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과 소설의 진화
나호열
만약 21세기가 디지털의 시대이고 그에 기초한 멀티미디어 매체가 세계의 소통망을 빈틈없는 그물로 얽게 된다면, 그래서 만약 다른 매체들을 페기시키는 단계까지 나아간다면, 그것이 곧 문학의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문학이 문화 전체의 구조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재조정될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더욱 문학답게 정련될 것이며 그것만의 절대적인 기능을 갖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21세기 문학, 또는 식물성의 저항」에서 이인성은 시대적 변화에 죽음을 앞둔 무력한 '문학'과 그 '문학'의 생존을 갈망하는 열정을 동시에 표출하고 있다. 이 글에는 '언어의, 언어에 의한, 언어를 위한'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는 인간이 스스로 언어를 유폐시키고 사멸시키지 않는 한 문학은 결코 자신의 죽음을 선고하지 않을 것이며 문학의 영원한 모태가 언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계승되어온 '작가의식'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맞서는 창조적 소설 쓰기로 주목받는 작가로는 이인성 이외에도 성석제를 들 수 있다. 기존의 소설 양식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소설의 지평을 넘어서려는 실험정신과 분투는 값진 것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우찬제가 「21세기 저자와 열린 텍스트」에서 "이인성이 글쓰기 욕망을 <쓰는> 텍스트 안에서 강렬하게 드러내고 그 욕망의 글쓰기과정을 향유하는 작가라면, 성석제는 이야기하기 혹은 말하기 욕망을 드러내면서 그 욕망의 자장 안에서 독자와 역동적이면서도 즐거운 소통을 향유하는 저자이다"(『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1999년 54쪽)라고 말한 것은 한국소설의 향방을 가늠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열린 텍스트'는 당연히 '닫힌 텍스트'의 반대편에 서 있으며 하나의 텍스트가 하나의 의미망으로 결집되고, 저자가 일방적으로 독자를 향해서 교화하고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새롭고 다양한 텍스트의 의미망을 헤쳐나가고 만들어가는 도전과 참여의 영역이 될 때 '열린 텍스트' 이다.
외면적으로 본다면 이인성이나 성석제는 한국 소설의 영역에서 매우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의식을 가진 아방가르드로 인식할 수도 있겠으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작업이 그들만의 특이한 성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대응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연성과 불확정성, 개연성, 다가치성 등은 기존의 철학이나 과학의 토대에서는 해명할 수 없는 현대사회의 늪이며, 거기다가 '디지털의 혁명'은 현존하는 세계에 '사이버 스페이스' 라는 공간을 하나 더 얹혀 놓은 꼴이 되었다. 현실과 사이버 공간의 구분은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매체에 의해서 무의미해지고 있다. 주체와 객체라는 이성적 사유는 점차로 그 권위를 상실해 가고 있다. 그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부르든 아니면 후기구조주의라 부르든 간에 우리 앞에 도래한 '디지털의 혁명' 은 더 이상 우리가 거부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이퍼 텍스트'는 '열린 텍스트'의 의식을 좀 더 기술 技術에 의존해서 텍스트의 쌍방향성을 강화한 문학 형태로 볼 수 있다. '하이퍼 텍스트'는 완고했던 예술의 각 영역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예술의 순수 혈통의 가계를 무력화시킨다. 소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미술, 음악 등은 얼마든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면서도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경계는 무의미해졌다.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은 이성의 철옹성이 될 수 없다.
왜 이렇게 살아요? 어느 날 그녀가 물어 왔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어서 나는 조금 당황하여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화면 속에 고정돼 있었고 손은 열심히 키보드 위에서 놀고 있었다. 이렇게 사는게 어떤 건데요? 나 역시 같은 자세로 되물었다. 화면 속의 내가 그녀의 턱을 갈겼다. 그녀의 에너지가 줄어들었다. 그녀는 두 걸음쯤 물러나 앞차기와 돌려차기로 반격을 가해 왔다.... 화면 속의 나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럼 진영씨는 어떻게 살 건데요? 저요? 저라면 이 컴퓨터 같은 거 다 팔아서 여행을 갈 거예요. 사무실 보증금도 빼구요. 그 때 화면 속의 나는 주먹으로 그녀의 얼굴을 난타하고 있었다. ..... 나는 오른 발로 그녀의 가슴을 지른 후에 그녀를 업어서 멀리 던졌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서는 일어나지 못했다. 게임은 끝났다. 우리는 다시 서로의 일에 열중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종종 그녀와 함께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 오르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혼자 떠나는 모습은 그려지질 않았다.
