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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시인/철학 강의

[폴 패튼]반-플라톤주의와 예술: 들뢰즈와 데리다

by 丹野 2008. 11. 26.

 




 

 

 

반-플라톤주의와 예술: 들뢰즈와 데리다
저자: 폴 패튼(Paul Patton)
역자: 김상운(sanggels)

현대예술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명확한 답변을 제공하려는 시도의 연속이라고 기술되어 왔다. 19세기 말에 표상적 이상이 붕괴함에 따라 화가들은 더 이상 실재를 표상할 수 있는 수단을 세련되게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표상이야말로 회화만의 과제라고 확신해 왔다. 많은 비평가들에게 있어 포비즘과 큐비즘을 거쳐 팝아트에 이르기까지 현대예술운동의 끊임없이 급변하는 연속적 흐름은 예술의 본성에 대한 예술의 계속적인 탐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몇몇 철학자들에게 있어 현대철학도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연속적으로 답변해 온 마찬가지의 과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철학 자체가 무엇보다 사유의 본성에 관한 반성인 한 이것은 예술의 본성에 대한 현대 예술의 관심과 동일한 반성적 기획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현대회화의 계속된 스타일의 경우에서처럼 철학에 대한 상이한 접근은 이것이 거부하고자 했던 것들 자체에 의해 정의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현대철학의 성격과 과제란 플라톤주의의 거부라고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탐사된 것은 항상 동일한 플라톤주의가 아니었으며 마찬가지로 각기 취했던 거부가 동일한 형태를 띠었던 것도 아니다.

 

 


들뢰즈는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는 기치 아래 철학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게다가 그는 현대예술의 경향을 철학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와 연결시키고자 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사유의 이론은 회화와도 같다. 그것은 예술로 하여금 표상에서 추상으로 나아가게끔 했던 혁명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이미지없는 사유이론의 목표이다."(들뢰즈, 1968, p. 354) 추상예술에 대한 철학적 등가물, 혹은 이미지 없는 사유는 사유에 대한 비표상적 개념화일 것이다. 철학의 성격과 과제에 대한 들뢰즈 자신의 반성은 무엇보다도 철학에서 지속되고 있는 표상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이 글의 목적은 차이와 반복 에서 들뢰즈의 플라톤에 대한 언급과 현대예술에 대한 언급을 검토함으로써 회화와 철학에서 표상을 포기하게 된 공통지반을 탐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또한 '플라톤주의'에 대한 들뢰즈적인 전복의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복제들과 시뮬라크라들 사이에 플라톤이 정립한 위계를 전도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또한 이 전도는 문제로 되는 바로 이 구별을 폐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플라톤주의와 관련해서 들뢰즈의 비판적 전략은 해체의 전략과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 들뢰즈와 데리다의 플라톤에 대한 독자적인 독해를 비교해 보면 이들 사이의 유사성은 실재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외형적인 것이라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특히 시각예술에서 현대성으로의 이행은 위기와 표상적 예술 이론의 포기에 의해 촉진되어 왔다. 외양들의 표상 보다는 다른 목표의 탐구가, 시각예술은 본질적으로 외양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관념에 대한 상이한 견해로 돌아가기에 앞서, 감정과 정서의 표현에서부터 시각 경험의 형식적 가능성들의 탐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안들을 가로지른다. 많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분명히 외양의 재생산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가지 경우에서 충격적 가치는 재생산된 것이 초기 예술작품 자체의 외양이라는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셰리 레빈(Sherrie Levine)과 같은 예술가들은 초기 예술가들의 작품 전체 혹은 부분을 다시 찍거나 다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표상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낡은 이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데, 이는 그것이 실재의 외양들의 외양들을 재생산함으로써 이차적인 표상을 포함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요한 차이는 묘사된 대상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과제에 관한 개념화에 있다. 즉 외양들의 표상이라기 보다는 외양들의 재생산. 왜냐하면 생산이란, 적어도 그 한가지 의미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원료가 생산물로 변형된다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차이를 창조했다든지 혹은 차이를 제도화했다는 것과 분리불가능하다. 예술가의 개념적 재료와 기술들(technique)은 물론이고 물리적인 재료와 기술들을 포함하는 생산수단은 바로 이러한 차이가 창조되는 수단인 것이다. 이와 달리 표상은, 적어도 그 한가지 의미에서는, 본질적으로 동일성의 유지를 포함한다. 즉 이전에 나타났던 것의 재출현.


사실 예술적 표상은 항상 외양들을 재생산할 수 있는 특정한 재료와 기술들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것은 불가피하게 재생산된 외양에 차이를 도입한다. 문제는 회화가 사실상 어떤 엄격한 의미에서 외양들의 표상을 성취했는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목표와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리얼리스트적이거나 표상적인 예술의 전통에 있어서 목표는 재생산이며, 결국에는 원본과 복제 사이에서 관찰가능한 차이를 제거하는 것이다. 몇몇 후기 모던적인 혹은 포스트모던적 예술가들의 목표는 이것과 정반대이다. 즉 지각적 유사성(similarity)에 의거한 차이의 생산, 차이의 표현이나 조명. 보르헤스는 잘 알려진 20세기 시인이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를 재창조하고자 한 소설가의 기획을 상상하면서 이러한 전략에 문학적인 형성물을 제공해 주었다.

 

보르헤스의 이야기는 적어도 그가 원본을 말 그대로 반복하면서 몇가지 단편들을 합성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20세기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있어서의 상이한 가능성들은 그것이 동일한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므나(Menard)의 텍스트는 음성적으로는 동일하지만, 그러나 후자가 더욱 풍부하다. (그에 대한 비방자들은 매우 모호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호함은 풍부함이다)"(보르헤스, 1962, p. 52). 들뢰즈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가장 정확하며, 가장 엄격한 반복이 그 상관물로서 차이의 극대화를 가지게 되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들뢰즈, 1968, p. 5). 뒤샹과 워홀은 유사한 전략을 시각적으로 실현했다. 뒤샹은 기성 오브제를 조각작품으로 사용해서 표상된 외양의 지위와 성격을 변형시켰다면, 워홀은 합판으로 만들어진 브릴로(Brillo) 상자와 대량생산된 상품품목을 닮은 것을 손으로 그려내 일련의 진부한 오브제들을 재창조했다.

