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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철학 강의

蓋然的 知識 개연적 지식 / 흄

by 丹野 2006. 3. 9.

 

 

蓋然的 知識 개연적 지식

 

 

David Hume 1711- 76

 

18세기 영국의 대표적 철학자. 그의 因果律에 관한 부정적 비판은 칸트를 覺醒시켰다고 한다. 에딘버러 도서관 司書官, 駐佛大使 秘書, 外務次官을 역임한 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人性論』 A Treatise of Human nature, 1739- 40, 『道德 및 政治論集』 Essays Moral and Political, 1741-2, 『人間悟性에 관한 硏究』 An I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748 『道德原理에 관한 硏究』 An I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 of Moral, 1751 등이 있으며, 또 역사연구에도 전념, 『英國史』History of England 1764 의 대작을 남기어 史家로서도 널리 알려졌다.

- 人性論의 제 1권 제 3부 ‘지식과 개연성에 관하여’의 발췌 -

 

제 1 章 知識에 관하여

철학적 관계에는 일곱 가지의 다른 종류가 있다. 즉 類似, 同一, 時間과 空間의 關係, 量이나 質에 있어서의 比率, 어떤 質에 있어서의 程度, 相反, 因果가 그것이다. 이들 관계는 다시 두 가지 部類로, 즉 우리가 비교하는 관념에 전적으로 依屬하는 관계와 관념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될 수 있는 관계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바로 三角形의 관념으로부터 삼각형의 세 角이 二直角과 같다고 하는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우리의 관념이 동일한 동안은 불변적이다. 그와 반대로 두 대상 사이의 接近과 距離의 관계는 그 대상들 자체나 또는 그 관념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단지 그 位置만 바뀌어도 변화될 수 있다. 그리고 위치는 정신이 豫智할 수 없는 허다한 여러 가지 偶然事에 달려 있는 것이다. 동일성과 인과성도 마찬가지이다. 두 개의 대상은 서로 완전히 유사하며 다른 시간에 동일한 위치에 나타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數的으로는 상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이 다른 대상을 産出할 수 있는 힘은 단지 이 대상들의 관념으로부터는 결코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원인과 결과는 우리가 어떤 抽象的 推理나 反省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서 알게 되는 관계임이 명백하다. 어떤 단일한 現象도, 대상이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는 그 대상의 성질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거나 또는 우리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고 豫知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들 일곱 가지의 철학적 관계 가운데에서, 다지 관념에만 依屬하기 때문에 지식과 확실성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네 가지만 남는 것 같다. 이 네 가지 관계란 곧 類似, 相反, 質에 있어서의 程度, 量이나 數에 있어서의 比率이다. 이러한 관계 가운데에서도 세 가지는 첫 눈으로 보아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요, 따라서 論證보다도 오히려 直觀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어떤 대상들이 서로 유사한 경우에, 그 유사성은 정신에 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두 번 검사해 볼 필요가 거의 없다. 相反과 어떤 質의 정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存在와 非存在가 相殺하며 전연 兩立할 수가 없고 상반된다는 것은 도무지 의심할 수 없다. 또 어떤 질의 정도 사이의 차이가 매우 작은 경우에는 가령 色, 맛, 熱, 冷과 같은 어떤 질의정도를 정밀하게 판단할 수가 없지만, 그러나 차이가 상당한 경우에는 그 가운데의 어떤 정도가 다른 정도보다 더 우월하다든지 더 열등하다는 것을 결정하기란 쉽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을 우리는 아무런 연구나 추리도 하는 일이 없이 언제나 첫눈에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量이나 數의 比率을 定할 때에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특히 차이가 매우 크고 현저한 경우에는 우리는 어떤 수나 圖形들 사이의 優劣을 한번 보아서 알 수 있을 것이다. 同等이나 精密한 비율에 관해서는 우리는 단 한 번 고찰해서는 그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극히 작은 數나 매우 제한된 延長의 경우에 있어서는 예외이다. 그러한 것들은 순식간에 포착되며, 또 거기에서는 우리가 어떤 큰 誤謬에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밖에 다른 모든 경우에 있어서는 우리는 약간 자유롭게 비율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거나, 또는 보다 더 人爲的인 방법으로 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리의 連鎖를 복잡한 데까지 계속해 나가되 그러나 완전한 정밀성과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으로서는 代數學과 算術學이 남을 뿐이다. 우리는 수의 同等과 비율을 판단할 수 있는 정화간 표준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러한 관계가 이 標準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이 관계를 결정하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두 數가 서로 결합되어 있되, 그 하나가 언제나 다른 수의 모든 단위에 상응하는 단위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우리는 그 두 數를 동등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하학이 완전한 그리고 절대적으로 확실한 과학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은 延長에 있어서는 그러한 동등의 標準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기하학에는 산술학이나 대수학에 특유한 완전한 정확성과 확실성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기하학은 우리의 感官과 想像과의 불완전한 판단을 능가한다고 하는 것이 나의 주장이거니와, 여기서는 이러한 나의 주장으로 말미암아 일어날지도 모를 곤란을 미리 제거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기하학에 어떤 결함이 있다고 하는 이유는, 그 근본적인 기초원리가 단지 현상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이러한 결함은 기하학에 반드시 따르는 것이며, 이 결함 때문에 기하학은 대상이나 관념을 비교할 때에 우리의 눈이나 상상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정밀성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아 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결함 때문에 기하학이 확실성에 오르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이 결함이 기하학에 따른다는 것을 자인한다. 그러나 이 근본적 진리는 가장 평이하고 또 가장 거짓이 없는 현상에 依屬하는 것이므로, 그 결론에 대하여 그 결론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을 정도의 精確性을 부여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千角形의 각이 1996직각과 같다고 판정하거나 또는 그만한 비율에 가깝다고 推量할 수가 없다. 그러나 눈으로 보아서 직선은 일치할 수 없다던가, 우리는 주어진 두 개의 점 사이에 하나 이상의 직선을 그을 수가 없다던가 하는 단정을 내리는 경우에는. 눈의 오류는 결코 그다지 중대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처럼 기하학은 우리를 현상에로 이끌어가되, 그 현상은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큰 오류에 빠지게 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 기하학의 본성이자 효용이다.

