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세상과 세상사이
버클리의 철학(2)
「내가 의미하는 것은, 마음 속에 있는 어떤 집의 표상 image가 아니라, 내가 남이 지각하지 않은 어떤 집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할 경우에, 내가 실제로 의미하려고한 것은, 내가 다음과 같은 명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아무도 지각하지 않은 하나의 집이 있다> 또는 더욱 잘 표현하자면, <아무도 지각하거나, 생각하지 않은 하나의 집이 있다>는 명제를 의미한다 」
이 명제는 잘 이해할 수 있는 낱말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낱말의 구성은 올바로 되어있다. 이 명제가 모순되어 있지 않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는 이와 거의 비슷한 명제를 증명할 수 있다. 예컨대 두 整數에 곱할 수 있는 數는 무한하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전혀 생각된 일이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버클리의 주장이 옳다면 이것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여기 내포된 오류는 매우 일반적인 것이다. 우리는 경험에서 비롯된 개념에 의해, 지금까지 경험하지 않은 것을 포함한 어떤 무리 群에 대하여 진술할 수 있다. 일반적인 개념을 예로 들면 같은 것이다. 이 「자갈」이라는 개념도 자각에서 형성된 경험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자갈」이라는 정의 속에 지각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위와 같이 「자갈」이라는 개념 속에 지각된다는 점을 포함시키지 않으면, 「지각되지 않은 자갈」의 실례는, 논리적으로 하나도 지각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지각되지 않은 자갈」이라는 개념은, 논리적으로 부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을 圖式的으로 표시하면 이렇게 된다. 즉 버클리는 말하기를,
「감각적인 대상은 감각되어야 한다. A는 감각적인 대상이다. 그러므로 A는 감각되어야 한다. 」
그러나 여기서 「어야」 한다 는 말이 논리적인 필연성을 나타낸다면 이와 같은 주장은 A가 감각적인 대상이 되어야 할 경우에만 참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A가 감각적이라는 특질 이외에 다른 A의 특질로부터 A가 감각적이라는 것이, 演繹될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생각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보는 것과 구별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생리학적인 이유에서 이와 같은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는 경험적이며, 논리에 관계되는 한, 눈이나 두뇌가 없는 곳에는, 색깔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이유는 없다.
인제는 버클리의 경험적인 논의에 대하여 고찰할 단계에 이르렀다. 먼저 경험적인 논의와 논리적인 논의를 결합시킨다는 것부터가 약점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그 주장이 진리라면, 논리적인 논의는 경험적인 논의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어제 밤에 취하지 않았다. 나는 두 잔 밖에 마시지 않았으니까. 뿐더러 내가 금주주의자라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만일 내가 「사각형은 둥글지 않다 」는 것을 주장한다면, 나는 도식에서도 그 윤곽이 둥근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호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논리적인 증명을 거부하였으므로, 인제 경험적인 논의에 대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
경험적인 논의 중에서 첫째 것은 이상하게 생각된다. 즉 熱이란 대상 속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열은 심한 고통이기 때문이며 「지각할 수 없는 사물이 고통과 쾌락을 느낄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클리가 사용하고 있는 고통이라는 말에는 애매한 데가 있다. 이것은 감각에서의 고통스러운 성질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성질을 갖는 감각을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러진 다리가 아프다고 말할 경우에, 이 아픈 다리가 반드시 마음 속에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이 경우에는 열이 고통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열이 고통이라고 말할 경우에 의미하는 것은 오직 이것일 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의는 빈약하다고 하겠다.
미지근한 물에 있어서의 뜨거운 손과 찬 손의 논의는,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이 실험에서 느끼는 것은, 뜨겁다든가(차다고) 하는 것을 증명할 뿐이며, 결코 이것이 뜨겁다거나 찬 것이 주관적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맛에 대해서도 快.苦에 의한 논의가 거듭되고 있다. 단 것은 쾌락이고, 쓴 것은 고통이다. 그러므로 이 兩者가 다 정신적이다.
