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 p r a h a
경주남산 삼릉곡 마애관음보살입상
31 번 국도
나호열
경주에 가서 남산을 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경주를 아예 가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남원의 광한루가 관광지화 되어 고적함과 춘향전의 문학적 향기를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여 본다면 남산 없는 경주는 너무 쓸쓸하다.
바쁜 일정에 남산 오르는 일을 포기하고 경부고속도로를 탈까 하다가 내륙도로를 이용하여 귀경하는 여정을 꾸려 보기로 하였다. 경주에서 포항가는 길, 도로가 넓어질수록 우리의 마음은 정처 없이 빨라진다. 7 번 국도, 영천으로 가는 산업도로를 마주치며 포항 못 미쳐 연일에서 31 번 국도를 만나는 것이 조금 신경 쓰이지만 일단 31번 국도를 올라타고 표지판만 유의해서 본다면 길 잃고 헤매일 염려는 전혀 없다.
경주에서 31번 국도를 만나는 또 다른 길은 경주 시내에서 덕동호를 옆구리에 달고 감포로 해서 포항으로 가는 방법이다. 경주에서 토함산의 어깨를 타고 넘는 산길은 유홍준에 의해서 아름다운 길로 뽑히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터널이 뚫려 그 정취를 잃은 지 오래이다. 감포로 가는 길에 감은사지에서 바라보는 동해 바다와 대왕암의 풍치도 뛰어나지만 감포 포구에서 갈매기를 벗 삼아 오징어 물회를 먹어보는 것도 즐겁다. 감포에서 구룡포로 빠지는 토끼 꼬리 부분 그 하얀 등대를 꼭 내 마음 속의 높은 곳에 옮겨 놓아 보자. 어두울 때,절망에 빠져 있을 때, 껌뻑껌뻑 눈물 흘리는 그 외로움을 잊지 않기로 하자.
경주에 갈 때에는 정일근 시인의 시집 '경주 남산'을 꼭 들고 갈 일이다.유적지의 성의 없는 안내판을 읽는 것 보다, 내력이 어쩌고저쩌고 노트에 적는 것 보다, 눈 감고 마음으로 구구절절 울려오는 시들을 읽어 보아야 할 일이다.
연가
- 경주 남산
허락하신다면, 사랑이여
그대 곁에 첨성대로 서고 싶네, 입 없고 귀 없는 화강암 첨성대로 서서 아스라한 하늘 먼 별의 일까지 목측으로 환히 살폈던 신라 사람의 형형한 눈빛 하나만 살아,하루 스물 네 시간을, 일 년 삼백에순닷새를 그대만 바라보고 싶네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밤하늘의 별이 되어 저마다의 눈물로 반짝이고,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의 순금 팔찌와 아사달을 그리워한 아사녀의 잃어버린 그림자가 서라벌의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로 떠오르네, 사람아 경주 남산 돌 속에 숨은 사랑아, 우리 사랑의 작은 별도 하늘 한 귀퉁이 정으로 새겨
나는 그 별을 지키는 첨성대가 되고 싶네
밤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쌓아 하늘로 올라가 그대 고운 눈 곁에 누운 초승달로 떠 있다가, 새벽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풀고 땅으로 내려와 그대 아픈 맨발을 씻어주는 맑은 이슬이 되는,
- 정일근 시집 < 경주,남산>
초행길은 언제나 더듬거린다. 두근거린다. 낯 선 마을, 낯 선 사람들 31 번 국도는 띄엄띄엄해진다. 너른 들판은 가을걷이가 한창이고 들판은 조금씩 가슴이 좁아지며 숨결이 가파라진다. 맑은 공기는 햇빛을 더욱 강렬하고 투명하게 만들면서 제멋대로 뛰어놀게 만든다.햇빛들이 일순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그 찰라. 아! 사과나무들, 저 불덩어리들 한꺼번에 길을 막아선다.
바람에 흔들리는 혼불 다가가서 보면 주먹만한 햇살덩이
청송에서 영양가는 31 번 국도는 빨갛게 물들었다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얼굴 붉어지던 여자
깨물어보고 싶던 앙큼한 속살
지금 언뜻 광주리 좌판에 먼지 뒤집어 쓴
저 청승스런 신 맛!
