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교약졸大巧若拙의 발현發現을 기다리며
나호열
새해라고 해서 무엇이 다를 것인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이치를 얻어 어제의 허물을 오늘의 경계로 삼고 오늘의 발걸음을 내일의 길을 향하게 할 뿐이 아닌가!
무한히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유한한 생명은 얼마나 덧없으며,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순환 속에 그저 높이 쌓아 올리는 울타리는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 끝에 튀어나온 화두가 대교약졸이다.
대교약졸 大巧若拙은 정말 큰 기교는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졸렬해 보인다는 말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별 것 아닌 일에 과다한 치장을 하거나 졸렬함을 감추기 위해 과장된 기교를 부리는 세태를 꼬집어 말하는 것쯤으로 되짚어 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언제나 문학의 진실성을 묻는다. 진실이 담겨져 있지 않은, 이를테면 작가의 체험이 묻어 있지 않은 것을 명작으로 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곧 체험이라는 공식처럼 허무한 것은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진실'이 함의하고 있는 바를 재정의 할 필요를 느낀다. 삶에는 진실이 필요하고 부단히 진실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건의 연속선상에 우리의 존재를 놓는다. 밥 먹는 일, 전화 거는 일, 사람을 기다리는 일 등등의 사건은 사실이지 삶의 진실은 아니다. 진실이란 그러한 일상사의 의미를 묻는 일이며, 그 의미의 불변함을 의식하는 일이다. 문학은 '진실' 그 자체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찾아가는 태도나 방법을 찾는데 의의를 갖는다. 우리는 많은 작품에서 '진실'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일상사에서 우러나오는 건강한 체험과 조우한다. 마치 현미경으로 작은 미생물을 관찰하듯이 감성의 잔 물결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발표되는 작품을 통해서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리는 늘 현미경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망원경으로 우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감추고 때로는 못 본 체 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이치이다. 대교약졸이란 '큰 것 속에 작은 것을 감추는 일' 이다. 이 말이 너무 허황하게 생각된다면 조금 더 범위를 좁혀서 말해 보기로 하자. 앞 서 잠깐 언급했던 일상적인 체험은 분명 우리가 행하고 있는 문학 행위의 기반이 되는 것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체험이 진술이나 단순한 재현에 한정되고 만다면 '문학'은 '문학의 진실'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된다. 다른 말로 한다면 체험은 새로운 세계나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상상력의 도화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문학 행위를 한정한다면 우리는 동서고금의 성인들의 성경 - 여기서의 성경은 기독교의 바이블 뿐만 아니라 불경, 논어, 맹자 등의 유학의 경전도 포함된다-을 읽고 공부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오히려 문학 행위는 체험으로부터 길어 올려져 천상을 향해가는 상상력의 날개를 얻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게 될지도 모른다. 대교약졸의 정신과 연관지워 본다면 민족통일의 주제, 디지털 시대의 자아해체의 현상, 자연환경과 인간 등 좀 더 스케일이 큰 거대 담론에 기대어 보자는 권유로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의 본 뜻은 유행처럼 지나가는 일회적인 시류가 아니라 '진실'에 다가서는 방법론상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자는 데 있는 것이다.
문학의 일차적인 과정은 자신의 체험을 털어내고 드러내는데 있다. 그 털어내고 드러냄에 있어서의 장치가 직설적이냐 우회적이냐에 따라서 예술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임을 강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돌아가던 개미가 구멍 찾기 어렵겠고
돌아오던 새는 둥지 찾기 쉽겠구나
복도에 가득해도 스님네는 싫어 않고
하나로도 속객은 많다고 싫어하네
위의 시는 당나라 때 시인인 鄭谷이 낙엽을 노래한 시라고 한다. 낙엽이란 단어를 넣지 않고 가을날의 쓸쓸한 풍경을 읊은 것이다. 스님은 낙엽 쌓이는 것을 마다 않는데, 속인은 왜 낙엽 한 잎에도 마음을 산란케 하는가? 이 글을 해석한 정민의 부연 설명을 더 들어보자
흔히 시인이 시를 짓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 가운데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과정이라고 한다. 시인이 이 백 자의 할 말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스무 자로 줄여 말할 것인가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백팔십 자를 걷어낼 것인가로 고민한다는 말이다. 반대로, 독자는 시인이 하고 싶었지만 절제하고 걷어낸 말, 즉 행간에 감추어 둔 뜻을 어떻데 충분히 이해하고 깨닫는냐의 문제가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위의 글의 뜻은 단지 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수필이나 기타 장르에서도 충분히 음미해도 좋을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아직도 상상력이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하다면 다음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어떤 대상을) 그리지 않고 그릴 수 있는가? - 달을 그리지 않고 달을 그릴 수 있는가?
(어떤 관념을) 말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가? -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
올해는 '닭의 해' 이다. 아침 밝은 햇살이 찾아오기 전에 닭은 새벽을 깨치는 함성을 토한다. 모든 분들이 횃대에 높이 올라 새벽을 알리는 닭의 기개로 이 시대의 새벽을 알리는 존재로 거듭 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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