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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현존과 부재의 틈에 관한 은유 / 염창권

by 丹野 2010. 9. 24.

 p r a h a

 

■《우리詩》월평 ■

 

 

 

 

         현존과 부재의 틈에 관한 은유

 

 

                                                         염 창 권 (시인·광주교육대학교 교수)

 

 

 

 

복효근,「 어떤 종이컵에 대한 관찰 기록」(《시와시학》, 2010년 여름호)

정일근,「 차라투스트라를 기다리며」(《문학들》, 2010년 여름호)

박해림,「 발」(《우리詩》, 2010년 8월호)

신현락,「 은유의 다리」(《우리詩》, 2010년 8월호)

권현형,「 나는 당신을 아껴먹고 있다」(《시안》, 2010년 여름호)

손수진,「 팜파탈」(《시와사람》, 2010년 여름호)

양애경,「 너와 함께- 핵 위험시대의 교제법」(《시와시학》, 2010년 여름호)

 

 

  1. 현존

 

  현존재적 조건에 대한 각성은, 역설적으로 현존이 아닌 것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생은 사와 대비되듯, 한 단어로 묶인 생사生死는 개념상

의 한 덩어리이다. 불안과 근심은 이와 같은 이항대립적 인식의 틈에서 발

생한다.

  이와 유사하게 ‘사랑’이란 감정 속에는 충만함과 기쁨을 내포하고 있지

만, 더불어 일상의 피곤함과 사랑의 편집증적인 특성으로 인해 사소한 시

빗거리가 항상 개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존을 망각하지 않고 실존에 대

해 반성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불편과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다.

  이 인식론적 틈은 들여다 봄, 즉 바라봄을 통해 발견된다. 이 틈 사이를

들여다보는 수고로움을 통해 시인은 참다운 실존을 발견하고 독자에게 길

잡이가 되지만, 정작 시인은 외롭고 쓸쓸하다. 시인은 시빗거리를 만들면

서 세상과 불편하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시인과 함께 하면 수고스럽고 뒷맛이 개운하지가 않

다. 음식 중에서 술만큼 물질적인 것은 없다. 후기자본주의 소비패턴과 잘

어울리는 술은, 순간적으로 발화하여 물질과 몸, 물질과 정신을 밀착시킨

다. 휘발성의 액체인 술은 곧바로 몸에 반응하여 소비됨으로써 소비의 과

잉을 일으킨다. 이 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시인이라면, 일상의 관념에 틈

을 내고 그 틈에 시빗거리를 끼워놓을 것이다. 이로써 마취의 감정은 사라

지고 몽롱했던 현존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면서 술맛이 확 떨어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혼자 자작하는 편이 낫다!

 

 

 

 

  2. 소멸에 관하여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어디 술 마시는 일뿐이랴. 재화에 눈이 멀

어 그 길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지독한 마취 상태에 빠져 있다. 물질에 대

한 탐닉으로 참다운 실존에 대한 지향성이나 감각이 방기된 채이다. 이때

시인은 일상의 관성에 브레이크를 걸고, 자동화된 관념에 틈을 내어 성가

시게 굴어야 한다. 즉 참다운 실존을 가로막는 제약들을 찾아내고 이들을

전경화시킴으로써 마취상태를 발가벗겨 이를 들여다보도록 해야 한다.

  「어떤 종이컵에 대한 관찰 기록」은 소비사회의 일면을 면밀히 들여다본

다. 1회용은 단 한 번의 소비로 사용 가치를 잃어버리는 고도 소비사회의

상징적인 표상이다. 1회성의 운명이므로 단 한 번의 부딪힘 이후에는 소멸

의 절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존재자의 입장에서는 그 단명한 1회성을 거

부하고 현존의 조건 속에서 재생을 꿈꾼다. 단 한 번으로 존재 가치가 추락

하였으므로 이후의 현존은 새로운 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하얗고 뜨거운 몸을 두 손으로 감싸고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듯

 

사랑은 이렇게 달콤하다는 듯

붉은 립스틱을 찍던 사람이 있었겠지

 

채웠던 단물이 다 비워진 다음엔

이내 버려졌을,

버려져 쓰레기가 된 종이컵 하나

담장 아래 땅에 반쯤 묻혀 있다

 

한때는 저도 나무였던지라

낡은 제 몸 가득 흙을 담고

한 포기 풀을 안고 있다

버려질 때 구겨진 상처가 먼저 헐거워져

그 틈으로 실뿌리들을 내밀어 젖 먹이고 있겠다

 

