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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궁전
이탈한 자가 문득/ 램프를 켜다

길을 걷다가 나를 만나게 되면 / 이영욱

by 丹野 2009. 2. 24.

 

루카스 사마라스(Lucas Samaras)

 

 

길을 걷다가 나와 똑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떨까?


 이영욱/연변대학교 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가끔 거울에 비쳐진 내 모습이 나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실은 가끔이 아니라 이제까지 한번도 거울에 비쳐진 모습이 나 인적은 없었다. 거울 속의 나는 항상 나의 욕망이 투사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가끔 거울 속의 내가 낯설게 느껴질 때는, 내가 보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였던 것이다.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 나르시스 신화는 바로 인간의 자기애에 대한 지나친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신인줄을 모르고 사랑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 아무리 신탁의 운명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라 하지만, 분명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모습이 자기 자신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나르시스에게 물에 비친 모습이 바로 “당신 자신이요” 라고 일러주었다면, 나르시스는 식음을 전패하고 사랑의 열병에 빠져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사랑하는 대상이 내 안에 있으니, 더 이상 외부에서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야기가 싱겁게 끝나버려 희랍신화에 올라가지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흔히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라캉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상징계에 속해 있는 ‘나’인 것이다. 상징계 속의 ‘나’란 바로 언어로 인식되는 ‘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제도나 법규-규범, 그리고 외부에서 작용하는 온갖 오인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이다. 그렇다면 ‘나’라고 믿고 있는 나의 실체는 늘 불안한 존재이다.

운명적으로 불안한 존재인 우리는, 온존한 자신의 모습을 내 안에 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외부에서 찾는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화가들과 예술가들은 자신의 자화상을 만들어 왔는지 모른다.


[1974년]

자화상으로 만들어진 대리표상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 했던 수많은 작가들은(작가 라면 누구나 자화상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발표되지 않고 혹은 완성된 작품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해도)그러나, 자신의 모습과 대리표상인 자화상을 동일시함으로서 존재의 불안으로부터 도피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가 있다. 사진가가 만들어내는 자화상과 화가가 만든 자화상은 상당히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화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보고 그리지 않는다 해도, 화가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판단하는 관념들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그려낸다.

즉 화가는 자신이라고 판단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정해 놓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지만, 사진가는 운명적으로 찍혀지는 대상임과 동시에 바라보는 존재자가 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찍혀지는 대상이 됨으로서 자동적으로 주체의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화가는 그려지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신의 생각들이 켄퍼스위에 달라붙게 되지만, 사진가는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관념의 기준을 가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찍혀지는 대상이 됨으로서 자신의 통제 밖에서 자동적으로 자화상이 만들어진다. 자신의 모습의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여지는 사진가는 자연스럽게 만족할만한 자화상이 나오기까지의 불안은 지속된다.

이 불안은 원초적인 문제인데, 사진의 메카니즘이 이 불안을 더욱 조장하는데 일조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찍음과 동시에 이미지를 볼 수 없다는 것과 촬영순간에 이미지를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 이 불안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물론 폴라로이드 사진과 디지털 사진은 다르다. 그래도 즉시 적으로 이미지를 볼 수 있다해도, 화가의 그림 그리는 방식과는 다르게 찍혀지는 ‘나’는 기계적인 자동성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다. 자신이 찍혀지는 피동적인 대상이 됨으로 해서, 관찰하는 주체의 자리는 상실되고, 카메라(관찰하는 자동기계) 앞에선 보여지는 불안한 존재자가 된다.

일반적으로 사진가 들은 사진의 이러한 메카니즘의 속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화가처럼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통제권 안에서 이미지를 만들려고 한다. 자신의 정체를 믿고 있는 사진가는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온존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자화상을 보고 확인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자화상의 일반적 정의가 작가자신이 자신의 모습을 직접 그리거나, 묘사 혹은 사진으로 찍는 것이라면, 이 과정에서 작가 자신은 주체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 작품 속에 자리잡는다. 그런데 이제부터 논의할 루카스 사마라스(Lucas Samaras)의 자화상은 좀 다르다. 그의 자화상은 찍혀지는 대상 쪽의 모습이 더 강조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자화상의 개념적인 정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마라스 자신은 셀프포트레이트 사진을 '타자에 대한 목소리로 타자가 나에게 준 복잡한 선물'로 생각하고 있다. 1978년부터 80년에 걸쳐, 사마라스는 자신의 아파트에 간이 스튜디오를 만들고 대형 폴라로이드 카메라 앞에선 자신의 친구들을 촬영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친구들의 평범한 초상사진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화면 속에 복잡한 촬영세트가 보이게 만든 다음, 한쪽 구석에서 곁눈으로 엿보기도 하고,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사마라스 자신이 항상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설정은 그의 사진이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동일한 공간 안에 있음으로써, 관객의 시선이 거꾸로 반사되어 나온다는 사실을 만들어 낸다.

