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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나호열 시인/세상과 세상 사이

白碑를 찾아서

by 丹野 2010. 2. 15.

 

 

 

白碑를 찾아서

 

                                                                                                            나 호열

 

 

 살아 진천(鎭川)이요, 죽어 용인(龍仁)에 묻힌다 했던가? 백두대간 한 줄기가 서해로 달려 나가며 풀어놓은 산들과 너른 들판을 함께 안은 진천 땅은 곳곳에 선인들의 발자취와 땀방울이 아로새겨 있으면서도 쉬이 발길을 멈추지 못하는 곳이다. 그런데도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풋풋한 인정 속에 한 평생 지내고 싶은 그런 땅. 지척에 우리나라 남사당패의 근거지였던 안성 청룡사 불당골, 소설 임꺽정의 무대가 되었던 칠장사가 있으며,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은 태령산,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추정되는 농교 등이 진천에서 만날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어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을 재현한 보탑사 목탑이 최근에 완공되어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1991년에 터를 닦고 1996년 8월에 결실을 맺었다. 현존하는 목탑으로는 법주사 팔상전과 전남 화순의 쌍봉사 목탑이 유일한데 여기에 보탑사 목탑이 그 위용을 더하게 되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만 해도 80미터가 넘는 대탑으로 신라의 3국 통일의 의지를 담았으나 몽고와의 전란에 휩싸여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는데 병화에 사라진 지 750년 후에 그 위용을 되찾는 役事를 일으킨 것은 종교를 떠나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우는 사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고 건축의 名匠 신영훈이 못질 하나 하지 않고, 국내산 적송을 트럭으로 15대 분이나 사용하여 아파트 14층 높이 40미터가 넘는 목탑을 재현한 것은 그 뜻만으로도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그 유례가 드물게 3층 목탑 안을 걸어서 올라갈 수 있는 탑으로 설계되어 있어 佛子가 아니더라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저절로 감화를 받을 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각 층은 계단으로 연결해 쉽게 오를 수 있으며 층별로 사방으로 문을 내 통행이 가능하다. 1층은 대웅전으로 예불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인데 남방 석가모니불, 동방 약사여래불, 서방 아미타불, 북방에 비로자나불이 조성되어 있어 한 공간 안에 4개의 전각이 들어서 있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목탑의 바깥에서 보면 사방 각 면에 각각 다른 이름이 붙여져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2층은 법보전으로 팔만대장경 번역본을 넣은 윤장대가 있고 3층은 미륵전으로 미륵삼존불이 모셔져 있어 관람객이나 불자가 몰리는 시간을 피할 수만 있다면 오롯한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층은 법보전이다. 가운데 윤장대를 두고 법화경 석경을 봉안했다. 윤장대에 8만 대장경 번역본을 안치했고, 17만 자의 한글법화경을 총 9톤 무게의 돌판에 나눠새겨 봉안했다. 3층은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신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다. 2, 3층에 올라가 문을 열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난간이 사방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그 난간을 따라 탑돌이를 할 수도 있다.

 

 

 

 

