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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표절은 어떤 양상인가
이승하
소설가와 평론가가 표절을 하고 있는 동안 시인은 다들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작품 창작에 열중하고 있었던가. 천만의 말씀이다. 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모작이다 아니다 하는 시비를 불러일으킨 시는 꽤 많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테니슨의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와 바이런의 「대양」을 차용했다는 주장, 김기림의 「기상도」가 엘리엇의 「황무지」를 흉내낸 작품이라는 주장, 박인환의 「열차」가 스펜더의 「급행열차」를 모방했다는 주장,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엘뤼아르의 「자유」와 비슷하다는 지적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예는 외국 시의 영향을 '조금' 혹은 '꽤 많이' 받았다는 정도에서 시비를 끝낼 정도이지 표절 운운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리고 시 창작방법 가운데 중요한 '패러디'로 논의가 진전되면 '영향받음'이란 것은 더욱 유연한 자제를 취하게 된다. 문학인은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남의 작품을 얼마든지 재해석·인용·조합할 수 있으므로 표절 운운이 그만 무색해지는 것이다.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한 3편의 시를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규원, 「<꽃>의 패로디」 부분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장정일,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부분
나와 섹스하기 전에는
그녀는 다만
하나의 꽃에 지나지 않았다
나와 섹스를 하고 난 후
그녀는 더 이상 꽃인 체하지 않는
利子가 되었다
----장경린, 「김춘수의 꽃」 부분
이런 시는 원 텍스트를 두고 재미있게 변주한 행위로, 즉 패러디를 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표절을 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시는 패러디로 보기 어렵다. 우선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과 젊은 시인의 시 한 편을 읽어보자.
Ⅰ
나는 한낮의 성숙한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를/보았다. 나의 것인 뜨거운 꿈 하나가/그 근처에 벌써 앉아 있었다./구름의 흰 살에 일어나는 물결들.//나는 원했다. 삶의 한 순간의 質인/강렬한 빛의 혼례를. 설레이는 분만의 풍경을./끝없이 겹쳐 오는 모든 계절들의 힘을.//더럽혀진 풀의 형상으로/대지의 낮은 중심에서 새들이/눈뜨고 있었다. 빛 한가운데로/소리의 騎士가 말 달리며 지나갔다.//바람이 불어온다. 흩어져라. 단단한/풀씨들이여. 사랑의 熱들이여./날아올라라. 한없이 힘센 세력이여. 흰 욕망들이여.//나는 부풀어갔다. 장엄한 문양과 내 꿈이/숨쉬는 따뜻한 열이 나를 상승시켰다./풀이 일어선다. 녹색의 무리들, 삶을 환히/밝혀주는 불붙는 표피여.//나는 부끄러워 눈물 흘렸다. 내 꿈은/나에게 입맞추어주었다.
Ⅱ
삶을 준비하는 자가 새를 날려보냈다. 어둠 속으로/새는 젖혀진 밤의 골목으로 날아갔다. 새는/무너진 너의 슬픔 위로 떨어졌다.//그의 흰 깃이 남긴 무늬의 물결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어두운 숲의 한 가지에서/태어나는 불꽃처럼 밤은 빛나는/몇 개의 눈을 뜨고/우리는 숨의 증기인 눈물을 흘렸다.//두 번째 새는 돌아오지 않았다. 문법 바다의/가장 서늘한 심연에서 이마에 불을 단/우스꽝스런 심해어인 사랑이/헤엄치고 있었다. 지상의 어두운 골목에서/새는 차갑게 불타고 있었다.//노아의 세 번째 비둘기는/황금빛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왔다…….//이제 삶은 신성한 停止이며,/그의/그림자인 풍경만이 변모한다./그의/입김인 바람은 흩어진다. 소리의 철책 사이에서.//새여,/슬픔의 첨탑 위로 떨어지는 푸른 입술이여…….
----장석, 「풍경의 꿈」 전문
1
나는 벌거벗은 하늘을 흐르는/빈 강물을 보았다/산수유 숲의 새 한 마리가/바람 따라 하늘 한 모서리에/앉아 있었다/구름의 가슴을 열어 일어나는/혈맥의 무리를//나는 노래했다. 살아 있는 풍경을/긴장한 육신의 정물을/밀물처럼 몰려오는 물상들의 힘을//새는 날아오르는 구름의 형상으로/지상의 낮은 곳에서 낮게만/날고 있었다. 바람 한가운데로/한 폭의 여인이 소리 없이 걸어가고/비가 온다. 빈 가슴의 눈물로 온다/ 젖어라. 건조한 畵筆이여/진한 꽃잎들이여/날아오르라. 날카로운 부리의 새여/흰 욕망의 깃털들이여//나는 눈뜨고 있었다. 더운 꿈과/미더운 내 붓의 물기로/山이 일어선다. 숲의 무리를/삶의 물상들을 아프게 밝혀내는 연한 속살들이여//나는 숲 속에서 부끄러웠다/내 山도 나를 낳지 못했다
2
삶을 연습하는 자가 山을/일으켜 세웠다. 새는 별빛 먼 숲을 위해/지상의 막다른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그의 젖은 입술이 남긴 아름다운/입맞춤으로도 그려지지 않은/파랗게 물오른 팔뚝의 한 가지에서/너는 풀씨처럼 눈을 감았지만/어둠은 여전히 안개를 퍼올리고//그래, 새는 다시 山을 날지 못했다/오밀조밀한 숲의 호흡을 헤집고/이마에 불을 단 반딧불 같은 사랑이/날고 있었다. 지상의 마지막 꽃잎이 질 때도/너는 차갑게 일어서고 있었다//네 최후의 기쁨으로 완성한/유채색 수풀의 고요 밖/물상들은 눈을 뜨며/한 마리 새를 지상으로 날려보냈다//이제 삶은 신성한 집중이며/숲의 그림자인 안개는 풍경 속으로 풀어진다/새의 호흡인 물소리도 잠들지 못한다/네 빛나는 눈물 사이에서//山이여,/슬픔의 입술 위로 떨어지는 푸른 물방울이여
----강희안, 「살아 있는 풍경」 전문
문학사상사를 통해 1996년에 낸 강희안의 시집 『지나간 슬픔이 강물이라면』에 실려 있는 이 작품의 어느 구석에도 장석의 당선작을 패러디해서 썼다는 말이 없다. 그러므로 이 시는 내가 보건대 완전한 표절작이다. 낱낱의 묘사에서 행 구분·연 구분은 물론 전체적인 구성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모방한 작품이다. 1965년 생 시인의 첫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살아 있는 풍경」의 표절 여부에 대해 지금껏 그 어느 평론가도 언급하지 않고 있기에 내가 나서서 몇 마디 하고자 한다.