풀이 시들 때까지나 종이컵의 이름으로 남아 있을지

빳빳했던 성깔도 물기에 젖은 채

간신히 제 형상을 보듬고 있어도

풀에 맺힌 코딱지만한 꽃 몇 송이 받쳐 들고

소멸이 기꺼운 듯 표정이 부드럽다

 

어쩌면 저를 버린 사람에 대한

뜨거웠던 입맞춤의 기억이

스스로를 거듭 고쳐 재활용하는지도 모를 일이지

1회용이라 부르는

아주 기나긴 생이 때론 저렇게는 있다

                      - 복효근,「 어떤 종이컵에 대한 관찰 기록」전문

                        (《시와시학》2010년 여름호)

 

 

  이 시에서는 일회용 종이컵의 운명을 사랑에 비유하고 있다. “ 그 하얗고

뜨거운 몸을 두 손으로 감싸고/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립스틱을 찍

으며 어루만졌던 촉각적 기억이 생생하다. 그 입맞춤의 감각적 기억은 뒤

에서도 반복된다. 여기서 컵은 사랑의 매개체가 아니라 주체로 등장한다.

그러나 주체의 내부에 채웠던 단물이 빠지자마자 이내 팽개쳐지며 무가치

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주체의 시선으로 보면 타자는 1회용 사랑을 낭

비하는 자이다.

  2연 3행에서 4연에 이르기까지 버려진 종이컵의 재생 방식을 보여준다.

쓰레기로 구겨진 채 던져졌다가 땅에 반쯤 묻혀 한 포기 풀을 제 품에 안고

꽃 몇 송이를 받쳐 들고 있다. 종이컵으로 대변되는 주체는 소멸해 가고 있

으면서도 제 안에 풀을 품음으로써 타자를 수용하는 사랑의 모습으로 역전

시킨다. 즉 ‘사랑’의 대상으로서 용도 폐기된 후에는 그 존재를 역전시켜

‘사랑’을 품고 감싸는 적극적인 주체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랑의 의

미를 각성시킨다.

  끝 부분에서 다시 확인하듯 “어쩌면 저를 버린 사람에 대한/ 뜨거웠던 입

맞춤의 기억”과 같이 사랑에 대한 선언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중층적인 의

미의 겹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꺼풀을 벗기면 인간의 1회용 사랑

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 드러남을 곧 깨달을 수 있다. 시인이 종이컵을 ‘사

랑’의 환유물로 사용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생에서도 버려지

면서도 다시 존재를 역전시켜 타자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사랑의 모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1회용이라 부르는/ 아주 기나긴 생이 때론 저렇게

는 있다”는 시의 의미 선언에 해당하는데, 이는 우리 생 또한 1회용이 아닌

가 하는 반성적 의식을 가져오게 한다. 이 시에서 환유장치로 등장하는 종

이컵은 거듭 고쳐 재활용을 이루고, 1회성의 사랑이나마 소중히 기억하면

서 서서히 그리고 부드럽게 소멸해 가는 생의 모습을 환기시켜 준다.

  「차라투스트라를 기다리며」는 “비등점”에서 끓고 있는 여름날의 매장 풍

경을 보여준다. 주체의 인식 작용은 언제나 대상으로 향하는 지향성에 의

해 이루어진다. 메를로 퐁티는, 대상 인식은 순수 의식이 아닌 몸을 매개로

하여 진행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몸과 세계는 ‘상호 얽힘’을 통하여 상호

침투하고 교차하기 때문이다.

 

 

김씨의 하관下官은 정오에 있을 것이다.

붉은 흙더미 사이에 광중壙中이 파여 있다.

반듯한 직사각형 저 죽음의 깊이까지

뜨거운 햇살이 들끓는다.

코끝이 빨간 풍수風水의 음양오행은

아침부터 대책 없이 취해 있다.

상복을 걸친 생면부지의 여자가

걸어놓은 솥에 관솔로 불을 지핀다.

물보다 생송진이 먼저 비등점에 닿는다.

핏물이 말라가는 쇠고기 덩어리

무정형의 슬픔 같다는 생각은 사치 같다.

누런 갈색의 쇠파리가 피 냄새를 맡았나보다

앵앵거리며 달려든다.

무덥다. 열대야가 예고된 폭염의 세례를 받으며

주검이 느릿느릿 오고 있다.

