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言志의 의미
나호열 (시인)
문학의 종말이 코 앞에 와 있다는 비관과 자조 속에서도 여전히 시는 발표되고 있고 팔리지 않는데도 시집은 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시인이 되기 위한 관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분투를 거듭하고 있고 수많은 문학상들은 으뜸가는 시들과 시인을 가르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는다. 통계상으로 문학인구는 줄어드는데 시장은 북적거리는 이 현상에 대해서 굳이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知情意의 유전인자를 간직한 인간들에게 의미를 되묻고 전달하고, 전달하되 장식을 가하며 다시 그 의미를 신념화하는 것의 退化가 일어난다는 징조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의미를 되묻는 - 반성하는 - 능력이 있는 한 예술과 예술의 하위개념인 문학은 절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순수와 참여의 퀘퀘묵은 논쟁을 다시 끄집어 낼 필요는 없을지라도 현상에 반응하는 존재, 반응하며 반성하는 존재, 반성의 내용을 아름답게 꾸미려는 태도를 점검하게 될 때 맞닥뜨려지는 문제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무엇을’과 ‘어떻게’의 문제가 삶의 태도를 결정하고 예술의 길을 결정하는 것이지 ‘무엇을’과 ‘어떻게’의 경중을 가르는 일이 앞에 놓아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作詩尤所難 시를 짓는 것이 더욱 어려운 것은
語意得雙美 말과 뜻이 어울려 아름다움을 얻는데 있다
위의 글은 이규보 李奎報의 「논시」 論詩 첫 구절이다. 이 구절 속에는 시작 詩作의 의의와 목표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말은 뜻을 전달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말의 기계적인 결합을 문법이라고 한다면, 말은 그 문법을 넘어서서 또 하나의 문법을 만들어가는 파생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의미의 파생력은 반드시 그 핵심에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을 때 예술의 본령에 접근한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것이 되었던 간에 ‘아름다움’을 배제한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오늘의 우리 시단에서 행해지고 있는 창작과 비평의 시선은 앞서 말한 ‘무엇을’ 보다는 ‘어떻게’에 맞닿아 있는 듯하다. 이성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성 近代性의 문제는 이미 중심을 지나 변방으로 퇴각하는 형국이고 20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던 무의식의 채굴 작업도 그 채굴의 작업자였던 ‘이성’의 통제 아래서 시들해진 형편에 놓인 듯 하다. 자연을 넘어서 생태의 문제로, 민주를 넘어서 인권과 자유의 문제로, 민족을 넘어서 세계시민으로 확장되어가는 주제의식은 다시 ‘인간다움’이라는 고색창연한 문제로 회귀하고 있는 듯하다.
『시와 산문』가을호에도 ‘인간다움’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는 여러 편의 작품을 찾아볼 수 있는데 지면의 한계 상 그 중에서 몇 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일남 시인은 시와 함께 발표한 시인수첩 「시와 삶의 내력」을 통해서 그의 시관을 피력하고 있는데 먼저 이 글의 논의에 필요한 몇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자기가 살아가는 삶을 거짓 없이 드러내면 될 것이다...어떤 사실, 어떤 생각, 어떤 슬픔, 어떤 사건 등을 독자가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상상력을 발휘해서 쓰면 될 것이다...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작업이 시의 길이 아닐까? (중략)
오늘의 신세대 시인들이 요설스런 기교로 겉으로는 어떤 재기마저 비치는 유혹스러운 시를 쓰고 상상이나 이미지의 중첩으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혹시키게 하지만 그 속은 비어 있어서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강정처럼 느낄 때가 많다.(하략)