위의 글은 김영하의 「바람이 분다」라는 소설의 한 부분이다. 그녀와 나는 한 공간 안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대화를 나누면서 컴퓨터 게임이란 가상공간에서는 서로 주먹질하고 가상살인을 서슴치 않는다. 그것은 단지 게임일 뿐이다. 머리 속에서의 상상은 치외법권의 영역이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상상의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디지털의 혁명'은 충실히 재현해 주었다. 컴퓨터그래픽을 비롯한 디지털의 기술은 머리 속에는 있으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들을 수 없었던 세계를 눈앞에 알라딘의 램프로 생생하게 재현해 주었다. 이 생생한 재현이 주는 기쁨은 수많은 '나'를 복제하고 탄생시키므로써 '우리'가 아닌 '나' - 개별적 특성이 제거된 복제된 삶으로서의-를 증식시킨다. 이인성의 소설 「그를 찾아가는 우리의 소설 기행」속의 화자가 "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소설의 작가 자신인 척하는 이야기꾼일수도 있겠고, 작가로부터 비롯되어 그와 겹쳐져 있으면서도 다른 어떤 나들 중의 하나일수도 있겠고, 당신으로서의 나일 수도 있겠고, 당신과 함께 찾아가고자 하는 '그' 인 나일 수도 있겠다." 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은 디지털시대를 명상하는 작가의 고독한 내면일 것이다.
위에 언급한 소설가 중 김영하는 송경아와 더불어 인터넷 소설로부터 시작해서 본격문학의 대열에 합류한 경우이다. 본격문학이라는 용어가 자칫 인터넷 소설, 또는 통신 소설을 폄하한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기존의 문학이나 소설에 대한 정의, 역할, 언어에 대한 자각 등의 면에서 현격한 관점의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인터넷 또는 통신 소설을 기존의 양식과 구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인터넷을 매개로 하는 문학의 영역에서 소설은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대략 10여 년 전부터 인터넷의 확산과 컴퓨터의 보급으로 불붙기 시작한 인터넷문학은 시나 수필과 같은 장르보다 소설의 측면에서 괄목할만한 양적 확장을 불러왔다. 이제 갓 스무살이 넘은 '귀여니'(필명)의 인터넷 소설 「그 놈은 멋있었다」는 출판계의 전반적인 침체와 불황에도 불구하고 수십 만 부가 팔려나가는 성과를 이루었고 그의 펜 카페에 백만 명에 육박하는 동호인이 접속하였다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 왔던 본격소설의 영역 이외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증명해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귀여니'를 비롯한 인터넷 매체에 발표되는 작품들은 우리가 갖고 있던 소설에 대한 정의와 가치 기준으로는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 작품들의 수요자들은 대부분 10대와 20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 현재의 10대, 20대가 가지고 있는 문학 전반에 대한 이해와 예술적 안목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우리나라 소설의 주류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성급한 판단일 것이다. 인터넷 소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기존의 소설 양식이 가지고 있는 구성의 치밀성과 예술성이 떨어지고, 언어에 대한 투철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어 민족어의 상실과 그로 인한 민족의 정체성이 위협받는다는 지적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벌컥!!!!!!!!!!ㅇ-ㅇ......ㅇ_ㅇ......... “아..안뇽..꼬마야.." (중략) "응^-^말해봐. 너도 멍구네 번호 갈차주까?^ㅇ^멍구^ㅇ^멍구^ㅇ^" (중략) "아뇨아뇨 >_< 정말 괜찮아요 >_< 정말이에요 >_<" "고개좀 들어보라니까요!?" "아니라니까요! 왜그르세요 ㅜ^ㅜ" 개미떼 중 하나와 내가 실갱이를 하는 사이..버스는 우리집 앞에 다다라 있 었다 .-_- 비러머글 개미놈-_-아. >_< 내가 지금 무슨 말을 >_< 이런 >_< 이런 >_<