 

 

따라서 우리가 '복귀(return)'을 정확히 들뢰즈가 반복이자 영겁회귀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에 따라 이해하게 된다면, 셰리 레빈과 다른 사람들의 포스트모던한 작품들에서 이러한 제스춰의 재발견과 재유용화는 외양의 표상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낡은 이상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다. 반복은 대치, 변장, 혹은 반복된 것의 변형이다. 반면 복귀는 다른 것(차이나는 것)의 존재 양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표상의 복귀는 차이화 혹은 표상 자체의 변형이다. 그것은 더 이상 동일성의 유지가 아니라 차이의 생산이다. 현대예술은 자신의 과제를 외양들의 표상이라고 간주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의 재생산이라고 간주한다. 즉 복제들의 생산이 아니라 시뮬라크라의 생산이라고 간주한다.
차이와 반복 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현대철학의 과제는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것[renverser]"(들뢰즈, 1968, p. 82).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는 우리가 플라톤주의를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는가에, 그리고 이러한 '전복'의 작동이 무엇을 포함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생각에 의존한다. 프랑스어 <renverser>는 한편으로는 '극복하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복하기' 또는 '전도하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모호함은 철학의 과제에 대한 들뢰즈의 정식화를 영어로 번역할 때 이 두가지 용어가 모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철학의 플라톤적 과거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들뢰즈의 견해가 모두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그는 니체처럼 플라톤주의의 특정한 측면들을 전복함으로써 나아갈 수 있는 극복의 길을 제안하려고 한다. 이처럼 철학의 과제를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고 규정한 첫번째 사람이 바로 니체였다. <Nachlass>에서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전도된' 혹은 '전복된' 플라톤주의(umgedrehter Platonismus)라고 지칭한다. 니체에게 플라톤주의는 도덕적인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구성물이었으며, 이들 두가지 평면들(planes) 모두는 극복되어야만 할 어떤 것이었다. 우선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플라톤주의는 이데아의 세계 혹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영역과 상대적으로 비존재하는 혹은 단순한 외양들의 감각적 영역간의 구별로 이루어진다. 플라톤주의는 실재 내에서 위계질서를 구축하며, 우리 자신들 내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위계질서를 구축하는데, 이에 따르면 인간 삶의 최고의 부분들도 단지 진정으로 실재적인 것의 복제나 모방(imitation)에 다름 아니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평면 위에서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형이상학적인 질서를 전도하는 것에 있지 않으며, 또 감각적인 것의 실재성을 긍정하는 데에도 있지 않다. 이 경우에는 단지 동일한 구조가 지속되는 가운데 점유된 위치들만이 바뀔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구조 자체의 폐지이다. 이에 대해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실재 세계를 폐지해 버렸다. 어떤 세계가 남아 있는가? 외양적인 세계인가? 아니다! 진정한 세계와 더불어 우리는 외양적인 세계마저도 폐기해 버렸다"(니체 1968, p. 41). 전체로서의 질서화하는 구조를 변화시킬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하이데거는 이러한 플라톤주의의 극복을 "철학적 사유가 그것과 무관하게 엮어내고 있는" 전도라고 묘사하고 있다(하이데거, 1981, p. 201).
플라톤주의의 도덕적 구조를 넘어서 사유하려는 니체의 시도는,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러한 엄청난 노력의 가장 적나라한 예이다. 니체의 초도덕적(supramoral) 관점에서 볼 때 플라톤주의는 유럽적 사유를 지배해 온 니힐리즘의 일차적인(primary) 형태이다.

 

 