이규보의 語意得雙美에 흡족하게 포섭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규보의 ‘아름다움’과 정일남 시인의 ‘독자가 감동을 느끼는 경지’는 부분적으로는 겹쳐지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정일남 시인의 시「산골 소년」을 감상해 보기로 하자
마을 뒷산에 머루가 익어간다
초입에서부터 가파르기 시작한 산길은
오를 때 한 쪽 손을 바위나 관목을 잡아야 한다
낭떠러지를 아슬아슬 하게 오르면
깊은 골짝은 쌓인 낙엽이 허리에 찬다
소년의 이마엔 땀이 밴다
숲속은 괴괴한데
한발 앞에서 푸드득 산꿩이 날아간다
놀란 소년이 풀썩 주저 앉는다
이불보다 따뜻한 낙엽의 감촉
소년은 날아가는 산꿩을 바라본다
저 관모 冠毛같은 목덜미의 아름다움
한편 놀란 노루녀석은
맞은 편 동산에 올라 소년을 힐끗 돌아본다
저 귀엽게 돋아난 노루귀
이 때 낙엽은 폭포처럼 쏟아져 만추를 통과한다
산은 가을 냄새로 숨이 차다
소년은 익은 머루를 정신없이 따 먹는다
소년은 머루에 취해 낙엽 위에 잠든다
짧지 않은 시의 전문을 인용한 까닭은 이 시의 구조가 어디 한군데를 토막 내어서는 읽어 낼 수 없는 맥락과 시 공간적으로 얽혀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서는 의도와 시의 흥취를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는 소년이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시작 할 때부터 머루를 따먹고 낙엽에 잠들 때까지 의 ‘가을’ 이고 공간적으로는 산길에서 시작해서 산 꿩과 노루가 사는 깊은 산속의 ‘가을’이다. 이 시는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 궁핍한 산골 소년의 내면 풍경이다. 사람이 사는 마을에 가을이 와도 배고픔은 여전하다. 소년은 그래서 가파른 산길을 올라 산으로 들어간다. 산 꿩과 노루가 있는 머루가 익는 풍요의 자연... 시인의 아날로그 적인 묘사는 퍼소나가 산골 소년이 한 시절을 회억하는 시인임을 암시하면서 ‘가을’의 의미를 반추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늘날의 디지털의 삶과 대비되는 아날로그적인 추억의 힘을 시인은 아주 단순한 구조로 함축하고 있다. 아날로그의 방식은 삶의, 사고의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이 시에는 가난에 대한 분노도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고발도 없다 머루에 취해서 잠든 소년만이 아름답다. 김진광 시인의「감자」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광 구석에 두었던
상자 속 감자에서
하얀 감자 싹이 돋았다
우리가 잊고 있는 동안
햇살 한줌 없는 곳에서
춥고 배고픔을 견디고
서로 체온을 나누며
봄을 기다렸구나
겨울 긴 터널 속에서
포기마다 주렁주렁
예쁜 손자손녀 매달린
꿈을 꾸었을까.
보채는 어린 감자 눈을
달래느라 감자 몸뚱이는
할머니 주름살을 닮아 있다
봄철이면 감자 눈을 위해
밤옻처럼 제 살을 떠 묻어도
기꺼이 자식 거름이 되는 어머니
하늘을 쳐다본 놈은 맛이 아려 맛없다며
쇠솥에서 분이 폭 나고
썩어서도 녹말가루가 되는
세상에 감자 같은 사랑
오늘 하루 만나고 싶다
김진광 시인의「감자」는「산골 소년」에 비해서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가 더 깊게 배어 있다. 감자의 생명력과 어머니의 모성은 우리가 닮고 싶은 성정이다. 두 편의 시 모두가 비유를 배제하고 진술에 가까운 풍경 묘사를 통해서 객관적 진실에 가 닿으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인과론적이라고나 할까, 사건의 단순 배열을 통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전개는 ‘인간다움’을 염원하는 슬픈 표정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시인들(화자)에게 일어난 ‘사건’은 ‘사건’ 그 자체로 다루어지고 그 사건으로 말미암은 상상력의 촉발을 유도하지 않는다. 상상력의 촉발은 자칫하면 ‘사건’의 진실을 왜곡할 수 있고. 사건에 임하는 시인의(화자의) 반성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의 자기 반성능력을 의식하면서도 다른 방향에서 ‘인간다움’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있다.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고 있는 나를 본다
흔들리며 흘러가고 있는 나를 본다
히말라야에는 바람이 불고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은 고국을 떠나 있다
설산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또 홀로 있다
마음은 밀가루 반죽 같은 것이지만
그 속에는 철사와 못과 칼날 같은 이물질이
섞여 있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다
지금 할 일은 그것들을 보는 일일 뿐이다.
