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있어서의 언어 2
구 상
지난 장에서 한 개의 낱말은 한 사물을 가리키는 단순한 부호에 지나않지만, 그러나 그 낱말이 다른 낱말들과 배합되었을 때 그 낱말이 지니던 고정되었던 의미의 영역을 벗어나 그 낱말이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던 의미, 즉 새로운 현상의 세계를 전개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말은 그 말하는 태도랄까 솜씨랄까, 즉 말씨에 의해서 또한 천태만양의 의미를 달리한다. 가령 말의 배열만 해도 〈나는 이것을 너에게 준다〉를〈이것을 나는 너에게 준다〉또는〈너에게 나는 이것을 준다〉로 그 순서를 바꾸면 그 말의 강조하는 점이 달라진다. 즉,〈나는〉이 먼저일 때는 내가 강조되고, 〈이것을〉이 먼저일 때는 그 물건이, 또〈너에게〉가 먼저때는 너라는 상대방이 강조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간다〉는 말도 간다 나는 이라고 어순(語順)을 바꿔놓으면 퍽 그 말의 뉘앙스가 달라진다. 더구나 이 말을 하는 사람 자체나 그 태도 또는 그 사고나 감정에 따라 그 의미 내용이 전혀 딴판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일상적 말씨도 그러하거늘 더구나 시에 있어서는 저러한 일상적 말의 평면적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가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실은 이 점이 우리가 시를 쓰려고 들 때 그렇듯이 아무렇게나 잘 지껄이던 말이 막히고 안 나오는 까닭이기도 하다. 즉, 시의 말과 일상어의 구별은 그 사용하는 말의 다름과 함께 또한 꾸며 전 말(수식어)과 꾸며지지 않은 말로서의 구별이 아니라 말의 기능을 깊이 인식한 그 사용법, 즉 말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폴 발레리는 일상어나 산문을〈걸음[步行]에다〉, 시를〈춤[舞踊]〉에다 비교하여 시에 있어서의 말씨의 특성을 아주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일상어나 산문에 비유된〈걸음〉이란 그 어떤 하나의 대상에 향하여 진행되는 행위로서 그 목적이 그 대상에 도달하는 데 있다. 이처럼 일상어나 산문은 오직 그 의미를 전달한다는 지시기능 만이 중시되기 때문에, 그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말은 그 이루어진 행위 속에 흡수되고 마는 것이다. 가령〈이리 좀 오시오〉하는 일상어는 그 말로써 상대방이 자기에게 다가오면 그 이루어진 행위와 함께 사라지고 만다. 즉, 결과가 원인을, 목적이 수단을 흡수하고 만다고나 할까, 흔히들〈모로 가도 서울만가면 된다〉는 말처럼 그 말에 따르는 사람이 어떤 걸음새를 보여주었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시의 말에 비유된〈춤〉은 그곳에서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그 행위의 모습 자체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춤의 궁극적 목적은 그 행위 자체에 있기 때문에 그 행위의 자태, 즉 맵시가 바로 춤의 생명인 것이다.
저처럼 일상어나 산문은 말이 그 의사전달의 역할을 다하면 그 순간 소멸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말이 되살아나지 않을 때 자기의 말이 상대방에게 잘 이해된 것이 된다. 그러나 춤과 같은 시의 말은 행위의 자태와 같은 말씨에 궁극적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씨가 훌륭할수록 소멸되지도 사멸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훌륭한 말은 다시 되살려져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렇듯 되풀이되는 본질이 시의 말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예술에 있어서의 본질이요, 원리인 것이다. 즉, 우리가 명시라고 불리는 시를 애송한다든가, 어떤 명화를 걸어놓고 감상한다든가, 어떤 명곡을 되풀이해 듣는 것은 모두 이런 까닭인 것이다. 이제 저러한 말의〈춤〉상태를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김소월(金素月,1902∼34)의 「초혼(招
魂)」을 통해 새삼 음미해보기로 하자.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자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우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그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우리는 이 시를 그 말의 조직에 대한 아무런 구체적 지식이 없이도〈걸음〉같은 일상어나 산문과는 전혀 다른, 소위 말의〈춤〉을 감득할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이 시의 주제와 제목이 되어 있는 〈초혼〉은 죽은 사람의 나간 혼을 다시 불러들임을 뜻하는데, 우리 민간의 전래풍속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누가 지붕에 올라가거나 또는 마당에서 북쪽을 향해 「아무 동네 아무개 복(復ㅡ다시 돌아오라는 뜻).」하고 세 번 외쳐서 나간 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의식을 치르고서 발상(發喪)에 나아간다. 어쨌거나 소월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死別)의 통한을 이렇듯 말의 새로운 배합과 배열로써 황홀할 정도의 시적 표현에 나아간 것이다.