 그는 이를 선악을 넘어서 에서 <교조주의자들의 오류>라고 부르는데(니체, 1973, p. 14), 이것은 시간적이고 신체적인 인간 실존을 보다 고차적인 영역, 즉 신들의 본성적인 집이자 '그 자체로 선함'과 대립시킴으로써 시간적이고 신체적인 인간 실존을 평가절하하는 것이자,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우리가 신체라고 부르는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을 평가절하하는 것에 해당한다( 파이드로스 , 250c). 그 기독교적 형태에 있어서 '사람들에 대한 플라톤주의'인 이러한 니힐리즘은 현대 시대까지 인간 실존의 본성을 규정해 왔다고 니체는 지적한다. 그런데 몇가지 이유 때문에 도덕적 평면 위에서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것은 단지 존재하는 가치의 위계질서를 전도하는 것만을 의미할 수는 없게 된다. 첫째, 이것은 보다 고차적인 가치들에 있어서의 이차적인 니힐리즘이나 믿음의 상실로 이끌어가는 길이며, 따라서 짜라투스트라의 예언서('진정으로, 우리는 너무 힘들게 자라왔기에 죽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깨어나고 있으며 모체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에서 표현된 절망의 일종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다(니체, 1969, p. 156). 두번째로, 우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여러 세기에 걸친 인간 정신에 대한 기독교적 교육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 에서 주장하듯이,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가능성은 부분적으로는 그 자체로 기독교적-플라톤적 전통의 산물인 진실함(truthfulness)과 같은 가치들에의 집착에 의존한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것은 영혼과 신체에 부착되어 있는 각각의 독자적인 가치들을 단순하게 전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의 발전과 그러한 존재들의 삶에 대한 새로운 가치평가의 발전을 요구한다. 즉 새로운 존재론과 인간 실존의 새로운 윤리학을 요구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있어 플라톤주의의 전복은 차이와 반복 에서 떠맡은 보다 큰 과업의 한 부분이자 전체, 즉 플라톤 이래 철학사를 지배해 왔던 사유에 대한 표상적인 개념화에 대한 비판과 '이미지 없는 사유'라는 대안적 개념화의 정립이다. 사유를 어떤 외적인 실재를 표상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은 사유에서 끌어온 구별이 거꾸로 대상 자체로 투사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사고작용은 소크라테스가 대상의 '객관적 접합'이라고 부른 것을 얼마나 적절하게 따라가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파이드로스 , 265e). 들뢰즈는 표상의 철학은 사유의 활동에 관한 심약하고 보수적인 전제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공통 감각(혹은 상식)으로부터 파생된 이러한 교조주의적 이미지에 따르면, 사유란 근본적으로 온화한 활동(benign action)일 수밖에 없으며 진리와의 자연적인 친화성을 가진 보편적인 인간 능력의 실행일 수밖에 없다. 이것의 전형적인 사례는 새로운 개념들의 창조와 같은 창조적인 작용(act)들이 아니라 단순한 인식작용(이것은 손가락이거나 밀랍이다; 눈은 하얗다)이며, 이러한 인식작용은 단지 존재하는 개념들을 감각 경험에 적용시키는 것만을 포함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 생산물은 우리가 사물에 대해서 행하는 폭력이라기 보다는 지식의 또 다른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 ("사유는 일차적으로 침입과 폭력이다.", 들뢰즈 1968, p. 181) 이러한 사유의 이미지에 반대해서 들뢰즈는 사유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현상들 혹은 우리의 습관적인 경험의 범위 밖에서 온 힘들이 우리에 대해 도발하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화를 옹호한다. 칸트적인 숭고와 밀접한 어떤 것에 찬성하고 있는 진부한 인식 모델을 포기할 때에만 사유가 본질적으로 창조적인 활동임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사유란 개념들의 창조이며, 여기에서 개념들 자체는 사유의 외부에 있는 힘들과 강렬도들과의 즉각적인 관계에서만 단지 존재하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철학사의 지배적인 전통은 사유이론을 이러한 지배적인 이미지의 그림자 속에서 발전시켜 왔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특별한 철학들이 제공한 표상의 도구와 수단에 대한 계속적인 설명은 개념적 사유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공유하는 데 기여했다. 들뢰즈에게 이러한 전통의 응집성은 동일성, 닮음(resemblance)과 유사(similitude)에 기반한 논리를 옹호하여 차이를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처럼 아예 의심할 여지가 없는 가치들이 되어 버린 이것들은 사유 자체의 이론화를 지배했으며, 그 결과 차이를 그 자체로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플라톤은 이러한 표상의 철학의 발전에 있어서 독특하고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데, 도그마적인 사유의 이미지의 전제와 관련해 볼 때 그는 항상 수용되지는 않았으며, 또 차이에 대한 동일성의 선행(precedence)과 관련해 볼 때에도 그러하다.

 

 

들뢰즈는 개념적 표상의 이론이라고 이해된 형이상학이 플라톤주의에 관해서 정의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플라톤은 표상 철학의 다소 불완전한 판본을 제공해 주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표상의 원리적 기초는 그의 이데아론이나 형상론에만 한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후일 아리스토텔레스가 발전시킨 범주론의 체계적인 성격을 결여하고 있다. 가능한 경험의 조건으로서 정의된 범주론과 더불어서만 철학은 '표상의 예비적인(elementary) 개념들'을 획득했다(들뢰즈 1968, p. 93). 이와 달리, 이데아론의 목적은 대상들을 유와 종의 미분적 도표 내에서의 위치에 의거해서 상세화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적 클라망(claimant)이자, 근본(foundation)으로까지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 단순하게 외양적이거나 비본래적인 것에서 참되거나 본래적인 것을 분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차이는 유(genera) 속에서 존재에 대한 유비적 관계의 형태로 나타나는 가장 커다란 차이들에서부터 가장 작은 차이들, 즉 대상의 다양한 종들을 구별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가능성들의 범위들을 뒤덮고 있는 개념적 질서 내에서 상세화된다. 플라톤과 더불어 차이 그 자체, 혹은 순수한 차이는 근거가 있는 클라망과 근거가 없는 클라망 사이의 간극에서, 혹은 사물 자체와 이것의 시뮬라크라 사이의 간극에서 나타난다(들뢰즈 1968, p. 84).

 

 


