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 읽기]<5>대표로 뽑힌 자와 뽑은 자의 괴리감
‘국민의 대표’는 우리가 해야 할 싸움을 대표로 싸워주려는 걸까?
국회, 대통령,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 등 모든 정치적인 조직은 기본적으로 ‘대표(representation)☆☆’와 ‘대표되는 것(the represented)’이란 이원적 구조로 작동한다. 여기서 ‘대표되는 것’은 계급이나 집단일 수도 있고, 아니면 환경 문제, 여성 문제 등 더 추상적인 이념들로 무장한 지식인 집단일 수도 있다.
‘대표’와 ‘대표되는 것’ 사이에는 내적인 필연성이 있을까? 이것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정치적 조직, 혹은 대표에게는 사활을 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내적인 필연성을 확보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는 바닥에서부터 붕괴될 수밖에 없고, 나아가 대표는 그저 독재자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온 국민이 전쟁터와 같았던 국회의 모습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다. 대표라는 사람들이 대표되는 사람들에게 이런 볼썽사나운 연말 선물을 주어도 되는 것일까? 국회의원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차갑다. 그렇지만 대표라는 사실을 망각했던 국회의원들은 아는가? ‘대표’와 ‘대표되는 것’ 사이의 필연성이 심각하게 회의되는 순간, 다시 말해 대표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대표가 자신을 대표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정치의 위기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표’와 ‘대표되는 것’ 사이에 내적인 필연성이 붕괴되자마자 양자 사이에는 자의성(arbitrariness)이 대두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착각하지는 말자. ‘대표’와 ‘대표되는 것’ 사이에 내적인 필연성의 관계가 있다가 어느 순간 자의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원래 양자 사이에는 어떤 내적인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조직을 포함한 모든 대표의 논리에 숙명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를 아는가? 그는 언어와 그것이 의미하고 있는 것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관계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던 현대 언어학자다.
기표(signifiant)를 기의(signifi´e)에 결합시키는 관계는 자의적(arbitraire)이다. 또한 좀 더 간략히 언어 기호는 자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가령 ‘sœur(누이)’라는 개념은 그것의 기표 구실을 하는 s-¨o-r라는 일련의 소리들과 아무런 내적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그 개념은 다른 어떤 소리에 의해서도 똑같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증거로 언어들 사이의 차이점과 서로 다른 언어들의 존재 그 자체를 들 수 있다.
―‘일반언어학강의’
프랑스 사람이라면 프랑스어인 ‘쇠르’라는 소리를 들으면 자신의 ‘누이’를 연상할 것이다. 쇠르라는 소리가 기표라면 누이라는 연상이 바로 기의다. 그러니까 쇠르라는 말은 수많은 누이를 대표할 수 있는 말인 셈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쇠르라는 말과 누이라는 연상 사이에 필연성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그들만의 착각일 뿐이다. 예를 들어 누이를 대표하기 위해서 영어에서는 ‘시스터(sister)’라는 말을, 중국에서는 ‘메이(妹)’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쉬르는 “기표를 기의에 결합시키는 관계는 자의적이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처럼 언어의 영역에서도 대표와 대표되는 것 사이에는 어떤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소쉬르의 지적은 새로울 것이 없다. 인식론의 영역에서도 대표와 대표되는 것 사이에는 필연성이 없다는 지적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이 ‘내가 본 사물이 사물 자체’라고 믿었을 때, 이마누엘 칸트(1724∼1804)만은 ‘사물 자체’는 알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현상은 초월론적 대상(transzendentale Gegenstand)에 적합하도록 자체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고, 오직 경험 가운데 주어져 있을 뿐이다. 현상은 단지 표상(Vorstellung)일 뿐이다.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초월론적 대상’이 바로 칸트의 그 유명한 ‘사물 자체(Dinge an sich)’이다. 그는 표상을 사물 자체와 구별한다. 동일한 사물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박쥐가 경험하는 것과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박쥐는 초음파를 이용해 세계를 경험하지만 우리 인간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 등을 사용해서 세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박쥐가 경험하는 세계와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가 ‘현상’이나 ‘표상’의 세계이다. 이 중 어느 세계가 사물 자체의 세계에 가까운 것일까? 아니 가깝기는커녕 어느 것도 사물 자체와 무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우리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사물 자체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거대한 착각일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자신이 사물 속에 집어넣은 것만을 다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표상과 사물 자체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고 자의적이다. 