- 사과 -
열매를 보면 눈물이 시큰해진다. 모루, 다래, 산초....그 작디작은 열매들 눈물 같다. 삭고 삭아서 눈물은 몸 자지러지는 신 맛이다. 입 안 가득 베어 문 사과의 속살이 슬픈 맛을 낸다. 사랑의 내장을 도려내는 것 같아서, 발기발기 찢어내는 것 같아서 악셀레이터에 힘을 주자 앞서가는 차가 코 앞에 닿는다. 시속 20킬로미터, 도무지 비켜줄 생각도 없고, 속력을 높일 생각도 없다. 클락tus에 손이 가다가 멈춘다. 오가는 차가 없으니 추월하면 그만이다. 좌측 깜박이를 켠다. 그는 열심히 간다. 신중하게 앞 길을 더듬는 모습이 환히 보인다. 나도 힘을 빼고 발걸음을 늦춘다. 고개길이 나타나자 걸음은 더욱 느려진다. 길 가로 도열한 올곧은 적송들이 산비탈에 비스듬히, 꽂혀있다. 비스듬히? 나무들은 올곧은 것이다. 자신의 방식대로 곧게 서 있는 것이다. 비스듬한 것은 저 비탈일 뿐이다. 소나무는 비사교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비기질이 있다고 한다. 옆에 다른 나무가 틈입하는 것을 못 참는다고 한다.차라리 죽어버리고 만다고 한다. 인수봉 꼭대기에 키 작은 소나무가 있다. 백운대에서 보면 그 나무가 잘 보인다. 백운대에 오를 때 마다 나는 생각한다. 왜 저기에, 비바람 매서운 산정에 홀로 사는가? 아직 그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이십 년 책보시와 사십 년 사람 공부가 울울한 적송 한 그루만 못하다
수 십 척 올곧은 자세를 일으키기 위하여 뿌리채 휘어지는 굴복이 얼마나 많았겠나
저 허공에 막막한 길 있다고 뚝심 하나로 비탈에 선 것은
필경 인간의 마을에 닿고 말 것을 먼 발치로 굽어보며
힘찬 팔뚝으로 부질없는 바람을 몸 속에 잡아넣는다
넉넉히 백 년만 기다리거라
온몸을 부딪쳐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울음을 들려주겠다
- 적송
적송은 경북 내륙의 울진, 봉화가 으뜸이다. 곧고 굳어서 대들보로 쓰임을 당하는 用의 경지,자기 PR 에 열 올리며 자기의 몸값을 올리려는 풍진 세상의 용용 죽겠지......
청송이나 영양 다 군청 소재지이지만 조그만 마을이다. 청송하면 떠오르는 주왕산, 달기약수, 그리고 80년대의 감호소...그냥 지나치기로 하자. 너무나 간절하여 머뭇거렸던 첫사랑. 완성되지 못하여 잊지 못하는 그리움의 공터를 조금은 남겨 두기로 하자.
길은 한낮인데도 정적이 가득찬다. 하교길의 학생들, 재잘거리며 가는 산을 닮은 아이들, 신호등도 없는,이리 돌고 저리 도는 길
누가 이렇게 이쁜 이름 걸어놓고
황홀하게 죽어갔는가
무지개
그 양 쪽 끝에서
터벅거리는
사랑
사막
지옥
- 실크로드
영양에 못 미쳐 신구에서 좌회전하면 승용차 한대가 겨우 지나칠 수 있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 끝에 신라 말의 모전석탑이 밭 가운데 우뚝 서 있다. 모전 즉 벽돌로 지는 불탑은 우리에게는 그리 흔하지 않은데 천 병화와 환란을 용케 견뎌온 그 모습 속에 선조들의 얼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 탑에서 백 미터 쯤 아래로 안동호로 흘러가는 강이 보이는데 아마도 이쯤에 신라의 큰 가람이 있지 않았나 어림짐작을 해 본다.단좌한 바위와 푸른 강물을 바라보며 수도와 기원을 거듭했을 천 년 전의 사람들. 여정을 잠시 멈추고 강과 마주한다.