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의 논증적 추론에 관한 둘째 번 소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도 똑같은 수학의 대상에 의하여 암시되는 소견이다. 수학자들은 그들이 대상으로 하는 관념은 매우 精緻하고 정신적인 성질을 가진 것이므로, 상상은 이를 생각할 수가 없고, 영혼의 우월한 능력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지적 관조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와 똑같은 의견은 철학의 많은 부문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요, 또 우리의 추상적 관념을 설명하는데에 이용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二等邊三角形도 不等邊三角形도 아니며, 도 邊이 어떤 특수한 길이와 비율로 한정되지도 않은 삼각형의 관념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를 밝히는데에 이용되는 것이다. 왜 철학자들은 이러한 정신적인 精緻한 표상을 좋아하는 가는 알기 쉽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와 같은 수단으로 그들의 사상의 많은 모순을 은폐하고, 또 애매 모호한 관념에 호소함으로써 명석한 관념의 단정에 복종하기를 거절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술책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누누이 주장되어 온 원리, 즉 우리의 모든 관념은 우리의 인상으로부터 모사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원리를 반성해보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원리에서 바로 다음과 같은 결론, 즉 모든 인상은 명석하고 정확하므로 이상으로부터 모사되는 관념은 반드시 그와 똑같은 성질을 가질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과오에서가 아니면 어떤 애매 혼란한 것을 함유하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고 하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관념은 그 성질상 인상보다 빈약하고 희박하다. 그러나 다른 모든 점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이므로, 관념이라고 해서 어떤 큰 비밀을 내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관념은 빈약하기 때문에 애매하다고 한다면, 관념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그러한 결점을 고쳐나가는 것이 우리의 직분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때까지는 아무리 추리와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뽐내봐도 헛된 일이다.

 

제 2 章 개연성과 원인 결과의 관념에 관하여

 

이상은 과학의 기초인 네 가지의 관계에 관해서 내가 논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의 전부이다. 그러나 다른 세 가지의 관계는 전연 관념에 의존하지 않고, 동일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도 없어질 수도 있고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인데, 이러한 관계에 관해서는 더욱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 세 가지 관계란 곧 同一, 시간과 위치에 있어서의 상태, 因果이다.

