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으로 바닥으로
장순금
바다 속 깊은 뻘에 발을 묻었다 진흙 바닥에 눈도 귀도
묻었다
흐릿한 수면 아래 지느러미 너울너울 흘러가고, 물속
으로 내려온 하늘은 별이 뜨지 않았다
허공도 내려와 바닥에 납작, 몸 붙이고 지상의 모든 주
파수는 숫자를 잃었다
나와 두절된 나는
고동껍질 속에 시간을 닫고 파묻혔다 고동 속에 나를
버렸다
문득 덮친 해일에 망망대해 넘치는 파도
속,
물방울 하나로 되살아날 때까지
바닥에 내려간 나를 잊었다
극과 극은 한통속이다
장순금
악마의 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꽃을 보았다
꽃이 악마고 악마가 꽃이라니,
검푸른 자주색 열매는 무서워 보였지만
꽃은 볼수록 매혹적이었다
악마의 꽃은
그 얼굴에 사랑이 깃들수록, 아름답게 피어날수록
하반신부터 가슴까지 서서히 얼음처럼 차가워진다고
한다
꽃이 뿜어내는 냉독에
독사도 무서워 피해 간다고 하니
뜨거운 사랑의 끝이 얼음이란 걸 이미 아는 듯,
신비스런 빛깔로 고요히 잎을 틔우는
저, 악마의 꽃잎이
문득 거울처럼 내 얼굴을 비추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1초, 아니 그보다도 짧은 순간......
꽃이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었다
차갑고 독한 줄은 정말 몰랐다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듯,
극과 극은 한통속이었다
덥석, 잡았던
장순금
단풍나무 둥치의 주름진 손아귀를 펴보니
몸통 잘려진 비명 자국이 갈피마다 고인, 그
터진 고랑이며 싯푸른 물이 보였다
지난날, 내민 손 덥석 잡았던
뜨건 손에 덴 단발마의 흉터, 덮을수록 덧나
화농 속에서 단풍이 익고 낙엽이 졌던, 그
손
맞댄 손바닥에 꽃물 터져 색이 날아다녔던,
길을 잡고도 수없이 넘어지고 돌부리에 채인 그,
출구를 잃는 소용돌이 끝자락이
오늘, 희미한 초서체로 안부를 묻는다
몸 깊이 허공을 짚어가던
손을 놓고 툭,
떨어진
여백 한 점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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