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발자국
김경성
키 큰 느티나무의 몸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바람을 보았다
나뭇잎의 낱장마다 속속들이
소소속 바람이 박히는 소리, 그 소리
나무의 몸속으로 들어가 나이테의 행간을 휘돌아서
쏴 와와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바람의 신발
한 짝 두 짝 주워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지문처럼 번져 있는 바람의 무늬 손금 닮았다
느티나무의 몸속에 남아있는 바람, 잎 젖혀가며 내게로 와서
발자국을 찍어대고
나는 기왓장 틈 아슬아슬하게 꽃을 피운 씀바귀처럼
절집 마당에 오래 앉아
발자국에 고이는 바람의 말을 읽었다
무언가 간절히 그리워지는 해질 무렵,
몸과 마음을 열어놓으니
내 몸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 그대 마음인 듯 따뜻해서
흩어져있는 바람의 발자국 가만가만 만지며 산길 걸었다
내 몸 스치는 곳마다
숲 떨림의 소리 가득했다
- 시집 『와온』 문학의 전당, 2010
나무는, 새는
김경성
차르르르 키질하듯 새떼 날려보내는 버드나무
수십 마리 쏟아내고 난 후
바르르 몸을 떨다가
새들의 발자국 가지런히 정리하는지
한참이나 뒤척거렸다
강아지풀 옆에 앉아서 사과 한 개를 다 먹을 때까지
제 속에 품어놓은 새들을 몇 차례 더 날려보냈다
파라라라락 새들은 날아가고
새가 앉았던 자리마다 듬성듬성 생긴 구멍
가을 볕 날쌔게 꿰차고 앉아 있어서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가슴을 열어놓고
품었거나, 날려보냈거나
새들의 징검다리가 되었거나
흔들거리며 제자리에 서 있는 저, 나무의 탄력성
나뭇가지 튕겨서
새들을 쏟아낼 때마다
마른 새똥 떼어내듯 나뭇잎 흩날렸다
새들을 품을 때는
오롯이 나뭇잎으로 덮었다
나무는, 새는
한몸이었다가
남남이었다가
새들은 허공에 길을 그리고
나무는 제 몸 그림자로 지상에 길을 그리고
나는 오래전 그대가 걸었던 길을 걸었다
- 시집 『와온』 문학의 전당, 2010
자서전
김경성
멈칫멈칫하는 눈송이
새들의 발자국이다
허공의 치마 폭에 찍어놓은 발자국 문자
마지막 문장의 온점을 찍을 때 완성되는 책의 서문
지상에 펼쳐놓는 것이다
나무는 느낌표
강물은 말 줄임표
높은 산은 물음표, 사람은 쉼표
바람이 낱장을 넘길 때 새들의 문장을 읽을 수 있다
새들은 미완성의 자서전을 쓰려고
고봉밥 같은 새집
드문드문 찍어놓고
문장부호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 2010년 어유문학제 시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