모든 종류의 추리는 비교에 지나지 않으며. 둘 또는 그 이상의 대상들이 상호간에 가지는 일정한 또는 부정적인 관계를 발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양편의 대상이 모두 우리의 감관에 나타나는 경우에나, 양편이 모두 나타나지 않은 경우에나, 또는 어느 한 편만이 나타나는 경우에나, 언제나 이러한 비교를 우리는 할 수가 있다. 양편의 대상이 관계를 가지고 우리의 감관에 나타나는 경우에는, 우리는 이것을 추리라기 보다는 知覺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에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사고작용이나 어떤 활동은 없고, 감각기관을 통해서 인상을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작용만이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동일이나 시간과 위치의 관계에 관해서 행하는 어떤 관찰도 추리로서 받아 들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들 두 가지 관계의 어느 것에 있어서도 대상의 현실적 존재나 또는 그 관계를 발견하기 위하여 정신이 감관에 직접 나타나 있는 것을 넘어서서 나갈 리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대상의 존재나 활동에서 출발하여, 그것에 어떤 다른 존재나 활동이 뒤따라 일어났다든가 또는 앞서서 일어났다고 하는 보증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연관을 산출하는 것은, 오직 인과관계 뿐이다. 다른 두 가지의 관계는 그것이 인과관계에 영향을 주거나 또는 그 영향을 받는 한에 있어서만 추리에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어떠한 대상들에 있어서도 그 대상들이 언제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또는 언제나 접근 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경험과 관찰에 의하여 대상간의 관계가 이러한 점에서 불변적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그 대상들을 분리시키거나 결합시키는 어떤 비밀의 원인이 있다고 결론을 짓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추리는 동일성에도 미친다. 우리는 하나의 대상이 여러 번 우리의 감관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해도, 그것이 하나의 개체로서 언제나 동일한 것이라고 선뜻 생각한다, 그리고 지각이 중단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일 우리의 눈이나 손을 끊임없이 그 대상에서 떼지 않고 있었다면, 그 대상은 불변적이며 중단없는 지각을 전해 주었으리라고 결론을 내리는 때에는 언제나, 우리는 그 대사에 동일성을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관의 인상을 넘어선 이러한 결론은 오로지 원인과 결과의 연관에 근거를 둔 것 일수 밖에는 없다. 또 우리는 아 원인과 결과의 연관이 아니라면, 아무리 새로운 대상이 전에 감관에 나타났던 대상과 유사하다고 할지라도, 그 대상이 우리들에게 대하여 번화하지 않고 있다는 보증을 가질 수가 없다. 우리는 그와 같은 완전한 유사성을 발견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그것이 그 대상의 종류에 공통되는 것인가, 혹 어떤 원인이 변화와 유사를 일으키는 작용을 할 수 있었던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원인과 결과에 관하여 결정을 내리는 바에 따라서, 대상의 동일성에 관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원인과 결과라고 부르는 어떤 두 개의 대상을 注視하고, 그와 같이 놀랄만큼 중대한 관념을 낳아 놓는 인상을 알아보기 위하여 이 대상들을 모든 면에서 검토해 보기로 하자. 첫 눈에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나는 그것을 대상의 어떤 특수한 성질에서 찾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내가 어떠한 성질을 잡아보든지,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역시 원인과 결과라는 명목 아래에 들어오는 대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외적 세계에나 내적 세계에나 원인 또는 결과라고 생각될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존재에 보편적으로 속하며, 모든 존재에 대하여 원인과 결과라는 명목을 부여하는 성질이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인과의 관념은 대상들 사이의 어떤 관계에서 유래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 관계를 밝히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 째로, 어떠한 대상이든 원인 또는 결과라고 생각되는 것은 서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어떠한 것도 그것이 현존하고 있는 시간 또는 위치로부터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는 시간 또는 위치에서는 작용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들은 서로 원인과 결과인 것처럼 보이는 일이 흔히 있지만, 그들은 자세히 조사해 보면, 보통 여러 원인의 연쇄에 의하여 결부되어 있으며, 이 여러 원인은 상호간에,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과도 접근되어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 그리고 어떤 특수한 경우에 우리가 이러한 연관을 발견할 수 없는 경우에도, 우리는 역시 이러한 연관이 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접근의 관계를 인과의 관계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원인과 결과에 필수적이라고 보려고 하는 두 번째 관계는 그다지 보편적으로 승인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논쟁을 일으키기 쉬운 것이다. 그것은 곧 결과 이전에 원인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는 시간의 선행성의 관계이다. 어떤 사람은 원인이 그 결과에 선행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요, 어떤 대상이나 활동은 그것이 존재하게 된 최초의 순간에 있어서 산출적 성질을 발휘하여, 자기 자신과 전혀 동시에 다른 대상이나 활동을 낳아놓을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험은 대부분의 경우에 이 의견에 배치되는 것 같이 보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일종의 추론이나 추리에 의하여 선행성의 관계를 확정할 수가 있다. 다른 대상을 산출함이 없이 일정한 시간 동안 충분한 완전성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은 그 자신이 자신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 이 대상을 不活動의 상태에서 밀어내어, 비밀리에 소유하고 있던 힘을 발휘하게 하는 어떤 다른 원리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이, 자연철학에 있어서나 정신철학에 있어서나 하나의 확정된 공리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원인이 그 결과와 완전히 동시적일 수 있다면, 이 공리에 따라 모든 원인이 결과와 동시적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어떤 원인이 일순간 그 작용을 遲滯한다면, 그러한 원인은 작용할 수 있었던 바로 그 특수한 시간에 활동하지 않는 것이 되고, 따라서 그러한 원인은 진정한 원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의 귀결은 바로 이 세계에서 보는 여러 원인의 繼起를 파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시간을 전적으로 절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하나의 원인이 그 결과와 동시적이고, 또 이 결과가 그 결과와 동시적이고, 이와 같이 무한히 나간다고 한다면, 계기와 같은 것은 분명히 없을 것이고, 모든 대상은 반드시 동시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접근과 계기라는 이 두 거지 관계가 인과성의 완전한 관념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보아, 이에 만족하고 있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어떤 대상은 다른 대상에 접근하여 있고 또 다른 대상에 선행하지만, 그것의 원인으로 간주되지 않는 수도 있다. 따라서 다시 고려해야할 것으로 필연적 연결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관계는 前述한 다른 두 가지 관계의 어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제 14 章 必然的 連結의 觀念에 대하여