김씨의 관이 차에 실려 장지로 오는 사이

죽음의 의식儀式이, 눈물의 조문弔問이

땀에 젖어 불쾌하게 번들거릴 뿐이다.

머리 속이 소금사막처럼 하얗다.

그에게 읽어줄 마지막 시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백지를 들고 정오 아래 서 있다.

                         - 정일근,「 차라투스트라를 기다리며」전문

                        (《문학들》2010년 여름호)

 

 

 

  위의 시는 니체의 저작인『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모티프

를 차용하여, 현존재의 한계적 상황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장지葬地에 도착

한 시인이 폭염아래 서 있다. 몸이 느끼는 불쾌한 폭염과 “쇠고기 덩어리”

를 향한 살아있는 것들의 의지는 죽음을 매장하는 의식의 엄숙성과는 매우

상반된다.

  시인은 뫼르소처럼 정오의 태양 아래 서서, “ 머리 속이 소금사막처럼 하

얗”게 변색되는 실존의 현기증을 느낀다. “ 그에게 읽어줄 마지막 시가 보이

지 않는다./ 나는 백지를 들고 정오 아래 서 있다.”는 외침은 차라투스트라

를 기다리는 이유이자 호출의 방식이다.

  “폭염의 세례를 받으며/ 주검이 느릿느릿 오고 있”는 장지의 풍경 속에

서, 취해 있는 풍수, 솥을 걸고 불을 지피는 생면부지의 상복 입은 여자, 피

냄새를 맡은 쇠파리,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얼굴들, 이 모두는 살아 있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의지의 표상이다. 그와 대립된 세계로는 김씨의 관이

“느릿느릿” 깊게 파 놓은 광중壙中을 향해 이동하고 있을 뿐이다. 시적 주체

의 시선은 폭염 속에서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생의 본능과 이를 위한 의지적

표상에 맞추어져 있다. 죽음 앞에서 혹은 정오의 폭염 아래서도 오히려 멈

추지 않은 생의 의지와 비루한 모습들을 통해 실존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몸과 세계는 ‘상호 얽힘’을 통하여 상호 침투하고 교차한다. 따스

한 봄날이나 서늘한 가을날이 아닌, 폭염의 세례 속에 매장을 진행하는 한

계 상황 속에서 실존에 대한 각성이 극명히 드러나는 까닭이다. 니체는 인

간은 죽음을 통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 회귀한다고 하였다. 그는『차

라투스트라…』에서 “가장 왜소한 인간조차도 영원히 회귀한다는 것! 이것

이 모든 생존에 대한 나의 권태였다!”고 하였다.

  시인이 “마지막 시가 보이지 않는다.”고 절규했을 때, 생의 의지와 반복

에 대한 권태의 표현이자 거부가 아니었겠는가.

 

 

 

 

    3. 현존과 부재의 틈, 또는 사이

 

  아슬아슬한 균형이 있다면, 그것은 틈이 견디는 방식이다. 결핍과 부재

는 다른 말이지만, 일단 결핍이 일어나면 장애가 발생하고 이윽고 소멸을

향해서 ‘느릿느릿’ 이동한다. 한계 상황에서 실존에 대한 각성이 극명해지

듯이 결핍 또한 동일하게 한계 상황에 대한 인식을 가져온다.

  「발」에서는 결핍으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현존을 견디지만, 오히려 참다

운 실존됨을 가져오는 조건임을 깨닫는다.

 

 

과일을 받쳐 든 소쿠리가 두 다리로 서 있다

다리 세 개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도 모르고

발끝에 힘을 주고 있다

저 직립,

빈곳도 팽팽할 수 있다니

 

온몸으로 기어가는

시장 바닥의 저 사내

바닥과 구분되지 않는 직립의 생을 가졌다

허리를 굽혀 겸손히 떼어내는 발이

바닥을 밀어내고 또 끌어올릴 때

비어 있는 다리의 힘으로도

추락하는 내가 버틸 수 있는 것인지

 

소쿠리 한쪽이 비워지면서

텅 빈 모서리가 공중을 번쩍 들어올린다

생의 한쪽이 좌르르 쏟아지고 있다

                               - 박해림,「 발」전문

                              (《우리詩》2010년8월호)

 

 

  위의 시에서는 두 다리로 서 있는 소쿠리와, 온몸으로 기어가는 사내가

대비된다. 소쿠리는 다리 하나가 없어 삼각형의 안정을 취할 수 없고, 사내

는 수직으로 직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닥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들을 바라보는 주체는 연민이 아닌 긍정의 시선을 지니고 있다.