 보탑사 마당을 건너서 비각이 하나 보인다. 목탑과 비대칭인 백비, 보물 404호로 지정되었는데 이수 부분의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무는 모습이 정교하고 조각의 방식을 봐서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이라는 추측만 할 뿐, 비석의 기록이 없으니 그 내력을 알 길이 없다. 우리나라에 비석에 아무 것도 새겨지지 않은 백비는 대여섯 개 정도라고 하는데, 자료에 따르면 '백비'는 원래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라 한다. 글자 없는 비석에 대한 호칭은 예로부터 '무자비'(無字碑) 혹은 '몰자비'(沒字碑)라고 했다. 하지만 백비라는 말이 언제부턴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는 것. 우리나라에는 현재 고려 말 충신 이오의 백비(경남 함안), 고려 말 효자 이온의 백비(경남 고성), 조선 중기 영의정 최흥원의 청백리 백비(경기도 파주) 등 7~8개의 백비가 전해져 내려온다는데. 전남 장성에 그 고장 출신 박수량 묘소 앞의 백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조선조의 청백리로서 관직 생활 24세에 관직에 올라 64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38년 동안 봉사하면서도 집 한 칸이 없었으니 그의 올곧음은 先公後私의 정신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탐관오리 들에게는 서늘한 칼날과도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이 현존하는 대다수 백비가 묘비인데 비하여 이곳 보탑사 백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묘비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면 그 의미가 무엇일까? 처음부터 아예 아무런 글씨를 새기지 않았다거나 비석을 조성 중에 무슨 연유인지 비문을 새겨 넣지 못했다거나 원래 비문이 있었는데 그 비문을 지워버렸다라는 추측들이 설왕설래하는데 그 어느 하나도 분명한 증거가 없으니 그저 바라보고 바라볼 뿐이다.

 

 나의 삶은 어떠하더냐? 한 두 마디 새겨둘 만한 이야기가 있더냐? 끝내 한 줄기 시간을 잡지 못하고 이슬처럼 사라져버리는 그런 운명은 아니었더냐? 백비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순례객 들이 다 백비 같다. 돌아 나오는 길에 풍경 마루에서 차 한 잔 마시며 돌아갈 여정을 되씹어 보는 것도 나그네의 흥취이다.

 

큰 길 버리기 주저하는 나에게

슬쩍 옆모습 보여주는 오솔길을 따라

연꽃골로 가네

꽃술 자리 인적 뜸한 그곳에

참 이상도 하지

누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되돌아오고

또 누구는 그 뜻을 알겠다는듯이 웃음 흘리며 오고

나도 그 자리에 서 보네

비석이기는 하되 아무 글자도 적혀있지 않은 백비

풍상에 시달려 글자가 몽땅 날아가 버렸다거나

애시당초 글자는 한 자도 새겨지지 않았다거나

설왕설래 생각도 많았지만

지팡이 짚고 구부정 허리를 펴지 못하고

비탈길을 걸어 내려가는 노인을 보면서

백비를 세운 그 사람의 마음을 설핏 본듯하여

가슴이 서늘해졌다

 

- 인간을 읽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글자가 없고

영원을 읽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한갓 돌덩이에 불과한 것을

 

                                                                           졸시 「백비」전문

 

 처음 보탑사와 백비를 만난 것이 2000년 6월 7일, 진천 출신의 오랜 문우인 오만환 시인의 안내를 받아 생각이 많았는데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찾아갈 때마다 백비는 욕심내지 말고 이 세상에 무엇 하나 넘기지 말라고 나를 꾸짖는다.

 

 보탑사와 백비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비립동 485-2에 위치해 있다. 경부고속도로는 목천 나들목으로 나와 진천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연곡리 입구에서 좌회전 하면 된다. 중부고속도로는 진천 나들목을 이용하여 진천읍을 지나쳐 엣 17번 도로 청주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사석리에서 천안방면 21번 도로를 따라가서 2 킬로미터쯤 지나서 우회전 하면 된다. 승용차가 아니더라도 넉넉하게 천천한 걸음으로 둘러보고 싶다면 진천시내버스터미널에서 043-533-1501~2 연곡리까지 1일 4회 운행(06:30 , 10:00 , 14:40 , 18:40) 하는 버스를 타고 좋을 것이다.

 

 보탑사가 가까워지면 차 한 대가 들어가는 좁은 길이다. 갑자기 좁아지는 그 길이 일주문이고, 불이문이며, 사천왕문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연꽃 잎이 펼쳐진 형상, 그래서 마을 이름이 蓮谷里인가? 나들이 철을 피해서 발걸음을 한다면 보탑사 주변의 풍광과 더불어 소담한 카페에서 잠시간의 여유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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