지배적인 형이상학적 전통의 용어들을 넘어서 사유하려 하는 들뢰즈는 순수한 차이를 파악할 수 있는 사유를 발전시키려 노력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플라톤의 대화록의 여러 페이지에 걸쳐서 산개되어 있는 反플라톤주의의 요소들 몇몇을 끌어온다. 그는 이들 텍스트에서는 표상에 대한 양가성이 발견되고 따라서 플라톤주의의 전복이 플라톤의 사유의 측면들을 보존하는 것이라는 것은 불가피하고도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의 플라톤주의 전복을 플라톤의 사유의 갈등적 측면들 사이에서 몇가지 요소들의 전도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올바르다면, 이러한 절차는 표상의 철학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의 들뢰즈의 거대한 전략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신플라톤주의자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와 헤겔의 철학을 통해서 그 정립과정을 추적하면서 들뢰즈는 사유의 본성에 대한 대안적 개념화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이들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무시된 측면들은 물론이고 '소수적 전통'을 형성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작업, 가령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니체, 베르크손의 작업에 주목한다. 따라서 들뢰즈가 다루는 플라톤주의에 대한 취급방식을 보다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이것은 전체로서의 표상 철학에 대한 그의 비판의 성격을 조명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플라톤의 텍스트는 세계에 대한 개념화를 제공하는 데 그 기본적인 구조는 표상의 체계의 개념화이다. 단지 형상만이 궁극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실재한다. 아름다움이나 정의같은 성질들에 대한 현세의 표현이나 침대와 같은 물질적 대상들은 단지 형상들 자체의 모방일 뿐이다. 예를 들어, 티마이오스 에서 세계 자체는 복제 또는 "이성과 정신에 의해서 파악되며 또 이성과 정신이 도전할 수 없는 비슷함(likeness)"( 티마이오스 , 29a-b)으로 제시된다. 형상은 플라톤의 표상주의의 핵심인데, 형상은 인간 실존의 감각적인 세계에서 대상들과 성질들의 참된 본성을 위한 기초로서 기능하는 원본 혹은 본질적인 성격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라톤주의는 원본과 그 모방 사이의 구별, 모델과 그 이후의 복제들 사이의 이러한 구별을 떠맡는다. 게다가 바로 이러한 구별이 차이를 동일성에 종속시키는 것을 지속시킨다. 왜냐하면 원본 또는 모델은 모범적인 자기-동일성에 의해서 정의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형상들은 단지 그것들이 있는 바의 것에 다름 아니며, 용기는 용기있는 것에 다름 아니고, 신앙심은 신앙이 깊은 것에 다름 아니다, 등등. 따라서 이러한 성질들은 원본에의 그것들의 '분유(participation)'에 의거해서 정의된다. 이것들은 형상의 본성을 참되게 표현하는 비슷함들(likeness)이거나 복제들이며, 원본에 대한 특정한 종류의 내적인 닮음(resemblance)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를 들자면, 책상을 만드는 사람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재적인 존재와 닮은 어떤 것'을 만드는 것이다(국가론, 597a). 이런 방식으로 원본과 복제간의 존재론적인 차이는 아 프리오리한 동일성 그리고 닮음과 관련해서 정의된다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차이 자체는 파생적 용어이며, 세번째 위치, 다시 말해서 동일성과 닮음의 뒤에 오게 된다. "차이는 단지 두 가지 유사함들(similititudes)의 비교가능한 놀이에 의거해서 이해된다. 즉 동일한 원본의 전형적인 유사함과 더 정확하거나 덜 정확한 복제의 모방적인 유사함"이라는 두가지 놀이(들뢰즈 1968, p. 166). 형상이론은 따라서 이후의 형이상학에 핵심적인 요소를 제공하는데 이 형이상학은 이러한 요소에 기반해서 세워질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플라톤주의는 따라서 철학이 나중에 자신의 것으로서 인식하게 될 전체적인 영역을 발견한다. 즉 복제들-아이콘들(copies-icons)에 의해 채워졌고, 대상에 대한 외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델이나 근본에 대한 내적인 관계에 의해서 정의된 표상의 영역. 플라톤은 정의란 정의로운 것에 다름아니라고 말한다는 의미에서 볼 때 플라톤적 모델은 같음(the Same)이다. 플라톤적 복제는 유사한 것(the similar)이다. 즉 사칭하는 것(pretender)은 이차적인 방식으로 점유한다"(들뢰즈 1990, p. 259).

 

 


들뢰즈는 주장하기를 플라톤과 더불어 우리는 가장 중요한 철학적 결정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차이를 동일성과 닮음이라는 일차적인 관계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표상의 세계를 이론화한 첫번째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는 형상이론이라는 빈약한 자원만을 가지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러한 개념적 지형(configuration)은 대화록들 내에서 도전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플라톤주의에서 차이를 동일성으로 종속시키는 것은 근래에 포획된 야생 동물의 상황과 유비할 수 있는데, 이 동물의 저항은 자연 상태에서 그 행태를 증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잘 그 길들여지지 않은 본성 - 조만간 잃어버리게 될 본성 - 을 증명한다(들뢰즈 1968, p. 83). 특히 질서지워지고 위계화된 표상의 세계는 끊임없이 또 다른 종류 혹은 또다른 본성을 가진 등장인물들(figures)에 의해 위협받는다. 이 등장인물들의 본질은 사물들의 실재적 본성에 비슷하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본성들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에 있다.

 

 

이것들 중의 우두머리는 플라톤적 철학자들의 대적(archenemy)인 소피스트들이다. 이들은 '일종의 마법사이자, 실재적 사물들의 모방자'로 묘사된다( 소피스트 , 235a). 대화록의 끝에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란 현자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혹은 '흉내낼 수 있는' 역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하며, 따라서 흉내란 자신들의 인격을 도구로서 사용하는 닮음(semblance)의 생산으로서 정의된다. "소피스트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흉내낼 수 있는 사람들 속에 위치해 있다"( 소피스트 , 267e). 마찬가지로 파이드로스 에서 생생한 담론의 '이미지의 일종'이라고 기술되는 글쓰기는 참된 지혜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닮음만을 생산한다( 파이드로스 , 275b, 276a). 마지막으로 국가론 의 10권에서 논의되는 '모방적 시인들'은 사물들의 참된 본성의 모방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외양들(phantasma)의 모방만을 생산한다. 이들은 지식이라는 해독제를 소유하고 있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타락시킬 정도로 위협적이다( 국가론 , 595b).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이상적 공동체로부터 배제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따라서 이 점에 관해서 우리는 동의했습니다. 즉 모방자들은 그들이 모방하는 사물들에 대해 언급할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그러나 모방의 놀이의 한 형태이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비극시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모방자들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국가론 , 602b).

 

 


이러한 두 등장인물들 간의 차이는 표상 자체의 질서 내에서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신화에 호소하는 시인들은 화가들과 비슷하기에 '모두가 모방자들'이라고 비난받는다. 다른 한편으로, 소크라테스 자신은 파이드로스 에서 사랑의 참된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화에 의존하며, 따라서 화가는 "우리가 진리의 어떤 수준을 얻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경험에 대한 그림"을 추구한다( 파이드로스 , 265b). 이런 기초 위에서 볼 때 표상과 관련해서 플라톤주의 내의 양가성은 모방(미메시스) 개념 내에서 출현하며, 바로 이것에 의해서 표상의 질서가 정의되며, 또한 이 개념의 일관성을 위협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방/표상이라는 바로 이 개념이 파르마콘(pharmakon)과 같은 또 다른 용어에서 발견된 동일한 종류의 양가성 또는 비결정성에 감염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플라톤적 표상의 질서를 그 내부로부터 흔들어 놓을 수 있다.