  1연에서 소쿠리는 두 다리로 직립하여 서 있다. 이 때 빈 곳도 덩달아 팽

팽하게 긴장하여 일어서는 느낌이다. 그 비어 있는 자리는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결핍이지만 그 자체로 일어설 수 있다는 점에서 부재일뿐이다. 결

핍이 있어야할 것이 없다고 인식하는 것이라면 부재는 괄호 속에 묶임으로

써 현전現前하지 않지만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부재

를 보아낸다. “ 다리”는 직립함으로써 사물로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한다. 그

러나 “빈곳도 팽팽할 수 있다니”에서 보듯, 한 쪽 다리를 잃고도 두 다리로

결핍을 채워냄으로써 빈자리는 부재의 기호가 된다. 2연에서 땅바닥을 온

몸으로 밀고 가는 사내의 모습이, “바닥과 구분되지 않는 직립의 생”으로

환치되면서 추락을 견디는 의지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이는 결핍에 대한

인식이 ‘없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완성의 방식에서 오는 차이임을 말하

는 것이다.

  “비어 있는 다리의 힘으로도/ 추락하는 내가 버틸 수 있는 것인지”에서

는 주체가 인식하는 직립의 고달픔을 간접적으로 내비치는데, 이 부분에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3연에서 마침내 “텅 빈 모서리가 공중을 번쩍 들

어올”려 “생의 한쪽이 좌르르 쏟아지고 있다”고 언명함으로써 시인이 애초

에 직립의 의지만을 투박하게 설파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팽팽했던 긴장을 풀고 직립의 생을 다른 방식의 의지로 전환하는 것, 애초

에 비워져 있었으므로 찾지 못했던 부재의 괄호를 풀어 생의 의지로 전환

시키는 일이 이 시가 나가고자 하는 길이다.

  「은유의 다리」는 현존의 건너편을 바라본다. 여기서의 “다리”는 구체성

과 추상성의 양자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날이 저물

었다”고 시작하는 이 시는 차안과 피안의 경계 지점을 향하여 조심스레 다

가간다. 그리고 현존과 괄호로 묶인 부재의 사이에 “은유의 다리”를 놓는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날이 저물었다

발등이 부어올랐다

늦은 저녁 하산하던 사람들

다리 앞에서 잠시 멈춰 서곤 하였다

 

부은 발등 주무르며 생각한다

지난 생에서 우리 한 번은

이 다리를 함께 건넌 적이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번 생에서 당신은 저쪽 나는 이쪽에서

단 한 번은 마주치지 않았을까

 

비틀리고 휘어지는 우련한 몸으로

이쪽과 저쪽에 걸쳐진 나무다리처럼

그 시간은 높이 보다는 깊이에 속하는 것이어서

다만 스쳐갈 뿐이었을 텐데……

 

얼마나 많은 이별의 하중들을 견디고서야

저 다리는 해탈에 들어서는 것일까

이별은 시간의 직유가 아니라 은유이다

다리의 이쪽에서 혹은,

지난 생과 이번 생의 차이에서 보자면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다

 

무거운 걸음으로 오늘 저녁 사람들이 은유의 다리를 건너갔다

언젠가는 그토록 오래 외로웠던 당신도 돌아가리라

 

하루가 또 하루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당신을 건네주고 다리는 내내 고요하리라

 

부은 발등 주무르다 드는 생각

다리를 견디게 하는 힘은 우연한 바람이 아니라

그토록 오래고 긴 이별의 은유이다

                                   - 신현락,「 은유의 다리」전문

                                    (《우리詩》2010년8월호)

 

 

  발등이 부은 사람들 앞에 다리가 놓여 있다. “발등”은 곧바로 신체성의

‘다리’에 인접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다리”는 이중의 의미부여가 이루어

진다. ‘다리’는 나를 운반하는 신체에 속해 있는 몸의 일부분이고, 한편으

로는 물질적 도구로서 골짝의 양안兩岸을 연결해 주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

이동을 통한 ‘운동’과 연결을 통한 ‘지속성’의 의미가 동시적으로 작용하

는 셈이다. 그러므로 ‘다리’는 현존과 부재의 틈에 끼어 생의 정체성을 형

성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이 시에서 “다리”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만남’은 현존의 다른 이름

이고 ‘이별’은 부재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부재는 없는 것, 즉 절대 무無

가 아니라 단지 만나지 못하는 상태일 뿐이다.

