대철학이 ‘리스판서빌리티(Responsibility)’라는 개념을 왜 그렇게 중시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책임’이라는 번역어가 ‘리스판서빌리티’가 가진 원래 의미를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보통 ‘책임’이란 단어는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은 싫더라도 애완견을 유기하지 말고 잘 키울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리스판서빌리티’는 무엇인가가 싫더라도 잘 돌보아야 할 의무라는 뜻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는 개념이다. ‘리스판스(Response)’가 ‘반응’이라는 의미라면, ‘어빌리티(Ability)’는 ‘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니까 ‘리스판서빌리티’는 ‘반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백구’라는 노래에 등장하는 소녀는 백구에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고, 정호가 말한 성인(聖人)은 만물에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리스판서빌리티의 대상이다. 소녀는 백구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었고, 성인은 만물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었다. 결국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생명의 나약함에 대한 반응이 바로 리스판서빌리티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리스판서빌리티가 ‘죽은 개’ 취급을 받는 시대, 정확히 말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낭만주의자의 이상에 불과하다고 조롱받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풍조를 정치철학적으로 체계화했던 사상가가 바로 카를 슈미트☆☆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질자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존재적으로 어떤 타인이며 이질자라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다. (…) 모든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인종적 또는 그 밖의 대립은 그것이 실제로 인간을 적과 동지로 분류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경우에는 정치적인 대립으로 변화하게 된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Der Begriff des Politischen)’
슈미트에게서 경제적인 것의 범주가 ‘이익과 손해’이고 미적인 것의 범주가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면, 정치적인 것의 범주는 ‘적과 동지’다. 지금 그는 인간은 불신과 경쟁의 논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비관론을 설파하고 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나는 살 수가 없고, 적과 싸우려면 동지를 규합해야만 한다. 슈미트의 차가운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는 자신의 슬픈 자화상에 직면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근본적으로 ‘적과 동지’라는 범주에 지배되고 있지 않는가. 세계화된 자본주의에서 적과 동지로 이합집산하고 있는 국제관계, 연평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남과 북의 전쟁 위기, 기독교계와 불교계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해묵은 종교 대립,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의 지역 갈등, 학교나 회사 등 조직 내의 치열한 생존 경쟁, 심지어 같은 아파트단지에서 벌어지는 주민들 사이의 이해 대립.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인 범주에 지배되지 않는 관계란 눈을 비비고 찾아도 찾을 수 없을 지경이다. 이런 갈등과 대립 속에서 매번 건곤일척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과연 인간다운 삶일 수 있을까.
‘적과 동지’라는 범주에 지배받는다면 우리는 위기에 빠진 삶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구원은커녕 우리는 언제든지 적으로 몰려서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리스판서빌리티’, 즉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감수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직감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적과 동지’라는 해묵은 대립과 갈등 관계를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몸에 비수를 꽂을 수 있다는 말인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할 수 없는 사람만이 타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의 몸에 비수를 깊게 꽂을 수 있는 법이다. 지금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만들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냉담한 시대에 살고 있다. 다시 우리는 김민기의 ‘백구’를 들어야 할 때가 아닌가. 그리고 처절하게 참회해야 할 때가 아닌가. 살아있는 모든 것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겼던 성인(聖人)의 이상이 아니더라도 ‘철 이른 흰 눈이 뒷산에 소복소복 쌓이던 꿈을’ 꾸었던 소녀의 감수성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강신주 철학박사
::인(仁)::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되던 춘추전국시대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공자와 맹자가 제안했던 개념이다. 맹자는 그것을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명료화한 적이 있다. 측은지심은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아이의 불안과 공포를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느끼는 감수성이다. 아직도 공자와 맹자에서 시작되어 주희와 정약용에까지 면면히 흘러온 유학사상이 주목을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유학사상의 이면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는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는 절절한 외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카를 슈미트(1888∼1985)::
‘정치적인 것’의 범주를 ‘적과 동지’로 규정했던 현대 독일의 정치철학자. ‘윤리적인 것’의 범주를 ‘선과 악’으로, ‘미학적인 것’의 범주를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그리고 ‘과학적인 것’의 범주를 ‘참과 거짓’으로 설정했지만 칸트는 ‘정치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과 혼동하였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을 ‘윤리적인 것’과 단절시킴으로써 마키아벨리가 시작했던 근대정치학을 새롭게 숙고하도록 만들었다. 저서로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Der Begriff des Politischen)’,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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