 

..우리가 두 개의 대상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때, 우리가 가지는 필연이라는 관념은 무엇인가?

 

이러한 제목 하에서 나는 누누이 논술했던 바를 다시 되풀이한다. 즉 우리는 인상으로부터 유래되지 않은 어떠한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만일 우리가 실제로 이러한 필연성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관념을 일으키는 어떤 인상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나는 필연성은 보통 어떠한 대상 가운데에 있다고 생각되는가를 고려한다. 그리고 나는 필연성이 언제나 원인과 결과에 귀속된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나는 그러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생각되는 두 개의 대상에 나의 눈을 돌려서, 그 대상들을 그것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상태에 있어서 검사해 본다. 그러면 나는 바로 이 두 개의 대상이 시간과 위치에 있어서 접근하여 있으며, 우리가 원인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우리가 결과라고 부르는 다른 대상에 선행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떠한 실례에 있어서도 나는 이 이상 더 나아갈 수가 없으며, 또 이 대상들 사이에서 어떤 제 삼의 관계를 발견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시야를 넓혀서, 유사한 대상들은 언제나 접근과 계기라는 유사한 관계에 있음이 발견되는 여러 가지 실례들을 포함시킨다. 얼핏 보아 이것은, 나의 목적에 별로 맞지 않는 것 같다, 여러 가지 실례들을 반성해 봤자, 단지 동일한 대상이 반복될 뿐이요, 따라서 필연이라는 새로운 관념이 일어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자세히 연구해 보면, 나는 반복이 모든 점에서 동일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상을 신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목하 검사하고 있는 필연이라는 관념도 산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반복이 자주 일어난 다음에는, 대상 중의 하나가 나타나면 정신은 그 대상에 통상 따라다니는 다른 대상을 생각하도록, 그리고 두 대상간의 관계 때문에 더욱 강한 빛을 비쳐가면서 이 부수적인 대상을 생각하도록, 습관에 의하여 결정지워진다는 것을, 나는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필연이라는 관념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인상 또는 결정이다....