  흔히 몽상의 시간은 초월적 계기를 마련하는데, 주체는 하산 길에서 부

은 발등을 주무르다가 부산하게 흩어지는 사람들과 그들의 운동에 지속성

부여하는 “다리”를 바라본다. 다리가 없었다면 그들의 진행은 단절되고 말

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지속적인 진행 과정에서 스쳐지나가는 인

연이 개입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스쳐지나가는

인연과 동시에 이별도 진행되었음을 알지 못한다. 그 가운데 “당신”이 있었

을 것이다. 나는 당신을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으나, 언제 이 다리 위에서

스쳐지나갔는지, 또는 진지하게 이별 의식을 치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다

리 위에 서 있는 현존의 지점에서 부재하는 “당신”을 느끼고 있다. 그 틈에

다리가 놓여 있다. 따라서 “다리”는 당신과 나를 매개하는 “시간의 은유”이

자 “이별의 은유”가 된다.

  시의 뒷부분인 “하루가 또 하루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당신을 건네주

고 다리는 내내 고요하리라”에서 보듯이, 결국 이 시는 이별과 부재를 등가

적으로 연결시키며, 부재가 이루어지는 생 자체를 어둡지 않게 긍정한다.

슬픔에서 힘을 얻는 유미적인 감수성과 함께 현존의 너머를 동경하는 시인

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4. 부재를 견디는 방식

 

  대체로 부재를 견디지 못해 상처 받는 날들이 많다. 「나는 당신을 아껴

먹고있다」고했을때, 나는 당신을 내 눈물로 핥아먹고 있다는 말이다.「 중

독성 슬픔」에서 보여주는 바, 슬픔도 중독이 되듯이 당신의 부재를 견디기

위해서는 더 지독한 중독의 상황이 필요하다.

 

 

너는 독하잖아

그런 말에도 슬픔이 밀려올 때가 있다

4·19 새벽이었고 비가 조금 내렸다

나는 개인적인 일로 치욕을 느꼈다

무의식이 아픈 새벽, 장기하의 노래처럼

당장 당신을 만나고 싶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한테는 노래가 있다

섹스보다 음악이 위로가 될 때

 

마리안느 페이스풀의 같은 노래를 계속 들었다

새벽 세시에 듣는 This Little Bird는 독주 같았다

 

빼갈처럼 혹은 전갈처럼 음악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같은 노래를

평생이라도 같은 자세로 들을 수 있을 듯

 

그런 방식은 그런 자세는 너무 고전적인가

당신이 나는 궁금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수십억 광년이라도 똑같은 노래로 똑 같은 자세로

나는 당신을 아껴 먹을 수 있다 혁명처럼 숭고하게

                          - 권현형,「 나는 당신을 아껴먹고 있다」전문

                           (《시안》2010년여름호)

 

 

  화자는 “개인적인 일로 치욕을 느끼는” 새벽에 “너는 독하잖아”와 같은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을 상기하는 것 자체가 곧바로 슬픔을 밀려들게 하는

것으로 보아, 역설적으로 독하지 못한 내적 상태를 나타낸다. “4·19 새벽

이었고 비가 조금 내”린 것과 상관없이 지극히 개인적이며 좌절된 무의식

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당장 당신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

다. 이는 당신의 부재를 뜻한다. 화자는 부재를 독하게 견디는 방식으로 음

악을 택한다. “섹스보다 음악이 위로가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음악에서 위로를 받는 것이 “우스운 이야기”가 되는가. 그것은 당신이

내가 위로받는 방식에 대하여 오해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후 2연과 3연은 비슷한 구문이 병렬되지만 의미상으로는 대립된다. 2

연은 화자가 중독성의 슬픔을 견디는 방식으로 음악을 듣는데,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같은 노래를/ 평생이라도 같은 자세로 들

을 수 있을 듯”이 반복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음악이 위로

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 독한 앓음을 더 독하게 앓게 하리라는 것을 느낄

수있다. 그것은 “독주毒酒”처럼 “빼갈처럼 혹은 전갈처럼”, “ 몸속으로 파고

들”면서중독성의 슬픔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 마리안느페이스풀”은 천사

처럼 앳된 얼굴을 하고 음울한 색조의 이별 노래를 불렀으므로.

