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사진, 아름다운 환상 / 오강석

by 丹野 2010. 8. 24.

  p r a h a

 

 

사진, 아름다운 환상

 

                                                                                                                        오강석

 

 

 

■도대체, 사진이란 무엇인가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떠 털 대신 영혼을 가진 동물을 창조했다. 최초의 인간은 신의 ‘형상’이라는 이미지의 산물이었다. 한 단계 거슬러 올라가면 태초에 하나의 이미지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최초의 인간이 외로움을 호소하자 신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야 했다. 두 번째 인간은 유일신과 유일인간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외로움’을 나눈 결과물이라는 얘기다.(청원과 허가의 과정이 커뮤니케이션의 전형적 유형이라는 점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용어가 라틴어의 ‘나누다communicare’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두 번째 인간이 출현하면서 커뮤니케이션에 혼선이 생기기 시작했음은 구약의 창세기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외로움은 새로운 외로움을 복제하고서야 치유 되었으므로 인간은 복제를 거듭하였고, 결과적으로 천지에 충만하라는 신의 당부를 지켰다. 이후의 인류문화사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지식의 80%를 보는 행위를 통해서 습득한다. 크로마뇽인들이 점과 선으로 음성언어의 ‘의미’를 동굴의 벽에 ‘고착’시킨 것을 시작으로 ‘의미’와 ‘정서’를 시각적으로 공유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그림, 문자언어, 사진, 활동사진, 3D애니메이션 등을 거쳐 마침내 0과 1이라는 단 두 개의 단어를 구사하는 컴퓨터의 ‘기계언어’를 발명해내는 데까지 진화했다.

이미지의 원초적 형태인 ‘사진’이라는 용어는 ‘영상’과 ‘이미지’의 경계를 넘나들며 갈수록 사용 범위가 확산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프린트된 이미지는 ‘사진’으로, 기타의 형상은 ‘이미지’로 표현한다. 그러나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사진의 발명국인 프랑스의 ‘사진전시회’에서 촛불의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보는 관람객은 그 작품이 어떻게 사진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지 헛갈릴 것이다. 90년대 말, 신문사 사진기자였던 나는 인사동 한 화랑의 형체가 해체된 사진 앞에서 당혹스런 의문에 봉착했다. 도대체, 사진이란 무엇인가?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사진을 ‘오래된 진실’과 ‘진실의 유령’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진은 순간의 ‘진실’이고, 촬영되는 순간 숙명적으로 ‘과거’가 되므로 사진의 현재는 유령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처럼 단순한 기준으로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수십 년 카메라와 함께 생활한 내가 인사동의 화랑에서 “도대체…?”라고 중얼거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진’은 너무나 많은 아이콘을 가지고 있는 변신의 귀재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은 달아난다.”는 말로 종내 사진의 정체성은 ‘분류 불가능’이라고 선언하게 된 배경이다. 그는 같은 책의 다른 장에서 “이 나라(미국)에서 모든 것은 이미지로 변모된다. 이미지들만이 존재하고 생산되고 소비된다.”고 말했다. 그의 지적은 명쾌했고, 이후 그런 현상은 더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뉴욕의 포르노 극장에는 악덕은 없고 그림만 있다.”는 그의 비유는 적절하지 못하다. 이는 고야의 그림에는 “‘잔혹’만 있고 ‘도덕’은 없다.”거나, 엥그르가 ‘오달리스크’에서 “모델의 허리를 ‘사실’보다 더 길게 그렸다.”고 비난한 고전주의 화가들을 연상케 한다. 포르노그라피는 다큐멘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상징체계를 갖고 있다. 이미지는 천수관음千手觀音의 천 개의 손과 같은 개별적 인식 작용이면서 동시에 천개의 감각을 관류하는 하나의 인식인 것이다.

