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 읽기]<6> 공공성과 타자의 존재
길거리 키스가 ‘공공성’ 가지려면? 익명의 타자들이 동조해야!
강의를 할 때 종종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지곤 한다. 철학자의 진지한 가르침을 전해주었는데 학생들은 박장대소하는 경우다. 내 이야기가 농담이라고 확신하는지 노트에 필기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약간의 빈정거림을 섞어 농담을 했다. 학생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배려였다.
그런데 의도와 달리 학생들이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노트에 적고 있지 않은가. 아마 그 농담이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철학적 주장으로 들렸나 보다. 생각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상황이 강의에서 자주 반복되자 나는 고민하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마침내 한 가지 깨달음에 이르렀다. 내 이야기가 학생들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사전에 알 방법이 내게는 전혀 없다. 단지 강의가 끝난 뒤 학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조심스럽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내 의도를 좌절시킬 수 있는 존재, 혹은 나와는 다르게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타자(他者)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표현을 빌려 정의하자면 타자는 “나와는 이질적인 삶의 규칙을 따를 수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타자의 정의에 고개가 아직도 갸웃거려진다면 일본의 사상가이자 문예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타자에게 말해진 언어가 사회적이고 대화의 형태를 띠며 다성적 특성을 가지려면 그 타자가 어떤 공통된 일련의 규칙들을 공유하는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 ‘공동체’에서의 대화는 단지 독백일 뿐이다.
―‘은유로서의 건축(隱喩としての建築)’
이제야 알겠다. 강의실에서 나는 학생들과 ‘독백’이 아니라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는 언제나 대화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철학 선생으로서 나의 사유 규칙과 학생들의 사유 규칙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철학 강의를 들었던 이유는 나로부터 철학적 사유의 규칙을 배우려는 것이다. 만약 내가 가지고 있는 규칙을 미리 공유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수업을 들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나와 동일한 규칙을 공유한 ‘공동체’의 성원, 즉 이미 철학자일 테니까 말이다.
이 경우 내 강의는 대화처럼 보이지만 사실 ‘독백’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나와 그들은 규칙이 달랐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은 나의 진지한 가르침을 때로는 농담으로, 반대로 농담을 진지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 행동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이 사전에(ex ante factor) 예측될 때 상대방은 내게 타자일 수 없다. 반면 그것을 오직 사후적(ex post factor)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을 때, 상대방은 바로 ‘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변을 한번 돌아보라.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은 사전에 반응을 예측할 수 있는 경우보다 오직 사후에 확인할 수 있는 타자 쪽이 더 많을 것이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익명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가족마저도 타자로 다가오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사전에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뮤지컬을 좋아할 줄 알고 표를 준비한 아버지가 그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좌절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만약 그가 아버지의 권위를 내세워 가족을 극장으로 몰고 간다면 그의 가정은 아버지의 독백이 반복되는 작은 독재정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공공성(公共性·Publicness)의 가치를 새롭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결국 공공성이란 나와 타자 사이의 공존의 공간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지하철 역사 주변, 통행 인구가 많은 공원 벤치에서 젊은 연인이 키스를 하고 있다. 이 경우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키스가 타자에게 용인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깔려 있다. 만약 기대대로 상황이 전개된다면 그들의 키스는 공공성을 나름대로 확보한 셈이다. 그렇지만 상황이 기대대로 전개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할아버지가 역정을 내며 큰 소리로 외친다.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키스를 하다니. 못 배운 것들. 요즘 젊은 것들이란.”
사진은 영화 <유 윌 미스 미>. 동아일보 자료사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키스를 나눈 연인과 마찬가지로 이 할아버지도 자신의 주장이 다른 타자들에게 인정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공원에 있던 익명의 타자들이 할아버지에게 동조한다면 이 커플의 행위는 공공성에 반하는 것으로 사후에 확정될 것이다. 반면 그들이 할아버지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반대로 할아버지의 역정이 공공성에 반하는 것으로 확정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공성은 사전에 미리 결정될 수 없고, 오직 타자들의 반응에 따라 사후적으로만 얻어지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빌리자면 공공성이란 동일한 규칙에 지배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상이한 규칙을 가진 타자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체주의의 공공성과 민주주의의 공공성을 구별해야 한다.
전체주의에서는 독재자의 명령이 모든 공공성을 사전에 미리 규정한다. 과거 야간 통행금지나 장발 단속 등이 바로 그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독재자는 자신의 규칙을 모든 타자에게 일방적으로 관철하려고 한 것이다. 결국 그에게 타자란 존재할 수도 없는 범주였던 셈이다.
반면 민주주의에서 공공성은 타자라는 범주를 함축하고, 따라서 타자의 인정과 용인을 통해서만 사후적으로 확보될 수 있는 법이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폐쇄적 공동체가 아니라 상이한 규칙을 가진 다양한 타자들과 공존하는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공공성을 사유하면서 나와 규칙이 다른 존재, 즉 타자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체주의적 공공성이나 획일성 혹은 강제성만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치라는 전체주의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가 타자라는 개념을 숙고하는 데 평생을 보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타자는 나와 더불어 공동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자아가 결코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공감도 전혀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다.
―‘시간과 타자(Le Temps et L'autre)’
타자가 나와 유사하다면, 그것은 그가 나와 삶의 규칙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 경우 엄격한 의미에서 그는 내게 타자일 수 없지 않은가. 아무리 공감이 넘쳐나는 조화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규칙이 지배되는 공동체는 전체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레비나스는 타자란 결코 나와 삶의 규칙을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라고 권고한다. 공원에서 키스를 나누는 연인은 타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젊은 연인의 애정 행각을 비난했던 할아버지도 자신의 역정을 타자들이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레비나스가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라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절망하지는 말자. 타자는 우리 행동을 부정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인정하고 용인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타자가 우리 행동을 인정하고 용인한다면 우리는 어렵기만 했던 공공성을 마침내 확보한 것이다.
청계광장이나 서울광장의 공공성에 대한 반복되는 논쟁은 얼마나 보잘것없고 천박한가. 행정단체로부터 허가받은 집단행동이라고 해도 공공성이 저절로 확보되지는 않는다. 익명의 타자들이 그들의 행동을 부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집단행동이 항상 공공성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다. 익명의 타자들이 그들의 행동을 인정하고 용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를 표방하지 않는다면 민주사회에서 공공성은 어느 장소에서든 관계된 타자들의 인정과 용인을 통해서만 사후적으로만 확보될 수 있는 법이다. 민주사회에서 정부나 지자체가 공공장소를 미리 확정하고, 나아가 어떤 집단행동에 공공성이 있다고 미리 판단하는 것은 일종의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전체주의적 공공성을 지향하면서도 자신들이 민주주의적 공공성을 지향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잊지 말자. 모든 자유로운 활동은 긍정되어야 하지만, 그 활동이 공공성에 부합하는지는 행정 권력이 아니라 익명의 타자들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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