 

 


이는 <플라톤의 파르마시(Pharmacy)>에서 모방 개념에 관해서 간략하게 논의하는 데리다가 채택한 전략이다(데리다 1981, pp. 137-139). 그는 플라톤이 화가들과 시인들을 비난하는 근거가 되는 그 결핍이 이미 모방 개념에 제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화가들은 단지 특정한 각도에서 보여진 침대를 표상할 뿐이며, 따라서 외양과 침대 자체 사이의 어떤 차이를 그들의 이미지들 속에 내재화한다. "의자는 당신이 그것을 측면에서 보느냐 아니면 전방에서 보느냐 혹은 어떤 다른 방식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가? 혹은 그것은 비록 다르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닌 것인가?"( 국가론 , 598a). 그러나 복제들은 이미 그 자체와 복제된 대상 사이의 차이를 내재화하며, 이는 그것들이 복제들이나 모방들로 남아 있는 한은 필연적이다. 여기서 데리다는 크라틸루스(Cratylus)의 주장에 의존해 완전한 모방은 전혀 모방일 수 없고 단지 동일한 사물의 또다른 예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모방이나 복제는 복제와 모방된 사물 사이의 차이의 유지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방한 것을 모방된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사소한 차이마저도 제거하게 된다면, 바로 그 사실이 그것을 지칭함으로써 우리는 모방자를 절대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즉 모방자는 더 이상 모방된 것을 지칭하지 않는 별개의 존재가 되어 버린다"(데리다 1981, p. 139). 모방개념은 연속성(continuum)을 둘러싸는 개념처럼 나타난다. 한편으로 모방은 실재적인 것 자체의 재생산, 즉 같은 것의 반복이 되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단지 사물의 외양만을 복제하는 곳에서 그것은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된다. 시인은 단지 시뮬라크라만을 생산한다고 하여 플라톤에 의해서 배격당하는 반면에, 플라톤이 도처에서 생생한 말하기의 '이미지의 일종'이라고 기술하는 글쓰기가 말하기를 완전히 모방한다는 것은 역설일 수 밖에 없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모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방(미메시스)은 따라서 애초부터 양가적인 개념이며, 데리다는 이것이 <파르마콘>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모방은 자신을 지우면서 자기의 본질을 긍정하고 날카롭게 한다. 그것의 본질은 그것의 비본질이다. 그리고 어떤 변증법도 이러한 자기-부적합화(self-inadequation)를 가로지를 수 없다. 완전한 모방은 더 이상 모방이 아니다. 모방은 그 본질에 상응하지 않으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과오이거나 결핍이지 않는 한 그것은 모방일 수 없다. 과오(결핍)는 그것 내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본성을 갖지 않는다. 어떤 것도 그 자신에 적합하지 않다. 양가적인 것, 즉 스스로를 텅비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채우는 것, 선한 것인 동시에 악한 것 -- 미결정적으로 <미메시스>는 <파르마콘>과 유사하다."(데리다 1981, p. 139)

 

 


이와 달리 들뢰즈에게 있어서 모방 혹은 복제의 두 종류 간의 차이는 표상 자체의 영역 내에서 끌어온 구별에 다름아니다. 사실 그것은 그것들이 닮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참되게 혹은 내적으로 닮은 형태들(figures)과 그것들이 이미지하는 것을 단지 피상적으로 닮은 형태들간의 구별이다. 복제들과 시뮬라크라 사이에는 어떤 공통된 기반도 없으며, 그것들은 같은 유의 두 가지 종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존재의 두 종류와도 같다. 때로 국가론 10권에서 형상-의자-모방이라는 3부작(trilogy)에 의거해서 주장되듯이 이 구별은 더 타락한 혹은 덜 타락한 복제들 간의 구별, 즉 원본과 더 거리를 둔 혹은 덜 거리를 둔 복제들 사이의 구별이라고 주장된다. 들뢰즈는 이것이 실재적 차이를 모호하게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한 종이다. 소피스트 에서 플라톤은 이미지들 자체 속에서 '비슷함들(likeness)'(복제들)과 '닮음들(semblance)'(시뮬라크라) 사이의 구별을 끌어낸다( 소피스트 , 236b-c). 원본과 참으로 닮은 전자는, 사람만한 크기의 초상화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모든 세가지 차원들에서 원본의 비율에 따라서 복제를 창조하고 더우기 모든 부분들에 고유의 색깔을 입히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피스트 , 235e). 후자 즉 닮음들은 좋지 않은 위치에 있는 구경꾼들에게만 비슷함으로 보인다. 기만적 대상에 관한 적절한 견해를 가진 구경꾼들에게 그것은 '그것이 닮았다고 주장하는 원본과 같을 수도 없다'( 소피스트 , 236b). 이 같은 닮음의 분류는 예를 들어, 참된 비율의 왜곡을 포함하며 따라서 인물들은 관찰자들에게는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엄청난 조각상을 포함한다. 혹은 화가가 생산한 이미지는 프레임의 정면에서 어떤 각도에서 보여질 때에만 침대인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이미지를 포함한다.

