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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詩

낙엽에게 外/ 나호열

by 丹野 2010. 12. 1.

    창경궁 오후 다섯 시 무렵 /  p r a h a

 

 

 

낙엽에게 / 나호열



나무의 눈물이라고 너를 부른 적이 있다
햇빛과 맑은 공기를 버무리던 손
헤아릴 수 없이 벅찼던 들숨과 날숨의
부질없는 기억의
쭈글거리는 허파
창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
더 이상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하였다
슬픔이 감추고 있는 바람, 상처, 꽃의 전생
그 무수한 흔들림으로부터 떨어지는,
허공을 밟고 내려오는 발자국은
세상의 어느 곳에선가 발효되어 갈 것이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에게 슬픔은 없다, 오직
고통과 회한으로 얼룩지는 시간이 외로울 뿐
슬픔은 술이 되기 위하여 오래 직립한다
뿌리부터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취기가 없다면
나무는 온전히 이 세상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너는 나무의 눈물이 아니다
너는 우화를 꿈꾼 나무의 슬픈 날개이다

 

 

 

 

 

*저녁 무렵부터 새벽까지 / 나호열 

 

 

그대 외롭다면

저녁 무렵부터 새벽까지

걷고 또 걸을 일이다

희뿌움한 새벽 보다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그대보다 힘 센 동물의 그림자로

가까이 다가온다면

그대 아직 외로운 것이 아니리라


그대 슬프다면

저녁 무렵부터 새벽까지

걷고 또 걸을 일이다

눈물이 새 순처럼 돋아나

잎 틔우고 꽃 피고 질 때까지

금강석이 되지 않으면

그대 아직 슬픈 것이 아니리라


외로움도 늙고

슬픔도 익어가리

저녁 무렵부터 새벽까지 침묵할 수 있다면




* 국악 퓨전그룹 슬기등의 곡 명

 

 

 

 

그 길은 저 혼자 깊어간다 / 나호열 

 

직선으로 달리는 길이 뚫리고 길눈 어두운 사람만이 그 길을 간다 어깨가 좁고 급하게 꺾어들다가 숨차게 기어올라가야 하는 그 길은 추억같다 쉴 사람이 없어 폐쇄된 휴게소 입구의 나무 의자는 스스로 다리를 꺾고 무성하게 자라는 잡초들이 길을 메운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참을성 있게 그 길은 저 혼자 깊어져 간다 저 혼자 적막을 채우고 그 길은 이윽고 강이 된다 그 길을 가 보고 싶다 사랑이란 어깨를 부딪치며 피어나는 이름모를 풀꽃 굴곡진 길을 돌고 돌아야 얼굴 보여주는 수틀에 얹혀진 안개 멀리 멀리 돌아서 보면 직선으로 달려갔던 그 길도 알맞게 휘어도는 것을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그 길을 오래 터벅거리며 걸어가고 싶다 노래 부르고 싶다

 

 

 

 

 

커피에 대하여  / 나호열

 

사랑을 믿지만
과녁에 꽂히는 화살처럼
가슴에 적중하는 사랑이 나는 두렵네
오늘 밤 뜨겁게 일렁이는 사랑이 지나간 후
속삭이는 바람을 잊어버리기는 너무 힘드네
조금씩 오조준하여 빗나가는,
그리하여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오해 받을지라도
나는 그대의 심장 옆에 머물고 싶네
오십 년 만에 이제 겨우 커피 맛을 알게 되었네
향이 좋은가? 그 씁쓸함이 좋은가?
설탕도 넣고 크림도 넣고 커피도 넣고
그래도 그것들의 섞이지 않는 단단한 고집을 이해한다네
나의 외로움을, 쓸쓸함을, 허망함을 사랑하는 사람이여
외로움을 벗은, 쓸쓸함을 벗은, 허망함을 벗은
앙상한 정신은 매력적인가
이 시커먼 속은 무엇으로 감출 수 있는가

 

 

 

 

 

 

길을 찾아서 / 나호열


옷고름 여미듯이 문을 하나씩 닫으며
내가 들어선 곳은 어디인가
은밀하게 노을이 내려앉던 들판 어디쯤인가
꿈 밖에 떨어져 있던 날개의 털 
길 모퉁이를 돌아 더러운 벤치에 
어제의 신문을 깔고 누운 사람이여
어두운 계단을 점자를 읽듯이 내려가며
세상 밖으로 쫓기듯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 밖에도 세상이 있으니 이 얼마나 낯 선 풍경인가