이미지로 태어나 이미지로 소비되는 디지털시대의 사진은 초기의 즉물주의 사진가들이 규정해놓은 ‘사실’이라는 굴레를 탈출해버렸다. 디지털이미지의 가변성과 시각적 표현 양식의 확산이 필연적으로 결과한 현상이다. 20세기 말까지는 ‘사실이 아닌’ 사진이 부도덕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단서를 붙여야 했지만, 이제 ‘사실이 아닌’ 사진이 부도덕한 것이 되는 경우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경우로 한정된다. 불행히도 롤랑 바르트는 이미지의 미래에 혁명적 변화가 예비되어 있음을 예견하지 못했다.(그는 1980년에 사망했다.) 그의 표현대로 ‘모든 것은 이미지로 변모’되는 오늘날, 우리는 이미 ‘변모된 이미지’와 대화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픽션을 숭배하는 현대인들에게 이미지가 ‘뽀샵pholto shop’으로 화장을 하는 것은 인간이 성형수술을 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묵시적 동의사항이다. “성형하셨습니까?”라고 묻지 않듯, “‘뽀샵’했습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사진은 사실’이라는 등식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간단하고 편리하고 감성적이며 시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십대들의 선명한 이미지 선호 경향은 커뮤니케이션 체계의 변혁을 예견하게 한다. 그 속도는 패스트푸드의 판매량 증가와 비례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지를 보고 듣고 생각하며 이미지와 함께 자란다. 이들이 사회의 중추가 되는 시대에는 이미지가 커뮤니케이션의 지배적 도구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이미지가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동일 문화권에 소속된 사람들 사이에 기호학적 약속 또는 규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미지커뮤니케이션에도 나름의 형식과 문법, 코드, 서사 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지의 의미작용을 해독하기 위해 음성언어나 문자언어의 경우처럼 문법이나 어휘를 배우지는 않는다. 이미지가 생활 전반을 통해 의식과 사고 속에 녹아들어 무의식중에 우리들의 행동양식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텔레비전 광고는 이미지커뮤니케이션의 범용성을 담보하는 확고한 기반이 된다. 2, 3초 단위로 연속되는 시퀀스sequence들은 시청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도록 치밀하게 장치되어 있다. ‘이 화장품을 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미모의 여배우나 섹시한 탤런트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이미지는 동일화 과정을 거쳐 정보 수용자에게 구매욕이라는 정서적 반응을 촉발시킨다. 화장품 광고 이미지의 함의를 문자언어로 번역하면 ‘당신도 이렇게 예뻐질 수 있다’가 된다. 수많은 광고 전문가들이 이미지커뮤니케이션의 어휘를 개발하고 문법을 규정하고 있다.(일련의 작업이 정상적인 의미관계를 해체하여 이미지 자체만을 소비하게 한다는 비판에 대해 논하려면 따로 멍석을 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지와 은밀하고도 복합적으로 연관되어지고 있다. 이미지를 전유하고 있는 매체가 의도한 접근방식대로.

 

 

 

 

 

 



■변화의 범주에는 문학도 당연히 포함된다.

 

플라톤이 이백李白과 만난다면? 『이상국가』에서 ‘과장’과 ‘허구’를 양산하는 시인들을 추방해야한다고 강변하던 플라톤은 이백의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 한 수에 영원히 함구해버릴 지도 모른다. 플라톤 이후 2400년이 지난 지금도 시인의 시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시인의 언어와 이미지의 아이콘은 상징성, 비결정성, 모호성, 감각적 장치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명확성의 대명사인 사진이 어떻게 모호한 전달 체계를 갖게 되는가. 이에 대해 마르틴 졸리는 『이미지와 해석』에서 “한 장의 사진이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사진 자체가 망각될 만큼 강력한 환상적인 힘이 보는 행위를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픽션효과’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진이 망각되는 순간은 상징적, 비결정적이고 모호하면서 감각적인 ‘환상’이 생성되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수용자의 의식에 투영된 이미지가 다양한 추체험의 형태로 인지된 ‘환상’을 형상화하는 방식은 기존의 장르를 붕괴시키며 새로운 시도를 촉발한다. 그 하나가 디지털문학이다. 디지털문학은 음악 사진 영화 등 여러 분야의 예술 또는 그 표현 형식을 결합하여 새로운 미학을 추구하는 하이퍼텍스트와 하이퍼미디어 형태의 문학이다.

시 분야에서도 디지털이미지를 시와 접목시키려는 일련의 실험이 진행 중이다. 이는 사진적 이미지를 문자로 표현한 시와 문자의 기능을 축소시키고 그 자리에 사진을 배치한 시의 형태로 대별할 수 있다. 그중 문제가 되는 것은 ‘디카시’라 불리는 후자의 경우다. 이미지와 시를 병치시키거나 또는 이미지의 캡션caption을 연상시키는 텍스트가 ‘언어 너머의 언어’로서 ‘실험’ 이상의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1990년대에 화려하게 개화한 하이퍼텍스트의 급속한 몰락은 독자들의 외면으로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이라는 컨셉이 깨진 때문이었다. “도처에서 날시raw poem가 자신을 포착해줄 시인을 기다리고 있다.” 이상옥(창신대) 교수의 말이다. 대한민국의 휴대폰(거의 모든 휴대폰이 초기 디지털카메라 수준의 기능을 탑재하고 있다.) 4천만 대 중 일부가 ‘시적 표현’을 위해 동원될 수도 있는 ‘상호작용’의 광대한 저변은 주목할 만하다. 진화의 어느 단계에서 ‘디지털이미지’만으로 된 시가 출현하고 우리는 이를 ‘자연선택’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은 신문사진에서, 휴대폰 영상에서, 광고 시퀀스 속에서 끊임없이 사진을 ‘환상’으로 환치시킨다. 현대사회는 수많은 사진(이미지)의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대인들에게 사진은 섹스 이상의 실존적 명제가 되고 있다. 문화가 욕구충족의 방식이라면 사진이야말로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화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아직 오래된 의문 하나를 풀지 못했다. 다시, 사진이란 무엇인가?

 

 


  오강석 / 194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신문사 사진기자로 활동했으며, 2007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여행기 『아! 사하라』, 『다시 가 본 베트남』 등이 있으며 현재 인스쿨갤러리 학예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1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