만물은 유전한다고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 발 담글 수 없다고
나는 가르쳤다. 그러므로 마음 뿌리 내리지 말라고
부질없는 일이라고
그러나 용서해다오
어제밤 질그릇 하나 이슬 같은 눈물 한방울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그렇게 어디론가 스며들어가는 바퀴소리
흘러가더라도
연기가 되더라도
무더기로 피어나는 개망초들이 얼마나 힘들게
우주를 밀어 올리는 지
저녁이 앉은걸음으로 다가와 어둠의 이불을
살아았는 것들에게 어떻게 덮어주는 지
흘러가는
흘러가는 그 사이에
잠깐 머물며
황홀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 흘러가는 것들을 위하여
영양은 산골이다. 상점의 입간판들, 사람들, 장날이라도 북적거리지 않는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 보고 싶을 만큼 느린 삶. 저기 앞에 가는 군내버스가 일월산 고개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있다. 손님은 하나도 타지 않고 흘러간 가요만 싣고 쉬엄쉬엄 고개를 넘는다.일월산 고개를 넘으면 봉화땅. 1200 미터 일월산에 늦가을 해가 줄넘기 하듯 걸려 있다. 고개 마루턱 못 미쳐 작은 휴게소, 뒤쳐져 따라오던 군내버스도 털썩 주저앉는다. 산나물 캐온 주인 아저씨는 코를 골며 잠들고 주인 아낙네는 혼자 소주병을 딴다. 군내버스 기사는 허리띠 풀고 아낙네와 술잔을 주고 받는다. '봉화 갈 사람도 없는데 여기서 자고 아침 일찍 갔다 오지'
가을꽃들이 배실거리며 웃는다. 찬 바람은 혼자 고개길을 내려간다.
영양에서 봉화장 가는 군내버스 쉬엄쉬엄 일월산 고개턱에 그예 펄썩 주저앉는다. 무임승차한 해는 봉화 쪽으로 서둘러 기울고 주막 여주인은 방금 소주 한 병을 딴다. 에따 나도 한 잔 주쇼,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내려갈란다. 서둘러 산국이 화장을 지우고 31번 국도도 따라서 파장이다. 뒤죽박죽 제멋대로 그래도 편안히 몸 내어주는 산막에 가을만 저 홀로 슬프다
- 산막
저녁 그림자가 길게 늘어뜨려지는 시간 이윽고 부석사에 닿는다. 주차장에서도 주차료 받고, 산문 입구에서도 입장료를 받는다. 절 입구까지 흙길은 간 곳 없고 아스콘 포장이 붉다.좌판 벌려놓고 사과 팔던 아낙네들 주차장 뒤 쪽에 숨어 있다. 정화기간. 오시는 관광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겠다고? 하이힐 굽이 망가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봉사차원에서 포장을 했다고?
저녁 산사는 조용하다. 은행잎이 한껏 노랗게 물들고 도솔천 오르듯 층계를 밟고 올라가는 쏠쏠한 재미. 安養은 극락의 의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바라보는 소백산의 저녁 노을을 바라보는데 범종은 또 몇 번을 그윽한 울음을 들려주는가. 무량수전도 좋고 의상대사의 전설, 浮石도 좋지만 늦가을의 은행나무와 범종 소리와 저녁노을 이것이야말로 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휴지부가 아닌가.
뒷글
* 풍기에서 죽령을 넘어 구 단양 못 미쳐 표지판을 좌회전하여 4-5킬로를 달리면 대중온천탕이 있다.
* 모전석탑을 알리는 표지판은 놓치기 쉽기 때문에 유의하여야 한다.(모전 석탑은 이 밖에도 몇 기 더 있다)
* 서석지는 모전석탑에서 영양쪽으로 가다가 표지판을 따라가면 된다.서석지는 조선시대의 독특한 정원 양식
을 살펴볼 수 있는 전통가옥 속의 연못 이름이다.
* 31 번 국도는 천천히 삶을 음미하면서 찾아가는 길이다. 늦가을 정취에 취하고 싶을 때 한 번 가볼 한 길이다.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청간정의 적송 / p r a h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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