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眞상像의 내면화
조영미
장맛비 억수로 쏟아지던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딱 한번 마주친 남자
난 쓰레기에요, 술 냄새로 중얼거리던 남자
허술하게 묶은 쓰레기봉투처럼 흐느적거리며
십 오층 단추 좀 눌러달라던 그 남자,
그날 밤
마흔 아홉 해 동안 쌓아두었던 생을
베란다 밖으로 던져버렸단다
생의 부스러기 한 조각조차 성한 데 없이
산산조각이 났단다
찢어 진 껍질 사이로 흐르는 진물이 새벽길을 내고
청소부보다 먼저 온 날벌레들이
동도 트기 전부터 아우성 치고 있었단다
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잔디밭에 세워둔 팻말 위에서...
- 한옥순 「15층 남자 쓰레기 버리는 방법」, 「우리시」 2010. 7
약육강식'의 생존법칙이 너무나 극명하게 나타나는 이 사회에서 우리가 보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이유야 어떻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어린아이를 성폭행하고, 금품을 갈취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그뿐인가. 보험금을 타기 위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자기의 부모를 죽음으로 내몬다.
누군가의 "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경고성 팻말에도 불구하고 한옥순의 "남자"는 자신의 죽음조차 "쓰레기"로 규정해버렸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죽음에 무신경하다. "마흔 아홉 해"를 "약육강식의 잔인한 법칙 속"에서 살아왔을 "15층 남자"가 "난 쓰레기예요"라며 자신을 쓰레기와 동일시했을 때, 우리는 왜 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15층 남자"가 선택한 자살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죽음은 시적 화자에 의해 소문처럼 전해진다. 이때 타인의 죽음이 몰고 온 충격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다시 말하자면, 타인의 죽음이 나와 무관할 때 우리는 그의 죽음을 하나의 뉴스거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최소한의 예의는 나와의 관계맺음에 따라 그 강도가 달라진다. 죽음이 거창한 것은 아니겠으나, 타인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나아가 삶을 포기하는 일이 없는 사회, 상대를 배려하고 말을 아끼는 사회는 김행자의 시적 화자처럼 "차별 없는 저 높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야만 가능한 일일까.
- 시와 산문 2010년 가을호 계간평'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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