그저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
응달진 숲의 낮은 곳을 익숙하게 오가는 다람쥐들
맹목의 긴 행렬을 이루며 땅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말없음표의 개미들
한 번도 똑 같은 길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그들과의 짧은 눈맞춤  
그들과 눈 맞춘 그 길 일장춘몽이다
길은 아무는 상처와도 같다 아물면서 기억을 남기는 길
상처가 없는 그들은 매일 새로운 길을 만들고 버린다

저, 비어 있는 유모차
물끄러미

 

 

 

 

 

 

물안개 / 나호열

 


앞이 캄캄하고 
하늘은 더 막막할 때
나는 물안개를 보러 간다

물이 꽃을 피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향기도 없고 형체도 없는 물방울 꽃들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잎을 내미는지 
몸의 슬픔마저도 함께 배워 버렸다

물은 고독을 닮아 너무 물렁물렁해서 
헤집을수록 더 깊이 나를 내려다 놓아
이 세상의 거친 신발은 벗어두어야 하지

이 산등성이에서 저 산등성이까지
수평을 이룬 물 
머리를 숙이고 내려다보면 그 때 
유리창 아래로
길이 집들이 마을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나무들이 그토록 닿고 싶어했던 하늘이
별들이 구슬소리를 내며 떨어지던 양철 지붕이
죽어서야 동구 밖에 나왔던 무덤들이
물의 나라에 잠들어 있다

물안개는 깃발처럼
그들이 내미는 하얀 손들처럼
나를 이끈다
물의 길을 걸어라 
물의 집에 들어라

물안개를 한아름 꺾으러 나선 새벽
나는 절교의 외마디를 들었다 


 

 

 

 

춤 / 나호열


절은 사라지고
홀로 남은 강가의 탑처럼
조금씩 허물어지는 육신의 틈이라고 
나는 배웠다

직립을 꿈꾸면서도
햇살에 휘이고 
바람에 길들여지는 나무들의 
허공을 부여잡은 한 순간
정지의 날숨이 
춤의 꿈이라고 나는 배웠다

그러나 또한 
동천 언 하늘에 길을 내는
새들의 날갯짓과
제 할 일을 마치고 땅으로 귀환하는
낙엽들의 가벼운 몸놀림이 
아름다운 춤이라고 나는 배웠다

천 만 근의 고요 속에서 
스스로 칼 금을 긋고 내미는
새 순과 꽃들의 아픔을 보았는가
바위에 온몸을 부딪고 
천 만 개의 꽃잎으로 산화하는 
파도의 가슴을 보았는가
벅차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용암처럼
끝내 바위가 되기 위하여 
기꺼이 온 몸을 내던지는

멈춤
그 찰라의 틈을 보여주기 위하여
바람을 불러 모으는
혼신의 집중
보이면서 사라지는 
사라지기 위하여 허공에 돋을새김을 하는
묵언의 釘 소리
들판에 내려앉는
노을이 뜨겁다


 

 

 

 

 

 

修行 / 나호열


내가 오랫동안 해온 일은 무릎 꿇는 일이었다
수치도 괴로움도 없이
물 흐르는 소리를 오래 듣거나
달구어진 인두를 다루는 일이었다
오늘 벗어 던진 허물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때와 얼룩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함부로 팽개치지 않는 사람은 
자동세탁기를 믿지 않는다
성급하게 때와 얼룩을 지우려고 
자신의 허물을 빡빡하게 문지르지 않는다 
마음으로 때를 지우고
마음으로 얼룩을 지운다
물은 그 때 비로소 내 마음을 데리고 
때와 얼룩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빨랫줄에 걸려 있는 어제의 깃발들을 내리고
나는 다시 무릎을 꿇는다
때와 얼룩을 지웠다고 어제의 허물이
옷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의 아니게 구겨진 내 삶처럼 
무늬들의 자리를 되찾기에는 또 한 번의 
형벌이 남겨져 있다
쓸데없이 잡힌 시름처럼 주름은 
뜨거운 다리미의 눌림 속에 펴진다
내 살갗이 데이는 것처럼 마음으로 펴지 않으면 
어제의 허물은 몇 개의 새로운 주름을 만들어 놓고 만다
부비고, 주무르고, 헹구고, 펴고, 누르고, 걸고
평생을 허물을 벗기 위해
오늘도 무릎 꿇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아침에 전해 준 새소리 / 나호열


죽지 않을 만큼만 잠을 잔다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죽지 않을 만큼만 꿈을 꾼다
죽지 않을 만큼만 말을 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걸어간다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누군가 외로울 때
웃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아, 그러나,
모든 경계를 머물지 않고
죽지 않을 만큼만 사랑할 수는 없다
누구나 말하지 않는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나는 그 끝마저도
뛰어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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