그리고 건강할 때에 달던 것도 병들었을 때에는 쓰다는 것도 주장한다. 냄새에 대해서도 꼭 같은 주장을 적용시킨다 .왜냐하면, 냄새도 쾌락과 고통을 일으키며, 이런 것은 지각하는 實體, 즉 마음 속에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클리는 여기서 또 어디서나 물질에 부수되어 잇지 않은 것은, 정신적인 실체 속에 부수되어 있어야 하며, 아무 것도 정신인 동시에 물질일수도 없다고 가정한다.
소리에 대한 논의는 개인적인 것이다. 하일라스에 의하면, 소리는 「실제로」공기 속의 운동이라고 하며, 필로누스는 이를 반박하여 운동은, 들리지 않지만 보거나 느낄 수 있는데, 실재하는 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리는 소리와, 물리학이 그 소리의 원인으로 보는 공기의 운동과는 동일하게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면, 그것은 진리이다.
하일라스는 제 2 속성을 포기하고 나서도, 제 1속성은 포기하지 못한다. 즉 연장, 모양, 견고성, 무게, 운동, 정지 등이 그렇다. 논의는 자연히 연장과 운동에 집중된다. 참으로 크기를 가진다면, 필로누스는 말하기를, 같은 사물이 동시에 다른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知覺에 가까이 가면 , 크게ㅐ 보이고, 거기서 떨어지면 작게 보인다. 그리고 만일 운동이 실제로 대상 속에 있다면, 어찌하여 동일한 운동이 어떤 사람에게는 빠르게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더디게 보일 수 잇는가?
이와 같은 주장은 내 생각으로는, 지각된 공간의 주관성을 입증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주관성은 육체적 Phisical이다. 이것은 마치 카메라와 같다. 그리므로 이 주관성은, 모양이 정신적인 것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필로누스는 둘째 대화에 있어서, 그때까지 논의해 온 것을 다음과 같은 몇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정신 spirit이외에는 우리가 알거나 생각하는 것은 다 우리의 관념이다.」
그는 물론 정신에 대하여 예외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을 아는 것은, 물질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주장은 두 가지 경우에 거의 동일하다.
우리는 이제 버클리가 시작한 논의의 결과로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참된 결론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사물들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정도는 감각적인 속성의 묶음 束이다. 예컨대 책상은 눈에 보이는 모양이나 크기, 두들겨서나는 소리, 그리고 그 냄새(만일 있다면) 등으로 되어 있다. 이 여러 가지 다른 성질들이 경험에 있어서 일정한 관념의 연합을 일으켜, 상식으로 하여금 이성질들이 하나의 사물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사물이나 실체의 개념은 지각된 성질을 증가시키는 점은 전혀 없으며, 따라서 이것이 없어도 무방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지각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필로누스는 감각적인 사물에 대하여 주장하기를, 그 실재성은 그것이 지각되는데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 지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지각이 주관과 지각 대상과의 관계라는 주장을 부인한다. 그는 자아를 하나의 실체로 믿고 있으므로, 이 주장을 받아들여야했지만, 그는 그 반대편을 들었다. 실체적인 자아를 부인한 사람은, 이 학설은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각대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물체가 되는 어떤 것이 마음에 떠오른다는 것 이상을 뜻하는가? 우리는 버클리의 말을 바꾸어, 실재는 지각되는 데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대신에, 지각되는 것이 실재이기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무엇이든 간에 버클리는 지각되지 않는 사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논리상 가능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실재적인 사물, 즉 영적인 실체는 지각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일이 지각된다고 말할 경우에, 분명히 그것은 단지 마음에 떠오르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럼 이 이상의 것이란 무엇인가? 지각된 사건과 지각되지 않은 사건 사이의 구별은, 전자는 기억될 수 있고 후자는 기억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밖에 또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
回想은 정신적인 것이라고 불리어지는 현상의 결과에서 오는 인상 중의 하나이다. 이 정신 현상의 결과인 인상은 습관과 관련된다. 데인 경험이 잇는 어린 아이는 불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부지깽이는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리학자는 습관이나 그와 비슷한 종류의 현상을 신경 조직의 한 특질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물리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경우에, 그 사건이 어떤 결과를 남기기만 하면, 그 사건이 「지각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물이 흘러간 자리는 이미 이 자리를 낸 물을 지각한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계곡은 전에 쏟아진 소낙비를 기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습관이나 기억은 물리학자들의 용어로 말하면, 무생불 속에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견지에서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구별은 단지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견해에 의하면, 하나의 사건이 「지각된다 」는 것은 그 사건이 어떤 인상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논리상으로나 경험상으로 모든 사건이 이와 같은 인상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그의 인식론은 어떤 다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완성된 과학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과학의 기초가 되는 지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대체로 이러하다.