신현봉 시인의 시「나는 나를 보고 있다」의 전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두 편의 시가 사건을 통한 내성 內省을 이야기 하는 것에 반해서 이 시에는 사건이 배제되어 있다. 사건이 배제되면서 그 자리에 관념이 들어차 있다. 흔들리고 흘러가는 존재인 나는 고국을 떠난, 설산의 수행자로 표명된다. 그 어디에 있던 간에 마음은 히말라야 산을 바라보듯이 할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그것이 단지 시인만이 체득한 그윽한 경지일까? 시인은 자신의 체험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희망한다. 사건으로, 관념으로....
이쯤에서 독자들은 필자가 이 글에서 의도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옛날 소크라테스가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것처럼 시인들의 관심은 인간 그 자체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그리하여 그 모든 ‘무엇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중요함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시로서 드러낼 수 있는 주제의 영역은 이미 이성에 의해서 정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예술은 그 주제를 어떤 방법으로,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옥경운 시인의 시「바위도 이름을 붙이면」은 신현운 시인의「나는 나를 보고 있다」의 관념을 다시 해체하여 관념의 실체를 보여주는데 성공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시인의 또 다른 작품인 「개심사에서」에서 심검당 나무 기둥이 구불텅함을 보고 기둥은 곧은 나무로 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이 편견이었음을 깨닫는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유감스럽게도 시인의 의도가 쉽게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것에 비해서 훨씬 실재적 관찰과 내성이 어우러져 있다고 생각한다.
산에 가면 흔히 있는 바위를
그 바위들도 이름을 붙이면
그렇게 보인다
거북바위 매바위
범바위 물개바위
그렇게 이름을 지어놓고
바위에 눈을 맞추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바위는 가만히 있는데
형상들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부처바위 갓바위 미륵바위 할미바위
남근바위 여근바위 이름을 지어놓고
그 앞에서 사람들은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두 손을 모으고 고갤 숙인다
시, 「바위도 이름을 붙이면」전문
어디까지나 바위는 바위일 뿐인데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 속 형상들을 불러 이름을 짓는다. 불가에서 말하는 一切唯心造의 경지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그 부질없는 형상에 이름을 붙여놓고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두 손을 모으고 고갤 숙인다’
이 시는 쉽게 술술 읽힌다. 이 자리에서 언급한 시들과 마찬가지로 이미지의 중첩이나 이야기의 복선구조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독자들은 편한 마음으로 시를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체험과 그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반성은 ‘인간다움’을 지향하는 시인 자신의 소중한 자산이면서 시인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대체로 이런 관점을 지닌 시들은 시의 원동력을 ‘객관적 사건’ 이나 ‘사건의 객관화’에 의존하면서 지나친 ‘상상력’의 추진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오늘의 신세대 시인들이 요설스런 기교로 겉으로는 어떤 재기마저 비치는 유혹스러운 시를 쓰고 상상이나 이미지의 중첩으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혹시키게 하지만 그 속은 비어 있어서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강정처럼 느낄 때가 많다” 는 정일남 시인의 발언은 시의 진정성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사유의 디지털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시점에서 요설스런 기교와 재기가, 상상이나 이미지의 중첩이 새로운 시의 독자를 흡인하는 통로가 되어 있으며 일정 부분 성과로 나타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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