  3연에서 “당신이 나는 궁금하다”고 한다. 술에 취하듯 음악에 중독되는

것처럼 똑 같은 자세로 나는 당신에게 중독될 수 있으므로. “ 수십억 광년이

라도 똑같은 노래로 똑 같은 자세로/ 나는 당신을 아껴 먹을 수 있다”고 한

다. 여기서 아껴 먹는다는 것은 당신이 음악처럼 자꾸만 재생될 수 없는 유

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충족과 부족의 애매한 처지에 있는데

이조차도 앞의 “4·19 새벽”과 연결되면서 “혁명처럼 숭고”한 행위로 비

쳐진다. 다만 부재하는 당신이 나는 궁금할 뿐이다. 중독성의 사랑은 너무

나 일방적이어서 팜파탈의 상황까지도 예견할 수 있는데, “ 너를 아껴먹는”

일의 위험성이 혁명에 비유되는 까닭이다.

  대상을 음식과 같이 먹는다는 구순성의 욕구는 오랫동안 성적인 비유로

사용되어왔다.「 팜파탈」은 너를 완전히 먹어치워 내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

는 사랑의 중독성을 보여준다. 이는 부재의 상황이 오기 전에 가로막는 행

위로 “나를 안고 있는 한/ 벗어 날 수 없을 거야”에서 보듯 대상을 완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분출이다.

 

 

나를 안고 있는 한

벗어 날 수 없을 거야

당신을 먹고 싶어

갈색 햇살에

당신 등이 말라가는 게 느껴져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신을 먹으면

나는 비로소 당신이 되는 거지

두려워하지 마

꿈을 꾸며 날던

푸른 두 날개는 먹지 않을게

아름다워라!

파르라니 떨리는 잎맥 같은 날개에 온기가 남아 있네

내 사랑을 지독하다고 말하지 말아 줘

당신,

남은 두 날개로

나를 안고 날아가 줄래

                         - 손수진,「 팜파탈」전문

                         (《시와사람》2010년여름호)

 

 

  화자인 나는 당신을 내면화 하는 방법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신을

먹으면/ 나는 비로소 당신이 되는 거지”와 같은 발상을 가지고 대상의 부재

의 가능성을 삭제하려 한다. 이 시는 사마귀(버마재비)가 교미 후에 수컷을

잡아먹는 비유적인 예를 통하여, 대상의 완전 소유를 욕구한다. 그렇지만,

“꿈을 꾸며 날던/ 푸른 두 날개는 먹지 않을게”라고 말함으로써 대상을 흔

적도 없이 먹어치우고자 하는 완전성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남겨진 푸른

두 날개를 보고 “아름다워라!”라고 했을 때조차, 이걸 그냥 둘 수 없다는 판

단에 이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두 날개로 어디론가 날아가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독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당신,/ 남은 두 날

개로/ 나를 안고 날아가 줄래”라고 요청함으로써 남은 두 날개조차 소유하

려 한다.

  사랑의 중독성은 아껴 먹어도 늘 갈증인 상태로 남기 때문에 허기가 진

다. 그러나 완전히 소유한다고 해도 다시 부족한 것이 생겨남으로써 여전

히 반복적으로 충족의 상태를 갈구하게 된다. 사랑의 특성 자체가 부재를

인정하지 못하고 항상 결핍에 매달리는 신경증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어떤

남성이나 여성이 칭얼거린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랑이 아직 충족되지 못했

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집착은 대상에게 치명적인 피로와 권태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완전 소유 욕구는 오히려 대상 부재의 상황으로 몰고갈

위험이 있다.

  양애경 시인이「내가 암늑대라면」에서 “그리고 다음 해 봄에는/ 다른 수

컷의 뺨을 깨물 거다/ 평생을 같은 수컷의 씨를 품는 암늑대란/ 없는 거니

까”와 같이 말했을 때, 야생적이며 원형적인 사랑의 한 방식을 언급한 것이

다. 여기에는 사랑이 갖는 건강함을 바탕으로 원초적 통일성이 부여되어

있다. 반면에「너와 함께 - 핵 위험 시대의 교제법」은 길들여지지 않는 사

랑이 가져오는 폭발성이 잠복되어 있다. 제목에서 환기하는 바,“ 너와 있는

것”은 핵 위험 시대에 폭발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같다.

