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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丹野의 깃털펜/시집『와온』

바람의 발자국 外

by 丹野 2010. 10. 22.



 

 

 

바람의 발자국

 

김경성

 

 

 

 

키 큰 느티나무의 몸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바람을 보았다

 

나뭇잎의 낱장마다 속속들이

 

소소속 바람이 박히는 소리, 그 소리

 

나무의 몸속으로 들어가 나이테의 행간을 휘돌아서

 

쏴 와와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바람의 신발

 

한 짝 두 짝 주워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지문처럼 번져 있는 바람의 무늬 손금 닮았다

 

느티나무의 몸속에 남아있는 바람, 잎 젖혀가며 내게로 와서

 

발자국을 찍어대고

 

나는 기왓장 틈 아슬아슬하게 꽃을 피운 씀바귀처럼

 

절집 마당에 오래 앉아

 

발자국에 고이는 바람의 말을 읽었다

 

무언가 간절히 그리워지는 해질 무렵,

 

몸과 마음을 열어놓으니

 

내 몸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 그대 마음인 듯 따뜻해서

 

흩어져있는 바람의 발자국 가만가만 만지며 산길 걸었다

 

내 몸 스치는 곳마다

 

숲 떨림의 소리 가득했다

 

 

 

 

- 시집 『와온』 문학의 전당, 2010

 

 

 

 

 

나무는, 새는

 

김경성

 

 

    

차르르르 키질하듯 새떼 날려보내는 버드나무

 

수십 마리 쏟아내고 난 후

 

바르르 몸을 떨다가

 

새들의 발자국 가지런히 정리하는지

 

한참이나 뒤척거렸다

 

강아지풀 옆에 앉아서 사과 한 개를 다 먹을 때까지

 

제 속에 품어놓은 새들을 몇 차례 더 날려보냈다

 

파라라라락 새들은 날아가고

 

새가 앉았던 자리마다 듬성듬성 생긴 구멍

 

가을 볕 날쌔게 꿰차고 앉아 있어서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가슴을 열어놓고

 

품었거나, 날려보냈거나

 

새들의 징검다리가 되었거나

 

흔들거리며 제자리에 서 있는 저, 나무의 탄력성

 

나뭇가지 튕겨서

 

새들을 쏟아낼 때마다

 

마른 새똥 떼어내듯 나뭇잎 흩날렸다

 

새들을 품을 때는

 

오롯이 나뭇잎으로 덮었다

 

나무는, 새는

 

한몸이었다가

 

남남이었다가

 

새들은 허공에 길을 그리고

 

나무는 제 몸 그림자로 지상에 길을 그리고

 

 

 

나는 오래전 그대가 걸었던 길을 걸었다

   

 

 

- 시집 『와온』 문학의 전당, 2010

 

 

  

 

자서전 

 

 김경성

 

 

 

멈칫멈칫하는 눈송이

 

새들의 발자국이다

 

허공의 치마 폭에 찍어놓은 발자국 문자

 

마지막 문장의 온점을 찍을 때 완성되는 책의 서문

 

지상에 펼쳐놓는 것이다

 

 

 

나무는 느낌표

 

강물은 말 줄임표

 

높은 산은 물음표, 사람은 쉼표

 

바람이 낱장을 넘길 때 새들의 문장을 읽을 수 있다

 

 

 

새들은 미완성의 자서전을 쓰려고

 

고봉밥 같은 새집

 

드문드문 찍어놓고

 

문장부호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 2010년 어유문학제 시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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