우선 우리는 추리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다는 命題를 내세운다. 그리고 이 명제들의 대부부분은 시일이 정해 있는 특수한 사건event 들과 관련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지각 대상 」이라고 정의한다. 지각대상은 우리가 추리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사건을 말한다. 그리고 적어도 기억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사건들은 언제나 지각대상이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지각대상에서 어떤 다른 사건을 추리할 수 있는가. 여기서 네 가지 입장이 가능하다고 보겠다. 그 중에서 세 가지는 관념론의 일종이다.
(1)
우리는 자기 자신의 현재의 지각대상이나 기억에서 다른 사건을 추리하는 것을 부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견해는 추리를 연역에만 국한하려는 사람들이 흔히 갖게 마련이다. 여기서는 모든 사건이 또는 모든 사건 군이 이 논리상 독립되어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일련의 사건이 다른 사건의 존재를 논증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는 세계는, 우리의 생애에서 일어난, 우리가 지각하는 사건에만 국한되어 있다. 그리고 기억이 안정된다면, 우리가 지난 날에 지각한 사건까지도 포함될 것이다.
(2)
둘 째 입장은 흔히 唯我論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의 지각대상에서 약간의 추리를 하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단지 나 자신의 생애에서 이와 같은 다른 사건에만 국한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깨어 있는 어떤 순간에, 우리가 미처 주의하지 못하고 있는 감각적인 대상이 잇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일일이 본다고 생각하지 않고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환경 속에서 주목을 하고 잇을 경우에 그 속에 아무 운동도 일어나지 않고 있지만 계속해서 여러 가지가 우리의 주의를 끌게 된다. 이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기 전에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그것들을 의식하기 전에는 인식론의 소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가 관찰한 것으로부터 이런 정도의 추리는 다 무의식적으로 하고 잇다. 우리의 지식이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 부당하게 확대되는 것을 피하려는 사람들까지도 그 정도의 추리는 허용하는 것이다.
(3)
셋째 입장은 에딩톤 Eddington 같은 사람이 주장한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우리 자신의 경험과 유사한 다른 사람의 사건을 추리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른 사람이 보는 색깔이나 느끼는 치통, 또는 즐기는 쾌락, 당하는 괴로움 같은 것을 믿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에 의해 경험한 일이 없는 사건, 즉 어떤 사람의 마음의 한 부분도 형성하지 않은 사건을 추리할 권리는 없다. 이와 같은 견해는, 나의 관찰 밖에 있는 모든 사건은 오직 類推analogy에 의해 추리할 따름이라는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경험하지 않은 사건은, 나의 감각적인 所要에 유사하다고 추리하는 것을 보장하기 어렵다.
(4)
넷째 입장은 상식과 전통적인 물리학의 그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자신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의 경험 이외의 것, 즉 아무도 경험하지 않은 사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령 내 침실의 가구들이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존재하고 또 캄캄한 동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어 G.E. Moore는 관념론자를 이렇게 비난한 일이 있다. 즉 관념론자는 그들이 단지 정거장에 잇을 대에만 기차는 바퀴를 갖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차 속에 앉아 있으면 바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상식 common sense 은 승객들이 바퀴를 볼 때에 기차가 갑자기 나타나고, 보고 있지 않으면 갑자기 없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넷째 입장이 과학적인 방법을 취할 경우에는 지각되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추리를 인과법칙의 기초 위에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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