여기서 이제 하나 프랑스의 자크 프레베르의 「아침식사」라는 시의 번역 두 가지를 대조해 보임으로써 그 말의 용법의 산문적인 것과 시적인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A번역
그는 부었다 커피를
찻잔에
그는 부었다 밀크를
커피잔에
그는 넣었다 설탕을
밀크 탄 커피에
작은 스푼으로
그는 저었다
그는 마셨다 밀크 탄 커피를
그리고 놓았다 잔을
내게 아무 말 없이
그는 불을 붙였다
담배에다
그는 만들었다 동그라미를
연기로
그는 털었다 재를
재떨이에다
내게 아무 말 없이
날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는 일어났다
그는 썼다
모자를 머리에
그는 입었다
레인코트를
비가 내리고 있었기에
그리곤 그는 떠났다
빗속으로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보지도 않고
그래서 손에
머리를 파묻고서
나는 울었다.
B번역
찻잔에
커피를 따르고
커피잔에
밀크를 치고
밀크를 친 커피잔에
설탕을 타고
조그만 숟갈로
그는 저어
마셨다
다음에 잔을 내려놓고
내게는 아무 말 없이
담배 한 대
붙여 물었더니
그 연기로
동그라미를 그려 올리고
재떨이에
재를 떨고
내게는 아무 말 없이
쳐다보지도 않고
그는 일어났다
그는 머리에
모자를 얹고
또 비옷을 걸쳤다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는 나섰다
빗속으로
한마디 말도 없이
쳐다보지도 않고
그제야 나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버렸다.
현대인의 단독자적(單獨者的)고절(孤絶)과 소외감을 나타낸 이 시의 A번역은 어느 불문학자의 것이요, B번역은 불어를 해득하는 어느 시인의 것이다. 나는 불어에 아주 까막눈이라 어떤 번역이 더 원시에 충실한지조차 모르지만 오직 어떤 번역이 더 시적이냐고 할 때 나뿐 아니라 누구나가 B번역을 쳐들 것이라고 여긴다. 하기는 서양어의 어법으로 미루어 A번역이 원시의 어순을 더 그대로 옮겼다고 보지만 역시 우리의 말, 특히나 시의 말씨로서는 부적당하다고 하겠다. 물론 이 시는 불어가 지니는 독특한 리듬을 갖추었을 것으로 여겨져 B번역 역시 그 리듬마저 온전히 살렸다고는 볼 수가 없는데 실제 시의 번역의 난점은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야 여하간 이제 시가 지니는 말의 배합과 배열에 의한 무용적 요소를 발휘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그 하나는 말의 생략과 압축이라 하겠고, 또 하나는 지난번에 언급한 바 있는 말의 울림 즉 리듬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라 하겠다. 먼저 말의 압축이라는 면에서 살필 때 시가 가장 짧은 형태의 문학임은 누구나가 다 아는 바로서 산문이 설명적이고 서술적인 것과 반대로 시는 생략과 압축이 행해지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일상어나 산문은 그 목적물에 도달하려는〈걸음〉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설명적이 되지만, 시의 경우는 그 말의 압축과 생략으로 이뤄지는 암시나 상징이 바로 그 〈춤〉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이렇듯 시에 있어서 말이 암시적 또는 상징적이 되기 위하여는 그 뜻이 넓고 깊을수록 이상적이라 하겠다. 그래서 미국의 선구적인 이미지스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는〈결국 위대한 시란 최대한의 의미를 지닌 언어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곧 여러 가지 말이 분담할 의미를 하나의 말이 전담하는 최대한의 암시력을 지닌 언어를 뜻함이요, 또한 이것은 여러 가지 말이 생략되고 극한적으로 압축된 말을 뜻한다. 그러면 저렇듯 깊고 넓은 의미의 세계를 지닌 말은 어떻게 해서 얻어지느냐 하면, 그것은 역시 지난번에 말했듯 언어는 오직 전달의 부호나 기호가 아니고 그것은 존재에 대한 인식의 유일한 연모로서 어떤 사물에 대한 깊고 넓은 의미를 인식하는 데서 거기에 비례하는 응축(凝縮)