 

 


비슷함들(복제들)과 닮음들(시뮬라크라) 간의 차이는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닮음(resemblance)의 기초의 문제이다. 즉 한편으로는 차원들, 비율들, 색감들의 동일성의 문제이다. 다른 한편으로 원본과의 차이의 가치 위에서는 피상적이거나 외양적인 닮음이다. 복제들은 형상들을 표상하는데 왜냐하면 복제들은 형상들과 닮았기 때문이다. 복제들은 내적이고 정신적인 닮음을 궁극적으로 실재적인 사물들 자체와 공유한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플라톤적 모델은 그 자기-동일성에 의해서 정의되지만, 반면 복제는 모델에 대한 그 모범적인 유사성에 의해서 정의된다고 주장한다. 이와 달리 시뮬라크룸은 '불비례disparity 혹은 차이 위에 건설되며, 그것은 유사하지 않음을 내재화한다'(들뢰즈 1990, p. 258). 따라서 거대한 조각들의 경우, 정확한 비율이라는 외양은 단지 평행적인 비율로부터 출발함으로써만, 기만적인 복제의 내적인 관계들과 그것이 닮은 인물의 내적인 관계들 사이의 차이에 의해서 생산될 뿐이다. 혹은 화가의 경우에, 침대의 외양은 필연적으로 대상에 관한 우리의 관점(perspective)을 내재화하며, 따라서 침대와 침대의 외양 간에는 차이가 있다. 결국 시뮬라크라는 닮음의 효과를 생산하지만, 이는 단지 시뮬라크라 자체와, 닮은 대상 사이의 내적인 차이들에 기반해서만 그러할 뿐이다. 시뮬라크라와 더불어 표상의 세계를 특징짓는 차이에 대한 동일성과 같음(sameness)의 우선성은 전도된다.

 

 


시인을 배제하자는 것은 시인들이 말하고 있는 그러한 사물들의 실재적 본성을 이들이 모방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은 외양만을 모방했다는 주장에 의해서 지지된다. 이러한 주장을 유지하기 위해 플라톤은 고유한 모방들 혹은 표상들과 시뮬라크라 사이를 구별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을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철학자와 소피스트, 혹은 말하기와 글쓰기간의 중요한 차이를 구출해 내기 위해서는 각각의 경우에 두 가지 용어들 사이를 구별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만 한다. 이런 기반 위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플라톤주의 전체는 '사물 자체'와 시뮬라크라간의 구별에서 이끌어 온 관념에 의해서 지배되었다"(들뢰즈 1968, p. 91). 이것은 형상과 모방 혹은 표상간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플라톤주의의 중요한 과제이다. 들뢰즈는 플라톤주의의 의도는 참된 클라망과 거짓된 클라망을 구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후자를 배제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서 잘 성립된 복제의 선차성은 정립하고 시뮬라크라는 억누르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주의 전체는 소피스트와 동일시된 판타즘(phantasms) 혹은 시뮬라크라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이러한 소망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악마, 교시자(insinuator) 혹은 모방자는 항상 허위의 사칭자를 감추고 대체했다."(들뢰즈, 1968, p. 166). 빈번하게 이 귀결은 신화에 대한 호소에 의해 성취되는데, 파이드로스 에서는 영혼을 날개달린 2륜마차로 설명하고 있다. 들뢰즈는 이러한 신화야말로 플라톤의 분리방법이 진실한 주창자와 단순한 사칭자간의 구별을 끌어내고자 하는 구별을 위한 기반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이 욕망이 시뮬라크라를 억압하거나 배제하는가? 국가론 10권에서 시인을 향한 적대감을, 지식의 해독제를 구비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적 권위를 정립하고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실행에 다름아닌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쉬워 보인다. 플라톤은 진리, 의견, 단순한 환상이라는 삼중의 구별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형상이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인해 그는 알고 있는 사람의 반열에서 시인을 배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철학자들은 사물의 참된 본성을 표상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그렇지만 입증하지는 못하는 수사학적 실행 이상의 어떤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마치 시인이 보여주는 것에 반하는 그 주장의 잔여분(remainder)과도 같이 그것은 보다 심오하고 도덕적인 목적에 봉사한다. 시인들이 선한 것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영혼의 가장 천한 부분을 붇돋우고 육성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는 달리, 플라톤적인 철학자는 상이한 종류의 세계를 구체화한다(embody). 즉 과도한 감정(emotion)이 없는 안정적이고 위계적인 세계를. 그리고 여기에서는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도 그들이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것은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영혼의 고요하고 질서정연한 삶을 시인에 의해 움직여지는 영혼의 무질서하고 정념에 가득찬 삶보다 더 좋아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그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표상의 논리가 배열될 수 있기 전에 나타나는 것은 세계에 대한 도덕적 견해이다. 시뮬라크라가 추방되고 차이가 같음과 유사함에 종속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도덕적 이성의 첫번째 심금에서이다."(들뢰즈, 1968, p. 166) 시뮬라크라를 추방하려는 바로 이 욕망이 동일성의 일차성과 차이의 종속을 보증한다. 플라톤의 경우에 있어서 "도덕적 동기는 그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격찬된다. 시뮬라크라나 판타즘을 제거하려는 의지는 도덕적인 것과 별도의 동기력을 갖지 않는다. 시뮬라크라의 형태(figure)에서 비난받는 것은 자유롭고, 대양처럼 광대한 차이들의 상태이며, 노마드적 분배와 영예로운 아나키들(crowned anarchies)의 상태이며, 이러한 모든 것과 더불어 그러한 악의는 모델이라는 통념과 복제라는 통념 모두에 도전한다"(들뢰즈, 1968, p. 341).

 

 


플라톤주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로 볼 때 들뢰즈의 전복방법은, 적어도 한가지 수준에서는, 매우 직접적인 전도이다. "플라톤주의의 전복은 따라서 복제에 대한 원본의 일차성을, 이미지에 대한 모델의 일차성을 부정함을 의미한다. 즉 시뮬라크라와 반영(reflection)의 통치(reign)를 찬미하는 것을 의미한다."(들뢰즈, 1968, p. 92). 그러나 시뮬라크라가 같음(sameness)의 기만을 창조하려는 그것들의 역능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시뮬라크라의 일차성을 주장하는 것은 또한 동시에 표상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시뮬라크라가 사물들의 외양을 모방하는 한, 이것들은 바로 참된 사물과 허위의 사물간의 구별, 혹은 사물자체와 단순한 기만간의 구별의 가능성 자체를 침해한다. 플라톤 자신은 플라톤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들뢰즈는 이것이 바로 소피스트 의 말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엘레아학파의 이방인이 소피스트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소피스트로부터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소피스트로부터 구별한다. 그러나 소피스트는 자신을 문제로 되고 있는 구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로부터 구별하지 못한다."(들뢰즈, 1968, p. 168). 아이콘들의 황혼.

