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있어서의 언어. 1
구 상
나도 어디선가 주워 읽은 이야기인데, 저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드가(H.G.E. Degas, 1834∼1917)가 친구인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S. Mallarme,1842∼98)를 만나서,「나는 간밤에 아주 기막힌 아이디어(생각)가 떠올라 그것을 시로 쓰려고 했더니 안 되더군.」하고 고백을 하니 말라르메는 싱긋 웃으면서,「그건 그럴 수밖에, 시는 붓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말로써 쓰는 것이거든.」하더란다.
이 우스개에 가까운 일화가 아니라도 시가 언어의 예술인 것은 누구나가 다 잘 아는 바이다. 물론 언어의 예술은 비단 시만이 아니라 소설·희곡·평론·수필·시나리오 등 여러 가지 장르가 있으나, 그런 산문과시의 상이점은 뒤로 미루고 우선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시라는 예술의 소재인 말은 음악의 소재인 소리나 회화의 소재인 선이나 색채와 그 기능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즉, 음악이나 회화의 소재인 소리나 색채는 그 자체로선 아무런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시의 소재인 말은 그 낱말 하나하나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은 이것을 더 설명할 것도 없지만 이즈막 하도 시에 있어서 표현주의자들이〈무의미의 시〉어쩌구들 하니까 거기에 생사람들까지 현혹되어 언어에 대한 근본적 인식이 흐려질까 봐 하는 이야기인데, 우리 인간의 말의발생 근원을 떠올릴 때 만일 사람이 맨 처음 홀로 이 지상에 출현했다면 그런 경우 말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요, 역시 말이란 것은 두 사람 이
상의 공동생활이나 집단생활이 시작되어서야 비로소 출현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하기는 그렇듯 말이 처음에 소리가 되었을 때는 마치 갓난아기에게서 듣는 것 같은 외침이나 웅얼거림처럼 단순한 것이었겠지만, 그것이 말다운 말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일정한 공통적 체계를 이룬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서야 비로소 상호간의 의사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회화나 음악은 의미가 없는 소재를 가지고 예술이라는 의미의 세계를 만들어내지만 시는 그것을 형성하는 소재 하나하나, 즉 낱말 하나하나가 소우주를 이루고 있다는 데 바로 시의 비밀이나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나날의 생활 속에서 자기의 의사, 즉 의지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하여 거의 무의식적이며 습관적으로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렇게 생활의 연모롤 쓰이는 말의 의미란 한 사물에 공동적으로 부여한 부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오히려 이처럼 단순화되어 있는 것이 생활의 도구로는 편리하다고도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말 자체에 저와는 달리 비실용적이요, 복합적이요, 신비하다고나 말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기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에 있어서의 말인 것이다. 바로 이 소식을 폴 발레리는 〈시인의 작업이란 일상적 실용의 제품(말)을 가지고 예외적이고 비실용적인 시라는 특수한 하나의 세계, 사물의 한 질서, 관계의 한 체계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흔히 일반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당하는 곤혹이나 당황 또는 빠지는 함정이나 과오는 저러한 일상적 말에 대한 습관적인 사용법을 가지고 시라는 특수한 세계를 다루려고 드는 데 실패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나 시에 쓰여진 말이나 그 말 자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그 말이 내포하는 기능의 영역에서는그야말로 하늘과 땅과 같은 큰 격차를 가져온다는 것을 시의 초심자들은 먼저 똑똑히 알아두어야 한다.
그러면 말의 또 하나의 기능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 개의 낱말은 한 사물을 가리키는 부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낱말이 또 다른 낱말들과 연관을 가졌을 때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우리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깨닫는다. 가령 우리는 눈[雪]이라는 낱말이 줄기가 단단한 식물의 이름인 줄 알고 있지만, 만약 이 낱말에다 다른 낱말이 보태져서 〈눈 같은 여인〉했을 때 우리는〈흰 얼굴을 한 순결한 여인네〉를 떠올릴 것이요, 나무라는 낱말도 가령〈나무에 올려놓고 흔드는 격〉하고 말이 이어졌을 때는 전혀 나무와는 얼토당토않게〈좋은 낯으로 남을 꾀어 위험한 곳이나 불행한 처지에 몰아넣는 것과 같다〉는 뜻이 된다.