된 말을 획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음, 울림 즉 말의 리듬은 이 역시 지난번 말했다시피 언어의 본질적 기능 중의 하나인 정서적 기능의 주요 요소로서 한쪽의 의미적 기능은 어느 경우라도 확연한 하나의 지시적 세계를 지녀서 변화하지 않지만, 이 청각적 세계인 울림은 그때그때 우리의 상황이나 정상(情狀)에 따라서 천태만양의 변화를 나타낸다. 그래서 시에 있어서의 감정(감정 또는 감성)의 영역은 바로 이 리듬의 기능으로서 시가 독자를 감동시키는 으뜸가는 요소인 것이다. 가령〈안녕하십니까〉라는 가장 평범한 말도 그 몸짓이나 표정에 따라 그 말이 본디 지니는 뜻과는 다르게 되지만, 그 중에도 그 말소리의 강약고저나 속도·음색 등에 따라 상대방에게 복잡미묘한 반응을 볼러일으킨다.
그런데 이러한 말의 울림을 조율(調律)하는 시의 리듬을 단순한 외형적 음악성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이즈막에 와서도 그렇지만 근세에 이르기까지 시에 대한 일반적 관념은 산문과 상대적인 운문, 즉 일정한 리듬을 지니고 있는 글로 여겼다. 그래서 옛 중국이나 서양의 정형시에 있는 평측률이나 압운율 또는 우리 시조와 같은 자수율에 의한 박자 본위의 음악성에다 저러한 시의 리듬을 찾거나, 아니면 자유시란 그것을 좀 변형시킨 것으로 여기거나, 또는 이런 말이 리듬에서 벗어나서 산문화한 것쯤으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가 오해로서 엄밀히 말하면 말이란 본래가 운율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라 하겠으니, 왜냐하면 말이 곧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의 발상 자체가 본래적으로 운율을 지닌다고 하겠다.
오직 자유시가 지난날의 시 모양으로 형식적인 외재율(外在律)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말이 지니는 청각적 요소, 한 걸음 나아가서는 현대시가 즐겨 주장하는 회화적 요소 속에 깃든 내재율을 지니고 있고 또 지녀야 한다고 말하겠다.
즉, 심상(心象)이란 것도 말로 만들고 그 말은 참된 음악성(울림)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고나 하겠으며, 나아가서는 시로 성립되는 표현요소 모두가 리듬 속에 포괄되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래서 정형시에 있어서는 어떤 기성의 틀에 맞추는 것이 시의 리듬이지만, 이제 자유시는 각개 시인 스스로가 시 한 편 한 편마다 보이지 않는 리듬의 틀을 만들어 그 시상(詩想)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때문에 시(특히 자유시)를 창조의 창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상 시에 있어서의 언어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거듭 확실하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시의 말이란 결코 말의 수효를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또 소위 미사여구를 많이 익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우리가 현실생활에서 쓰는 그 평이한 말의 의미적 기능과 정서적 기능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솜씨 있게 쓰느냐 하는 데 그 열쇠가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출처 / 세상과 세상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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