 

 


시뮬라크라의 선차성을 주장하는 것은 같음보다는 차이가 일차적인 관계인 세계를 긍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어떠한 궁극적인 기반들이나 원래적 동일성들도 없다. 모든 것은 시뮬라크룸의 상태를 가정한다. 사물들은 그것들이 다른 사물들과 내적으로 그리고 관계적으로 되어가는 차별적 관계들에 의해서 구성된다. 이것은 촉발할 수 있고 촉발될 수 있는 신체들의 강렬도들 혹은 역능들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신체의 세계이며, 신체들의 변형 권력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질적인 복수성들의 세계이자, 리좀적(rhizomatic) 아상블라쥬들(배치들)과 노마드적 전쟁-기계들의 세계이다. 그러한 세계에서 사물의 개별화 양상은 상이한 잠재력들(potentials) 사이에서 번쩍이는 것으로 이해되는 전기적 신호의 양상과 매우 유사할 것이며, 혹은 강렬도들의 복합적 배치(configuration)들로 이해되는 개별성들(haeccities)의 양상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들뢰즈의 플라톤주의 '전복'은 동일성과 유사성의 관계보다는 차이의 역할이 사물들의 본성을 표현한다는 세계에 대한 그의 개념화를 발전시키는 수단을 예시하고 있다. 시뮬라크라의 선차성을 주장하는 것은 따라서 "같음(the Same)과 유사함(the Similar)을, 모델과 복제를 허위(적 판타즘)의 권력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도록 만든다. 그것은 참여(participation)의 질서를, 분배의 고정성(fixity)을, 위계의 결정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노마드적 분배의 세계와 영예로운 아나키들(crowned anarchies)의 세계를 정립한다."(들뢰즈, 1990, p. 263).

 

 


이러한 '전복'은 또한 표상의 질서를 극복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들뢰즈의 비판전략은 해체의 이중적 모습과 유사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것은 유사한 국면들의 연속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로 동일성과 차이 사이에 정립된 위계질서의 전복, 그리고 차이에 기반한 사유의 개념화에 대한 결과적인 긍정. 여기에서 같음은 파생적인 혹은 결과적인 효과로 되어간다. 두번째로, 이러한 최초의 전복의 결과로서 표상의 구조는, 첫번째 국면에서 위계질서를 정립하고 있는 표상의 구조는 해체된다. "시뮬라크룸은 품질이 저하된 복제가 아니다. 그것은 원본과 복제를, 모델과 재생산을 부인하는 긍정적 권력에 정초한다."(들뢰즈, 1990, p. 262). 따라서 배제된 용어는 그 배제를 보증하는 바로 그 구조를 탈조직화하고 전도하기 위해 돌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외양상의 유사성은 들뢰즈와 해체의 전략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은폐한다. 플라톤주의 내에서 동일성의 선차성에 대한 데리다 식의 반응이 대립이라는 안정적인 구조를 양가성 혹은 미결정성이라는 변동하는 기초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반면, 들뢰즈적인 반응은 복제들과 시뮬라크라들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은 차이를 종류상의 차이로 되어가는 지점으로까지 밀어부친다. 이러한 경우에 종류상의 차이는 차이 자체의 개념과 관련해서 출현한다.

 

 

 


데리다는 차이가 시뮬라크룸이라는 통념과 비슷함(likeness) 혹은 복제 자체라는 통념 모두에 내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표상에 관한 질문으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특히 그는 그것이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동일한 차이인지의 여부를 묻지 않는다. 그것이 동일한 것이라는 점은 그가 시뮬라크라를 복제들의 복제라고 언급하고 있는 사실에 의해 제시된다(데리다, 1981, p. 138). 외양들의 모방의 경우에 있어서 모방이 일어나는데 필수적인 모방한 것과 모방된 것의 차이가 강화된다. 이차적인 수준(degree)에 있어서 이러한 차이는 생산물을 복제보다는 시뮬라크라로 만든다. 시뮬라크룸은 따라서 이차적인(second-order) 복제가 될 것이며 복제와 원본의 차이도 강화된다. 시뮬라크라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들뢰즈에 의해 명확히 거부된다. "우리가 시뮬라크룸이란 복제의 복제이요, 무한한게 품질이 저하된 아이콘이요, 무한하게 느슨한 유사성이라고 말하게 된다면, 우리는 본질적인 것, 즉 시뮬라크룸과 복제 사이의 본성상의 차이를 놓치게 될 것이다."(들뢰즈, 1990, p. 257). 다시 말해서 들뢰즈는 그것이 각각의 경우에서 동일한 차이인지의 여부를 물으며,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한다. 그의 답변은 플라톤 자신이 모방의 두 종류 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도입하고 있다는 주장에 의존한다. 즉 선한 모방 혹은 복제와 나쁜 모방 혹은 시뮬라크라. 이것들 사이의 차이는 각각의 경우에 유사함(similitude)의 성격에 의존한다. 즉 선한 복제들의 경우에 모범적인 비슷함은 비례의 같음(sameness)에 혹은 사물 자체와의 '내적인 닮음(resemblance)'에 의존한다. 나쁜 복제들 혹은 시뮬라크라에 있어서 외양상의 닮음은 비례상의 차이에, 혹은 사물자체와는 종류상의 차이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러한 두 종류의 모방들 사이의 차이는 각각의 경우에 모방과 모방된 것간의 차이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 선한 복제의 경우에 있어서 모방/복제와 원본간의 차이는 유사함 내의 차이이다. 다시 말해서 사물들 사이의 차이는 본질적인 관점에서 같음(the same)이다. 플라톤적인 표상의 세계 내에서 차이는 이차적이거나 파생된 관계이며, 원본에 대한 복제의 유사함(similarity) (그러므로 그것들의 같음이나 종적 동일성)이 일차적이다. 시뮬라크룸과 이것이 시뮬레이트하는 것의 차이는 이와 달리, 또다른 질서의 차이이다. 시뮬라크룸은 본질적인 관점에서 그것이 시뮬레이트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것이다. 비록 그것이 원본의 외양을 재생산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효과로서 그렇게 할 뿐이다. 여기에서 두가지의 외양성의 동일성은 이차적이고 파생된 관계이며, 반면 이것들의 차이가 일차적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시뮬라크라의 특성을 차이에 대한 또다른 개념화, 즉 '자유로운 차이'를 명료화하기 위한 기초로 사용하지 플라톤적 우주를 지배하는 표상의 종속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미학적 모더니티는 들뢰즈에게 차이가 자유로운 영역(reign)을 가질 수 있는 세계에 관한 하나의 전형적인 예를 제시한다. 그는 모더니티란 시뮬라크룸의 역능에 의해 정의된다고 주장한다(들뢰즈, 1990, p. 265). 시뮬라크라는 차이에 의거해서 닮음(resemblance)의 효과를 생산할 수 있는 권력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에 시뮬라크룸의 역능은 반복의 권력과 등가를 이루며, 이러한 의미에서 들뢰즈는 반복을 표상에 대립시킨다. 차이가 일차적인 관계인 세계의 맥락 내에서 차이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듯이, 이러한 맥락에서 반복은 더 이상 같은 것의 재출현으로 이해된 반복이지 않게 된다. 예술은 항상 반복을 포함했으나 이 때의 반복은 시뮬라크라가 '반복한다'는 의미에서의 반복이다. "예술은 모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반복하기 때문이다. (모방은 복제이지만 예술은 시뮬레이션이다.)"(들뢰즈, 1968, p. 375). 현대예술의 독특한 특징은 그것이 그 자신의 본성의 이러한 측면을 평가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 가장 모범적인 예의 하나가 팝아트이다.