사진의 시선은 본질적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있었던 작가의 시선이 관객의 시선으로 뒤바꿔 놓은 것과 같다. 때문에 대상을 촬영한 사진가의 존재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촬영 주체와 관객인 ‘내’가 너무나 밀착되어 있어서 마치 사진 속의 대상을 여기서 직접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1973년]

그러나 촬영주체인 사마라스 자신이 찍혀지는 대상과 함께 보여지게 되면서, 관객인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촬영자의 시선으로 고정됨과 동시에 작가와 달라붙어 있었던 시선의 관계는 분리된다.

바로크 회화 중 유명한 벨라스케스의「라스 메니나스」를 보면 화가자신이 왕과 왕비를 그리고 있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왕과 왕비는 화가가 서있는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흐릿하게 등장할 뿐이고, 문안 인사차 들른 공주와 시녀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왕과 왕비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서 광대로 보이는 난쟁이,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신하가 화면 속에 배치되어 있다.

이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은 왕과 왕비가 앉자있던 자리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던 시선과도 동일하다. 르네상스의 투시도법의 시선의 체계가 이 그림에서는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셀프포트레이트 사진은 이런 복잡한 시선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사마라스의 사진 또한「라스 메니나스」와 비교해보아도 재미있다.

단일시점의 투시도법의 시선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은 사진은 그러나 서구의 전통적인 오랜 시선체계를 근본부터 해체하는 꼴이 되는 것이 상당히 아이러니 한 점이다. 사진의 이러한 본질적인 특성은 현대미술의 대한 반성과 모색의 중요한 담론이 되었다. 주체적인 시선을 창조하는 작가의 위상이 관객의 시선으로 위치 변경하면서 현대 미술은 관객의 몫이 그만큼 커지면서 작가와 관객의 위계적 등급의 차이는 없어지게 된다. 물론 자본주의 미술시장에서는 이 위계적 등급차이를 끊임없이 유지하려고 하겠지만 말이다.


[1973]


[1973]

사진은 본질적으로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 그리고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대상으로 분리 혹은 연결 되어있다. 그러나 사진에서 자화상은 이들 네 가지 요소가 작가 자신으로부터 파생되고, 수렴된다. 즉 찍는 주체임과 동시에 찍혀지는 객체가 되고, 관찰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보여지는 수동적인 대상이 된다. 그래서 단일한 주체가 있을 수 없다. 엄밀하게 말해 사진으로 만들어지는 자화상은 이제까지 자화상이라는 일반적인 범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사마라스가 사용하는 폴라로이드 사진기는 촬영과 동시에 사진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필름으로 찍혀진 상태에서 최종적인 인화단계에를 거쳐 사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선택과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선택과정이란 곧 작가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자화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에 들지 않은 사진은 배제하고 마음에 드는 필름 중에서 색상, 밝기, 크기, 콘트라스트, 트리밍등을 조절하여 작가자신의 욕망을 투사한다. 즉 나르시즘이 되는 것이다. 반면 사마라스의 사진은 카메라의 자동성과 즉시성에 노출되면서 선택의 폭이 매우 제한되게 된다. 작가자신도 어떤 이미지가 만들어질지 예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반면에 1971년의 SX7O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의한 셀프포트레이트 사진과, 73년의 「포토 트랜스포메이션」시리즈의 대부분은 잠상이 현상되어 나오는 과정에서, 그 이미지에 다양한 상처를 주거나 왜곡?변형시키거나 조작하거나 한 것이었다. 일단은 이 사진들이 조작과 변형의 과정을 거치면서 작가자신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킨 것 같지만 사실 이 시리즈는 사마라스 자신를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 대해서 방어의 포즈를 취하거나 또는 사진 자체를 변형시킴으로써 그 '본다'고 하는 행위를 방해하려고 의도가 더 크다.


[1975]


[1976]

이러한 전략은 1983년부터 1984년에 걸쳐서 제작된 폴라로이드 파노라마 시리즈도 나타난다. 자신이나 타인의 사진을 띠모양으로 가늘게 절단해서, 다시금 연결시켜 가는 이 수법은 단일한 주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정체성을 흐트려서 뒤섞기도 하고, 혹은 되는 대로 그것을 타인의 사진과 짜맞추기도 하면서, 주체의 분열을 일으킨다.

사마라스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사진의 우연성과 변형된 사진조각을 통해서 정작으로 보려했던 것은 무엇일까? 알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지우려 했던 것일까? 필자도 거기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 없다. 다만 사마라스의 사진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사진으로 만들어지는 자화상은 주체의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현상학적인 체험이다.

필자_ 이영욱/연변대학교 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rxli@ybu.edu.cn)