이렇듯 그 어떤 낱말은 딴 말과의 접촉에서 그 말이 나타내던 사물의 각가지 경험을 불러일으켜서 그 낱말이 지니던 고정되고 단순화되었던 영역을 벗어나 그 낱말이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던 의미, 즉 새로운 현상의 세계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시의 소재인 언어는 그 낱말 하나하나가 소우주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까닭인 것이다.
이제 여기서 실제 〈눈〉과〈나무〉라는 낱말을 가지고 시인들은 그 어떤 특수한 세계를 창조해놓았는지 음미해보자. 먼저 프랑스의 전원시 「시몬느」로 유명한 구르몽(Remy de Gourmont, 1858∼1915)의,
눈
시몬느, 눈은 네 목처럼 희다.
시몬느, 눈은 네 무릎처럼 희다.
시몬느, 네 손은 눈처럼 차다.
시몬느, 네 마음은 눈처럼 차다.
눈을 녹이는 데 불의 키스,
네 마음을 녹이는 데는 이별의 키스.
눈은 슬프다 소나무 가지 위에,
네 이마는 슬프다 네 밤색 머리칼 아래.
시몬느, 네 동생 눈이 정원에 잠들어 있다.
시몬느, 너는 나의 눈, 그리고 나의 연인.
다음은 제 1차대전 때 전사한 기자 출신의 미국시인으로, 그리 유명하지는 않으나 이 한 편의 시가 널리 애송되는 킬머(Joyce Kilmer, 1886∼1918)의,
나 무
나는 나무처럼 사랑스런 시는
결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단물 흐르는 대지의 젖가슴에
주린 입술을 꼭 대고 있는 나무
종일토록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는 나무
여름날이면 자신의 머리카락 속에
방울새의 보금자리를 틀게 하는 나무
가슴에 쌓이는 눈이거나
내리는 비와도 정답게 지내는 나무
시는 나같은 바보가 쓰지만
나무는 오직 하느님만이 만드신다.
저렇듯 위의 시들에서 보다시피 한 사물의 부호에 불과하였던 〈눈〉이나〈나무〉라는 낱말이 그 말의 앞뒤에 결합되고 배합된 말로써 천태만양, 또한 무진장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좀더 풀이 하면 〈시몬느, 너는 나의 눈, 그리고 나의 연인〉이라고 했을 〈눈〉은 바로〈시몬느라는 연인〉의 대명사가 되었고〈나는 나무처럼 사랑스런 시는 결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고 했을 때〈나무〉는 마치〈시〉와 동질성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 이렇듯 말이란 신비하고 무한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본디 말은 그것이 일상적인 말이건 시의 말이건 반드시 한 사물을 지시하는 의미적 기능과 그 말이 발하는 음향의 청각적 기능을 함께 지닌다. 그리고 그 중 의미적 기능은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속에서도 그 한 가지의 지시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나 청각적 기능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또는 그것을 말하고 듣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서 천만 가지 변화를 보인다.