두 개의 대상이 우리에게 나타났는데, 그 중의 하나는 원인이고 다른 하나는 결과라고 가정하자. 분명히 우리는 단순히 어느 하나의 대상이나 또는 두 개의 대상 모두를 고찰한다고 해도, 결코 이들 두 대상을 결합시키고 있는 하나의 유대를 지각하지는 못할 것이며, 또 두 대상 사이에 하나의 연결이 있다고 확실히 선언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인과 결과의 관념, 힘이니 노력이니 활력이니 작용력이니 하는 것의 필연적 연결의 관념에 도달하는 것은 어떤 하나의 실례에서가 아니다. 실례에 있어서 우리가 본 것은 서로 전혀 다른 대상들의 특수한 결합뿐이므로, 우리는 결코 그러한 관념을 만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우리가 동일한 대상들이 언제나 함께 결합되어 있는 여러 실례들을 관찰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면 우리는 곧 그 대상들 사이의 연결을 생각하고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다른 대상에로 추론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유사한 실례가 많아지면, 그것이 바로 힘이니 연결이니 하는 것의 본질을 이루며, 또 힘이나 연결의 관념이 나오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힘의 관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수의 유사한 실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나는 우리를 그처럼 오랫동안 괴롭혀온 이 난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추리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유사한 실례들이 반복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특수한 실례에 있어서 발견될 수 있는 것과는 상이한 하나의 원초적 관념이 일어날 수는 결코 없다고 함은 이미 논급된 바요, 또 모든 관념은 인상으로부터 모사된 것이다 라고 하는 우리의 기초적 진리에서 분명하게 추론되는 바다. 따라서 힘의 관념은, 어떤 하나의 실례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그러나 여러 실례의 반복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새로운 원초적 관념이므로, 반복만으로는 그러한 결과가 없고, 반드시 그 관념의 원천인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 내지 산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반복이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산출하지도 못한다면, 우리의 관념은 이러한 반복으로 해서 더 증대될는지는 모르나, 단 하나의 실례를 관찰할 때에 나오는 관념 이상으로 확대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관념의 모든 확대는(예컨대 힘이나 연결의 관념과 같이) 유사한 실례가 많아짐으로 해서만 일어나거니와, 이러한 확대는 많은 실례의 어떤 결과의 모사요, 따라서 이 결과를 이해함으로써만 완전히 이해될 것이다. 우리가 반복에 의하여 어떤 새로운 것이 발견되고 산출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에는 언제나, 우리는 거기에 힘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며, 어떤 다른 대상에서 힘을 찾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힘의 관념을 일으키는 여러 유사한 실례는 상호간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으며 또 그 관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성질을 대상 가운데에 낳아 놓을 수도 없지만, 그러나 이러한 유사의 관찰은 정신 가운데에 새로운 인상을 낳아 놓는다. 그리고 이 인상이 힘의 관념의 실제의 원형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충분히 많은 수의 실례에 있어서 유사를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바로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그 대상에 통상 따라다니는 부수자에로 이행하여, 그러한 관계 대문에 더욱 강력한 빛에 비쳐 가면서 이 부수자를 생각하려는 정신의 결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은 유사의 유일한 결과요, 따라서 힘이니 작용이니 하는 것과 동일한 것임에 틀림없다. 힘이나 작용력의 관념이 이 유사에서 유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결합의 여러 실례를 봄으로써 결국 우리는 힘과 필연이라는 개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실례는 그 자체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상호 구별되어 있고, 오로지 그것을 관찰하고 그 개념을 집적하는 정신 가운데에서만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필연은 정신의 이러한 관찰의 결과요, 정신의 내면적 인상, 즉 우리의 사고를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다른 대상에로 옮기려는 결정에 지나지 않는다. 필연을 이러한 견지에서 고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필연의 가장 몽롱한 개념에조차도 도달할 수가 없을 것이며, 외적 대상이나 내적 대상에, 정령이나 육체에, 또는 원인이나 결과에 필연을 귀속시킬수도 없을 것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연결은 한 편으로부터 다른 편에 이르는 우리의 추론의 기초이다. 또 우리의 추론의 기초는 습관적 결합에서 일어나는 전이이다. 그러므로 필연적 연결과 이러한 전이는 동일한 것이다.

필연의 개념은 어떤 인상으로부터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의 감관은 그러한 관념을 일으킬 수 있는 어떠한 인상도 전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내면적 인상 즉 반성의 인상에서 도출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현재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관계가 있는 내면적 인상이란, 습관이 초래하는 경향, 즉 어떤 대상으로부터 그 대상에 통상 따라다니는 附隨者라는 개념에로 이행하는 경향 이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이 경향이 곧 필연의 본질이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필연은 대상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정신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또 필연을 물체의 한 성질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필연의 가장 몽롱한 개념조차도 형성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필연의 관념을 가지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필연이 원인과 결과와의 결합을 경험함에 따라 원인에서 결과에로, 그리고 결과에서 원인에로 이행하려는 사고의 결정에 지나지 않거나 그 어느 하나다.

그리하여 2의 2배는 4가 되고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이직각과 같다고 하는 필연성이 오로지 이들 여러 관념을 고찰하고 비교하는 우리의 悟性의 활동에 달려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원인과 결과를 결합시키는 힘의 필연성은 한편에서 다른 편으로 이행하려는 정신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이다. 원인의 작용력이니 활력이니 하는 것은 원인 그 자체에 있는 것도, 神에 있는 것도, 또 이들 두 원리의 일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적으로 과거의 모든 실례에 있어서 둘 또는 그 이상의 대상들의 결합을 고찰하는 우리의 마음에 귀속되는 것이다. 원인의 참된 힘과 그 연결 및 필연성이 定位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