 

 


팝아트와 더불어 예술은 자신을 시뮬라크라의 생산으로 의식하게 되었으며, 워홀의 '계열적(serial)' 작품은 상이한 색감과 크기로 신문과 대중사진의 재생산과 더불어 이미지들의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방법에 의식적으로 주목한다. 그러나 이들 작품들이 이미지들을 반복하기 때문에, 따라서 현대적 삶의 광범위한 특징을 시뮬레이트하기 때문에 이 작품들은 예술의 시뮬라크라적인 특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본질적인 점을 놓칠 수 있는 위험을 범하게 된다. 이들 작품 이전에도 워홀은 1964년에 그의 스테이블 화랑(Stable Gallery)에서 시뮬라크라로 충만한 전시회를 열었다. 수백개의 합판 상자들은 브릴로 상자들, 캠프 수프 상자들, 캘로그 콘프래이크와 다른 슈퍼마켓 상품들과 매우 유사하게 실크스크린되었다. 그러나 워홀은 실물과 구별할 수 없는 그림(tromp l'oeil)을 그리지 않는다.

 

워홀이 전시한, 엄격한 플라톤적 의미에서 시뮬라크라인 물질적 오브제를, 아서 단토가 매우 확신적으로 보여주었듯이 그 물질적 재료와 동일시될 수 없는 고유한 예술작품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워홀의 설치미술(installation)은 예술가적 개입(예술 세계 내에서 차이의 생산)이 시뮬라크라를 물질적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시뮬레이트하기 위해서 진부한 오브제를 선택한 것은 이 오브제들이 이들 예술작품들을 만드는 실재적 오브제와 유사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이 작품들은 예술이 시뮬레이션의 문제라는 점을, 그러나 시뮬레이션은 대체된 혹은 변장된 반복의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시뮬레이션은 외양의 재생산이라기 보다는 효과의 생산이다. 문제로 되는 효과는 유사함(resemblance)의 효과이며, 아니 어쩌면 유사함의 효과에 의해 생산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시뮬라크라의 세계에서 어떤 특권도 갖지 않는다.

 

 


워홀의 작품이 표상의 관념과 여전히 불장난을 하는 한, 사유에 대한 들뢰즈의 비표상적인 개념화는 가장 적합한 미학적 상관물은 아니다. 추상표현주의는 아마도 가장 적합한 예일 것이다. 폴콕이나 뉴만의 거대한 캔버스는 어떤 것도 표상하려고 하지 않지만 경험의 상태를 전달하려고 하거나 관람자에게 효과를 생산하려고 할 것이다. 들뢰즈는 바로 이러한 예술의 기능과 사유에 대한 비표상적 개념화를 제휴하도록 한다. 개념들은 더 이상 사물들의 이미지들로 간주되지 않으며 그 자신의 방식으로 사물들로 간주되며, 이 사물들은 강렬도들을 전달하거나 다른 사건들과 과정들과의 상호작용의 수단을 제공한다. 철학사에서의 반(反)전통은 이러한 사유의 실천들의 많은 심금들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사유에 대한 '이중적 독해'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단지 특이한 개념적 기구들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에티카 에 의해 발생된 효과들이나 생생한 충동(impulses)에 의거해서도 정의된다. 그리고 이것은 스피노자를 '만남, 정념'으로 만든다(들뢰즈, 1988, p. 130).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는 '철학 내에서 극장과의 터무니없는 등가물'(들뢰즈, 1968, p. 16)의 창조자로 여겨지는 한에 있어서 또한 이러한 기획의 선구자이다. 이것은 독자들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호로 개념들을 배치하는 극장이다. 사유에 대한 들뢰즈의 비표상적인 개념화에 의해 수반되는 철학의 실천은 그러므로 플라톤의 시각에서는 가장 위험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의 권력을 포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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