가령 우리가 쓰는〈안녕하십니까〉라는 말 하나만 하더라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몸짓이나 표정을 비롯해 그 말이 지니는 음향의 강약이나 고저 ·장단·음색 등 복잡미묘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말의 청각적 기능을 영국의 탁월한 문예비평가 I.A.리처즈(Ivor Armstrong Richards, 1893∼1979)는 말의 정서적 기능이라고 부르고〈말이 우리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정서적 기능으로서 거기에 말이 우리들의 역사를 움직이는 불가사의한 작용이 감추어져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래서 만일 훌륭한 시인이 되려면 말의 표현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다시 리처즈의 말을 빌면〈의미 속의 의미〉, 즉 말의 정서적 기능을 체득하는 것이 절대적 조건이라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이 언어의 정서적 기능을 시에 있어 한갓 리듬적인 음악성만으로 오해하여서 이미지 중심의 현대시의 조형성(造形性)에는 그것이 결여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큰 착각으로서 시 속에 담긴 어떠한 이미지도 단지 박자 본위의 음악성이 아닐 뿐이지 말이 지니는 내질적인 음악성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느다고 하겠다
그래서 훌륭한 시적 이미지는 인간이 지니는 모든 감각적 기능을 구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음악성에 관한 것은 뒤에 다시 언급하겠기에 이만 줄이고 다음은 말의 기능과 함께 우리 인간존재의 가장 기본인 생각, 즉 사고와 말, 즉 언어의 관계를 좀 살펴보도록 하자. 아직까지도 일반만이 아니라 우리 시단의 일부 통념 속에는 생각(느낌도 포함)과 말, 즉 사고와 표현을 별개의 것으로 알아 그들은 항용 시가 될 생각은 가득한데 말이 찾아지질 않아 못 쓴다고들 한다. 그러니까 자기의생각과 부합되는 말, 특히나 아름다운 말(즉, 수식어)을 고르기에 부심하며 시를 마치〈꾸며진 말〉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런 사람들은 그 생각이라는 것이 말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라 하겠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가령 어떤 사람이 달을 쳐다보고〈달이 밝다〉로 하였다가〈달이 맑다〉로 고쳤다면 이것은 표현, 즉 말의 변화만이 아니라 생각과 느낌의 변화인 것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기보다 달이라는 그 사물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말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금세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6)는〈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의 저서 『숲 속의 길』속에 나오는 사고에 대한 유명한 말인데〈우리들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선 존재와 만날 수도 없고 언어는 존재를 우리에게 내어주는 유일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설명하기를, 〈가령 우리가 숲 속을 가다가 샘을 만났다고 하면 그것이 샘이란 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샘이란 말로 그것을 인식한다. 또한 공중의 새를 보았을 때도 그 새의 존재를 포착하는 것은 새라는 언어로써, 물론 그때 새라는 말의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도 그 존재를 우리의 인식 속에 가만히 포착시키는 작용을 한 것은 언어다〉라고 갈파한다. 이렇듯 말이 없다면 생각이 없는 것이요, 말을 통한 인식이 없다면 존재는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말은 존재를 존재하게 한다고나 하겠다. 이런 소식은 저 근세철학의 시조라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있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요, 보다 우리 김춘수(金春洙)시인의 작품 「꽃」이 그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이 시에서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식의 대상으로 삼아서 말로 포착하는 것이요, 그것은 또한 그 시의 결론대로 그 사물에다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말은 저렇듯 존재를 만나게 하는가 하면 한걸음 더 나가 그 존재의 영역을 한정시키기도 한다. 즉, 그 말이 지니는 한도 내에서, 다시 말하면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의 깊이와 넓이에 따라 마치 존재는 등불의 강약에 비례하여 사물이 모습을 드러내듯 한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인식, 즉 생각의 깊이와 넓이는 바로 언어에 대한 넓이와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말의 숨은 기능을 생각할 때 시를 쓸 만한 생각은 많은데 말을 찾지 못한다는 얘기는 시를 쓸 만한 생각을 못해냈다는 얘기요, 일반이 바라는 소위 아름다운 말, 즉 수식어나 수사법은 이미 만들어지고 쓰여지고 낡아진 말들의 시체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죽은 말들을 이리저리 바꿔서 배열해보았자 그것이 창작인, 즉 비로소 만들어지는 시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시란 평범한 일상적인 말을 가지고 바로 그것으로 일상적 의식을 넘은 세계를 표출해내는 것으로, 여기에 시를 쓰는 어려움이 있다.
출처 /세상과 세상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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