위의 인용문은 귀여니의 「늑대의 유혹」중의 일부분이다. 맞춤법을 무시한 채 소리나는 대로 표기한다든가, 표기부호의 남발, 의미없이 축약되거나 변용된 부호의 생산, 거의 제한없이 사용되고 있는 이모티콘은 우려를 표시하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인터넷이 추구하는 속도와 쌍방성에 부응하기 위한 위와 같은 표기 현상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컴퓨터와 인터넷을 접한 지금의 10대, 20대들에게는 저항감이나 혐오감을 주지 못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히려 우리의 어문교육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정서 순화에 치중하지 않고 점수 위주, 경쟁위주의 교육을 조장하고 임무를 방기한 기성세대의 책임으로 마땅히 돌려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10대와 20대가 지니고 있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양식과 감각은 사회를 구성하고 문화의 양상을 결정지운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점이다. 인터넷소설이 보여주는 쌍방향성과 현실감, 그리고 판타지와 콤플렉스의 해소 능력들은 오늘날의 우리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시사해 준다. 퇴마록 (1998년/안성기, 신현준, 추상미), 엽기적인 그녀 (2001년/차태현,전지현), 동갑내기 과외하기 (2002년/김하늘,권상우), 내사랑 싸가지 (2003년/하지원,김재원), 그 놈은 멋있었다 (2004년/송승헌,정다빈),늑대의유혹(2004년/강동원,조한선,이청아), 옥탑방 고양이 (MBC/2003년/김래원,정다빈) 등은 인터넷 소설이 영상 매체와 결합하여 젊은 대중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던 작품들이다. 물론 위에 열거한 작품들이 예술성과 문화적 가치를 획득하고 대중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최근 들어 '문화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그 콘텐츠들이 하나의 산업으로서 인식되면서 자연스럽게 상업성이 가미되기 시작했다. 디지털의 혁신적 발전은 각 예술 장르의 경계를 급속하게 무너뜨리고 하이퍼텍스트는 작가의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문학, 특히 소설에서의 이야기들은 작가가 지니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기보다는 독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간섭받고, 수정되며, 변용되는 자료로 변화한다. 이른바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디지털 기술을 매체 환경 또는 표현 수단으로 수용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다. 독자가 골방에서 홀로 활자매체인 책을 통해 지식과 감동을 전달받는 아날로그 방식을 넘어 영화, 드라마, 연극, 게임 등 멀티미디어 매체를 집단적으로 향유하는 영역까지 이야기의 형식과 내용을 확장하는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세게일보 2004년 12월 24일자 참조)
김탁환은 오늘날 우리의 소설, 소설가가 처한 상황을 소설작품과 평론으로서 분석하면서 주된 흐름을 잡아내고 있는 작가중의 한 명이다. 2004년 9월 24일 동국대에서 열린 <문학과 문화산업>이란 주제의 심포지엄에서 그가 발표한 '서사문학과 문화산업'에 관한 발제문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문학계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고 소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소설이 아닌 다른 이야기 갈래들이 본격적으로 문화산업의 한 축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영상매체의 위력은 가공할 정도였지요. 오죽하면 스콧 니어링 같은 학자는 텔레비전의 등장과 함께 미국인은 더 이상 보편적인 역사적 문제와 인간에 대해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고 개탄하기까지 했습니다. 최근 10년 안에 급속도로 발전한 인터넷과 게임 시장은 또한 새로운 이야기 탄생의 근거지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담아내는 새로운 매체나 틀이 등장하였을 때, 미적 형식을 갖춘 이야기에 독점적 권한을 행사하던 소설가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소위 ‘문학성(혹은 예술성)이 없다’는 논리로 그들을 몰아붙였지요. 간혹 ‘문학성’이 있는 한두 작품을 언급하며 칭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아름다움’이나 ‘예술적 완성도’로 고정시킨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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