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주차
사이버시창작교실
작품의 定型性
나호열
시에서 直喩가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서서히 隱喩도 換喩에 자리를 내어 주고 있는 형국이다. 시대의 환경이 바뀌고 그 변화에 응전하는 사유의 방식 또한 예전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 시만 그런 것이랴, 소설이 그렇고 수필 또한 그렇다. 우리에게 익숙한 반전의 기법이나 패러디도 너무 자주 쓰이다 보니 그 효용이 예전만 못하다.
독자들이란 대체로 참을성이 없고 작품의 흠집을 너그러이 넘기지 않는다. 입맛에 맞지 않거나 때깔이 곱지 못하면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집어 넣어버린다. 그래서 요즈음의 작가는 독자를 훈수하겠다고 섣불리 덤비거나 콜럼부스가 발견한 아메리카를 신대륙이라고 우기다가는 - 서양인들에게나 신대륙이지 수 천년 동안 아메리카는 인디언의 땅이었다- 참담한 낭패감을 견디기 힘든 역경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누구보다도 투철한 자기 문학의 정의와 자기가 선택한 장르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시가 압축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구조를 무시하거나 사유의 논리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장르라고 해서 잡다한 일상사를 미담으로 엮어내는 일 또한 탐탁하지가 않다. 현악기의 현을 팽팽하게 당기지 않으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듯이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의 내용과 그 내용을 분출해내려는 욕구, 그리고 그 욕구를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정제하고 참아내는 내공이 긴장을 이루지 않으면 좋은 글을 생산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욕구와 안으로 감추려는 욕구의 균형감은 작가에게,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덕목 중의 하나이다. 口語의 담화에서 '나는 슬프다'라는 감정의 표출은 聽者에게 곧바로 전달이 된다. 청자는 곧바로 '왜?'라고 發話者에게 되물을 수 있고 슬픔의 원인이나 전개과정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독자에게 發話하는 내용이나 형식은 그와 같은 통로를 갖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작가는 자신의 슬픔을 얼굴의 표정이나 동작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얼굴을 찡그리거나 아니면 눈물을 흘리거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쌈으로써 그의 슬픔을 표현한다. 앞서 말한 감추려는 욕구의 균형감, 정제하고 참아내는 내공의 긴장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슬픔의 내용인 가까운 친지의 죽음이나 불행, 천재지변 등등은 배경으로서만 제시되면 그만인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런 기법이 소통되지 않을 수도 있다 - 예를 들어보자. 한 사람이 얼굴을 감싸고 있다. 그런데 그 장소가 강가이거나 아니면 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나무 앞이라고 하자. 독자는 두 개의 장면을 통해서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한 편으로는 작가의 의도를 살피면서 또 한 편으로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해석과 감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좋은 작품이란 한 마디로 작가와 독자의 감정상의 일치가 아니라 작가가 펼쳐 놓은 장면을 제멋대로(?) 유추할 수 있는 공간이 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의도의 과도한 노출은 작품의 긴장감을 현저하게 약화시키고 작가의 의도를 강요하는 지루함을 발생시킨다. 과거 우리나라 영화를 상기해 보라!
필름이 돌아가고 십 분이 지나면 결말을 뻔히 알 수 있는 스토리의 전개가 얼마나 영화를 감상하는 우리에게 맥빠진 기분을 선사했는가? 마지막까지 결말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복선과 반전의 흐름 속에 영화가 끝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영화의 냉정한 비판의식을 되살려낼 수 있지 않았는가?
이 번호에는 이라크 전쟁에 관한 글이 눈에 띄었다. 한 편의 시는 추측컨대 고 김선일씨를 애도하는 것이었고 또 한 편의 시는 지아비를 이라크 전장으로 보내는 아내의 심정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김선일 씨의 죽음을 비통하게 생각하고 애도할 것이다. 우리는 지면을 통하여 애도와 추모의 글들을 많이 읽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드러내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 비통하고 슬퍼한 까닭이지만, 독자들은 이미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을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왜 이라크의 무장단체는 선량한 외국인을 죽여야만 했는가? 무고한 한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들의 마음은 무엇이었는지? 전쟁은 무엇이고 평화는 무엇인지 등등 시인은 자신이 풀어야할 하나의 화두를 붙잡고서 진지한 자신만의 사색과 결론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 또 한 편의 시에서도 화자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라크 파병의 문제점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바로 이 3자의 위치 설정이 작품의 절실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을- 당사자의 마음보다 제 3자의 마음이 더 절절할 것인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남편이나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야하는 아내나 어머니의 입을 통해서 전쟁의 무의미성과 잔혹함, 삶과 죽음의 문제를 조명하고자 했다면 더 감동을 주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앞 서 언급했지만 작품 구조에서 기존의 많은 기법들은 낡은 것, 진부한 것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른다고 새로운 기법이 뚝딱뚝딱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窮卽通'이란 말이 있다. 글에 모름지기 절실함이 있으면 새로운 기법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신선한 감동을 줄 수 있다. 말하자면 소재의 肉化쯤이 될 터인데,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소재나 주제에 대한 절실함이 있으면, 요모조모 궁구하고 사색의 깊이를 더하면 반드시 글의 윤기가 저절로 돋아 오를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대체로 글의 성숙이 더딘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신의 개성을 지나치게 과신하거나 그러한 과신을 허물어뜨리려는 반성을 하지 않는 데에 있다. 글을 쓰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신이 모르는 자신을 찾아내고 자신의 모자람을 스스로 꾸짖는데 있다. 자신이 모르는 자신을 찾아내는 것, 자신의 모자람을 꾸짖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자기가 택한 장르의 원형이 무엇이었나를 검색하여야 한다. 내가 최초로 글을 쓰고자 했을 때 머릿돌로 삼았던 선대 시인이나 작가, 또 작품이 무엇이었나를 되살려 보면 나의 작품의 성향과 문제점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내 마음 속을 배회하는 또 하나의 나와 대화하는 것에서 글의 진실됨과 절실함이 탄생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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