 

 

네가 있는 것이, 내게는 재앙이야

잠도 못 자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깃마다 허연 부스러기가 묻어 떨어지지도 않아

너랑 한 번 문지르면 지독한 냄새가 배어

씻어지지도 않아

너는 길들여지지 않으니까

너는 세상의 질서를 네 식으로 바꾸니까

 

너와 함께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힐끔거리며

저만큼 피해 지나가지

 

그렇더라도, 네가 있는 것이 좋아

그렇더라도,

그렇더라도,

너와 있는 것이 좋아

너와 있는 것이 내게 재앙이라도

 

지구가 쾅! 하고 한 번에 사라진다 해도

너와 함께 간다면 괜찮아

 

그날

바다 위에 증발한 수증기처럼

우리 분자 구조가 섞여 버리지……

                 - 양애경,「 너와함께- 핵 위험시대의교제법」전문

                  (《시와시학》2010년여름호)

 

 

   “네가 있는 것이, 내게는 재앙이” 되고 사람들이 나를 “저만큼 피해 지나

가지”만, “ 그렇더라도,/ 그렇더라도,/ 너와 있는 것이 좋”다고 거듭 강조해

서 말한다. 1~3연에서 제시되는 바, 너와 함께 있는 것은 너의 길들여지지

않은 예측 불가함, 청결하지 못한 느낌, 그리고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을 감

수하는 불편한 일이자 재앙이다. 그러나 “지구가 쾅! 하고 한 번에 사라진

다”해도 “너와 함께 간다면 괜찮아”라고 확고하게 말한다.

  “핵 위험 시대의 교제법”은 의미가 이중으로 겹치는데, 하나는 타인에게

핵 위험 시대의 교제법을 안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체의 사랑에 대

한 자기 다짐과 확인을 보여주는 것이다. 흔히 사랑은 팜파탈의 위험성을

노출하게 되는데, 이 경우의 폭로와 폭발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그날/

바다 위에 증발한 수증기처럼/ 우리 분자 구조가 섞여 버리지……”에서, 현

존하는 개체로서의 질서 개념을 부정하고 “분자구조”가 섞여 하나가 됨으

로써 양성구유의 완전성에 도달한다. 이로써 개체가 추구했던 소유를 통한

충족의 개념이 사라지고,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불행하게도 대상에 대한 욕망의 엔트로피가 소진되었을 때 사랑은 더 이

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화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결핍을 인식하고 부재를 현존으로 바꾸고자 하는 의지 작용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사랑의 충동은 자기 파괴적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렇더라

도, 일반적으로 폭발을 예비한 대상 추구는 항상 두렵고 긴장되는 일이다.

그래서 용기 있는 사람만이 부재를 인정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불바다에 뛰

어들 수 있는 것이다.

 

 

 

  5. 텍스트의 상호 개방성

 

  지금까지 “현존과 부재의 틈에 관한 은유”라는 제목으로, 일곱 편의 시를

텍스트상호성(intertextuality)의 측면에서 읽어 보았다. 텍스트가 가진 개

방성으로 인해 각자의 은밀한 속살을 드러내면서 필자의 경험적 요소를 받

아들였고 의미적으로 다른 시인들의 경험 세계와 연결되었다. 앞에 오는

시는 뒤에 오는 시를 향해 길을 터 주었고, 뒤에 오는 시는 앞의 시를 변호

해 주었다. 읽기의 과정에서 필자의 주관과 경험적 요소가 지나치게 작용함

으로써 엄밀한 시 읽기를 방해받은 감이 없지 않다. 이 글의 미흡한 점이다.

  이밖에도 이 글에서 거론하지 못한 텍스트의 쌍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이들 텍스트의 내부에 글쓰기의 방식으로 잠입하지 못한 아

쉬움이있다. ① 권순자「달과개」, 박부민「생선의중앙」(《우리시》2010년

8월호) ②장석원「육체의배웅」(《시로여는세상》2010년여름호), 배용제

「바람의내부」(《시안》2010년여름호) ③김지헌「고양이엄마」(《우리시》

2010년8월호), 정경란「고양이와소녀」(《시와사람》2010년여름호)

 

 

 

 

 

 

  염창권

* 시조(동아일보, 1990)와 시(서울신문, 1996) 등이 신춘문예에 당선.

* 시집으로『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햇살의 길』이 있음.

   비평집으로『집 없는 시대의 길가기』가 있음.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 gilgagi@hanmail.net

 

  

 

출처 -우리시회 http://cafe.daum.net/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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