「풍경의 꿈」이 신춘문예에 당선된 1980년 무렵은 신춘문예 당선작품집이 따로 발간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신문지상에만 실렸을 뿐이다. 장석이란 이름의 시인은 이 작품을 발표한 뒤 후속 작품을 1편도 발표하지 않고 문단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지방에서 수산업을 하는 사업가가 되어 문단에서는 금방,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풍경의 꿈」이 어떤 작품집에 실려 계속 읽혀지고 논의되었다면 강희안 시인은 표절할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그리고 장석이 계속 작품 활동을 한 시인이라면 또한 표절할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표절한들 누가 알아서 지적하랴 강 시인은 생각했겠지만 1980년 <조선일보> 당선작을 대학 노트에 필사해둔 나의 눈에 띄고 말았으니 그로서는 무척 불행한 일이리라.
『지나간 슬픔이 강물이라면』의 해설을 쓴 이는 시인 신경림이다. 해설문의 제목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아무도 흉내내지 않았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시'이다. 신경림 시인이 이 작품 둘을 지금이라도 동시에 읽는다면 가슴을 칠 것이다. 해설의 일부를 적어본다.
경박하고 천덕스러운 말장난이 신세대 감성의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때에 어떤 시류에도 휩쓸리지 않고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사고하고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가히 믿음직스럽다. 그의 시는 아무도 흉내내지 않았고, 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로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는 남을 흉내낸 것도 아니고 남이 흉내낼 수 있는 것도 아닌, 오로지 그만의 세계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강희안의 시적 가치이자 앞으로 그가 지속적으로 추구해가야 할 시적 방향으로 볼 수 있다.
표절작을 읽고 이런 말씀을 하고 있으니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우리 문단이, 우리 문학이 난센스로 뒤범벅되어 있다는 참담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전도가 양양한 강희안 시인을 위해 한 마디의 변호는 해주고 싶다. 습작기 때 모작을 하는 행위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렇게 한번 남의 작품에 심취하여 흉내를 내 써보았던 작품을 시집을 낼 때 버리지 않고 넣는 실수를 그가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과거 신춘문예 당선작의 낯익은 구절과 구성 방법이 나오니 내 변호의 목소리는 그만 힘을 잃게 된다.
의욕을 가지고 이 잡듯이 표절한 시를 찾아내는 작업을 하면 아주 많은 사례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과거에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대학문학상 수상작(둘 다 시였다)이 완벽한 표절작임을 발견한 적이 있었고, 70년대까지 중·고등 학생들이 애독한 <학원> 문학상 당선시도 표절작이어서 혀를 찼던 적이 있다. 추리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성종의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경찰관」이 알베르 카뮤의 소설 「손님」의 표절작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들 사례는 내가 발견할 것일 뿐 대부분의 작품에 대해 표절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많은 표절이 행해지며 그것이 밝혀지지 않고 묻히고 있는 것일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는가
그 예술 작품을 빚어내는 질료가 언어이든 붓과 물감이든 악보이든지 간에 완전무결하게 창조적인 것을 어떻게 인간의 손으로 만들 수 있으랴. 후배는 선배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며 제자의 스승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영향'과 '표절'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한 창작 기법으로 혼성모방(pastiche)이란 것이 있다. 혼성모방 덕에 이 작품 저 작품 내가 잘 조합하여 발표하면서 내 작품이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되었다. 이인화는 그래도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세상에 내놓은 뒤 자신의 본명인 류철균이란 이름으로 어떤 식으로 남의 작품을 적절히 혼성모방을 했는지 밝힘으로써 비양심적인 행위가 아니었다고 자기 변호를 했다.
하지만 혼성모방이, 나아가 표절이 지금처럼 음으로 양으로 만연된다면 작가는 새로운 작품 창작을 위해 고뇌하는 장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골동품 수집가가 되어야 한다. 도둑질을 얼마나 교묘하게 잘하느냐가 그 작품의 우수성을 재는 잣대가 된다면, 표절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묻히는 사례가 많다면, 우리 문학의 앞날은 지금보다 더욱 암담해질 것이다. 문단이 이런 저질 놀음을 하고 있는 동안 영상 매체는 나날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넋을 빼놓고 있지 않은가.
친일 문학인들의 해방 이후 행로가 그러했듯이 우리 문학인은 지난날 과오가 있었을지라도 누구도 그것에 대해 인정하고 반성을 하려 들지 않았다. 21세기에는 이 땅의 문학인들이 바로 이 점을 생각하면서 펜을 들어야 할 것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란 말을 만들어낸 옛 사람의 지혜가 나부터 많이 부끄럽게 한다.
[표절하는 자들의 나라에서 사는 부끄러움_이승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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