이것이 칸트의 최종 진단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표상이라고 번역되는 독일어 ‘Vorstellung’이라는 단어는 ‘앞에 세움’, 즉 대표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결국 칸트에게서 표상이 ‘대표’였다면, 사물 자체는 ‘대표되는 것’이었던 셈이다. 흥미로운 일 아닌가? ‘대표자’와 ‘대표되는 자’라는 정치적 관계뿐만 아니라 ‘기표’와 ‘기의’라는 기호학적 관계, 심지어는 ‘표상’과 ‘사물 자체’라는 인식론적 관계에서도 우리는 대표의 논리가 가진 자의성에 직면한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의 교훈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표상이 단지 인간만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그는 ‘사물 자체’라는 개념을 인식론에 도입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치에 ‘대표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도입해야만 하는 것 아닐까? 정치의 위기가 대표되는 자들이 ‘대표되지 않은 자들’로 전락할 때 발생한다면, 정상적인 정치는 대표되지 않은 자들이 대표되는 자들로 상승할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우리를 대표하지 못한다고 환멸을 느낄 때조차, 우리가 정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우리가 정치란 자신의 삶을 곤궁과 고통 상태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종교적 행위라고 믿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매번 환멸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철에 우리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후보자를 고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도박꾼의 심리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매번 판돈을 날려 도박에 환멸을 느끼지만, 도박꾼은 도박에서 모든 구원과 희망을 엿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베팅한 후보가 자신을 대표하기를 기다리는 심리는 여러모로 자신이 베팅한 룰렛 숫자에 구슬이 멈추기를 기다리는 도박꾼의 심리와 닮아 있다. 그렇지만 룰렛의 회전만을 주시하는 도박꾼의 수동적인 태도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뽑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어떤 정치를 하는지를 수동적으로 관망하는 태도는 옳은 일일까?
정치의 위기는 ‘대표되지 않은 자들’, 그래서 ‘대표되어야만 하는 자들’을 대표할 수 없는 대표의 무능력이나, 그들보다는 자신만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대표의 이기심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대표되어야만 하는 자들은 절망하며, 정치에 무관심하게 된다. 절망적인 것을 응시하지 않으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반응에 해당하는 법이다.
대표의 오만과 대표되지 않은 자들의 무관심! 이 두 가지 조건이 맞물릴 때, 진정한 정치 위기는 시작된다. 이제 분명해지지 않는가? 대표는 대표되지 않은 사람들을 대표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럴 의지가 없다면 그는 정치권에 있을 이유가 없다. 반대로 대표되지 않은 사람들은 대표를 통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끈질기게 노력해야만 한다. 그것은 권리이기에 앞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회에서 벌어진 전쟁을 보면서 국회의원들을 조롱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대표의 오만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것은 조롱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대표인 이상 우리를 대표하라!”는 외침과 실천이기 때문이다.
강신주 철학박사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1857∼1913)☆::
차이가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스위스 구조주의 언어학자. ‘남자’라는 말이 구체적인 남자를 의미할 수 있는 이유는 ‘남자’와 ‘여자’라는 개념 차이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언어와 그 지시 대상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관계도 없다는 것을 밝혔던 그는 언어를 구조적인 측면으로서의 랑그(langue)와 개인이 발화하는 측면으로서 파롤(parole)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저서로 ‘일반언어학강의(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가 있다.
::대표(代表) 혹은 표상(表象)(representatin)☆☆::
현재 우리 삶의 위기를 ‘representation’의 위기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representation’은 정치적으로는 대표나 대의제를 의미하고, 인문학적으로는 재현이나 표상으로 이해된다. 대표가 대다수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하는데, 정말 다양한 욕망을 제대로 대표할 수 있는가? 정치적 의미에서 ‘representation’의 위기란 이런 회의를 가리킨다. 재현이나 표상은 무엇인가를 묘사한 그림에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그린 그림은 그를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가? 혹시나 왜곡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인문학적 의미에서의 ‘representation’의 위기란 바로 이런 회의로 구체화된다. 앤 노턴(Anne Norton)이란 정치학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명료화한 바 있다. “대표 혹은 재현은 대표된 것 혹은 재현된 것을 변경시킨다(The representation alters the represented)!” 우리 시대 삶과 그 위기를 철학적으로 숙고하려면 결코 우회할 수 없는 주장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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